[가정예배]10월28월~11월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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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예배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3년 10월 24일(목) 16:07

월-하나님의 축복을 여는 열쇠 감사
본문 : 시 50:23
찬송가 : 301장
 
2013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11월과 12월은 모든 교회의 주요 절기와 행사인 추수감사주일과 성탄절이 있다. 특별히 성탄절이 포함된 주현절은 교회력에 의하면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는 모든 교회절기의 시작으로 일반인들보다 우리 성도들은 새로운 한해를 앞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올해 남 두 달의 기간 동안 우리 삶의 묵상의 초점이 진정한 감사와 새로운 시작이라는 두 가지에 맞춰져야 할 것이다. 진정으로 감사함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한 소망 가운데 새로운 한해를 준비하는 시간으로 보내며, 지난 일 년 동안 감사했던 것들을 되돌아 보기를 원한다.
 
무엇보다 먼저 진심으로 올 한해 하나님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려야 할 것이다. 돌아보면 지난 일년 어느 것 하나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많은 분들이 그 어느 때보다 경제적으로 힘든 한해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골짜기가 깊듯이 쉽지 않았고 만만치 않았기에 더욱 크고 깊은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더불어 도와주고 배려해 준 이웃과 성도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 누구도 혼자 지금의 자신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한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세상 사람들도 고마운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와 마음을 전하지만, 우리 성도들이 감사를 하는 이유가 조금 다르다는 사실이다. 바로 감사야 말로 축복을 여는 또 다른 열쇠이기 때문인 것이다. 감사란 받은 것을 받았다고 인정하는 믿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미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인정하고 감사할 때 축복으로 연결되는 것, 이것이 믿음생활의 선순환이기 때문이다. 이미 하나님의 온갖 은혜와 은총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것은 기정사실이며, 또 믿음으로 사는 성도에게 베풀어주시는 축복도 이미 말씀에 약속되어 있다. 따라서 그 사이 가운데 감사만 끼워진다면  하나님 축복의 선순환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 앞서 이미 축복의 삶을 살았던 믿음의 선배들의 지혜인 것이다.
 
하나님은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마치 자신은 비록 못 먹어도 자식은 좋은 것 먹이기 원하는 어버지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우리를 향하신 크고 놀라운 계획을 이미 디자인해 놓고 계시다는 사실을 온전한 믿음으로 믿고 감사함으로 그분께서 베풀어 주시기 원하시는 축복의 문을 여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 드린다.
 
<오늘의 기도>
은혜로우신 하나님! 지난 일 년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더 큰 은혜 베풀어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 깊은 감사로 복의 문을 여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기수 목사/수동교회


화-약한 자를 감당하는 성령의 능력
본문 : 롬 15:1~13
찬송가 : 542장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로마교회 성도들, 특히 믿음이 강한 성도들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은 이 말씀을 자기 것으로 받아야 하는 오늘의 한국 교인들을 참 많이 당황스럽게 하며 부끄럽게 만든다. 우리 스스로의 영적 상태나 믿음의 정도를 가늠해 보더라도 우리는(혹은 나는) 믿음이 그리 강하지도, 약한 자의 약점을 배려하거나 성숙하게 담당하지도, 이웃이나 형제들을 기쁘게 하는 것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지도, 선을 이루거나 덕을 세워가는 일에도 함량 미달일 때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기는커녕 어떡하든 내가 돋보이길 원하고,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약점은 너무 잘 보이고 내 허물이나 약점은 인정하기도 어렵거니와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나의 유익과 만족을 그 어느 것보다 우선시하며 모든 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태도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고 판단하는데 누구보다도 빠르고 열심인 그런 존재이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 스스로도 그런 자신을 향해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 앞에서 우리는 아무런 성찰이나 뼈아픈 자기 고백 없이 말씀을 대해선 안 된다. '이런 부끄러운 모습인 나를 어쩌면 좋으며 늘상 되풀이되는 이런 자기모순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가!'라는 탄식과 함께 말씀 앞에 선 자신의 허물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말씀대로 살 자신도 능력도, 그런 성숙한 믿음도 너무 부족한 존재임을 고백해야만 한다. 인정과 고백의 바탕 위에서 이 말씀을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습관과 삶의 방식을 해결하지 않은 채 말씀의 요구대로 어찌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오늘 본문은 실천 가능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7절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는 것이다. 본받아야 할 모델은 항상 예수님이되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변화되어 하나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임 받고 있는지를 항상 자각하고 그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만이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고 약점을 조금이나마 담당해주고 허물을 덮을 줄 알게 된다. 약자를 돕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경험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다. 또한 13절 말씀처럼 하나님으로부터 기쁨과 평강을 충만하게 받는 자만이 내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약한 자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므로 비로소 약한 자뿐 아니라 모든 이웃을 기쁘게 하고,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게 된다고 오늘 본문의 말씀이 강조하고 있다.
 
<오늘의 기도>
말씀 앞에서 항상 자신의 부족함을 살피며 실천 가능한 영적 지혜와 방법을 찾으며 말씀의 요구들을 가능한 현실로 바꾸는 성령의 능력을 날마다 의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학산 목사/김포이주민선교교회


수-개혁은 곧 변화요, 새로움이다.
본문 : 롬 3:27~31절
찬송가 : 288장

10월 마지막 주간이 되면 종교개혁기념일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역사 중 중세기를 영적 암흑시대라고 말한다. 이는 교회가 세속화되어 외적인 권위만 앞세워 내적인 평안과 기쁨이 상실되었던 시대를 일컫는 말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시발점은 오늘의 신앙인에게 중요한 의미를 준다고 본다. 사회 전반에 변화를 요청받는 시대가 되었다. 특히 교회 안팎에서의 변화의 요구는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우리는 세상을 향하기 전에 우리를 바로 봐야 한다. 우리가 누구인가? 하나님이 그 은혜와 자비로써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의가 제시되었음을 깨닫고, 믿음으로 사는 자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세상으로 보내어진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한다. 증인의 삶은 곧 변화이다. 어떤 변화인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인격의 변화이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통해 변화를 요구했으나, 거부한 무리들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바리새인, 서기관 등 지도자들이었다. 왜 예수님이 변화를 요구하셨는가? 이는 그들이 변해야 그 시대 사람들이 변하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세상을 향한 잘못을 지적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변화되기를 요구하신다. 루터는 본문 28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 하노라"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써 살아야 함을 깨달았다. 믿음의 결과요 열매가 바로 선행이다. 우리는 날마다 자신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말씀을 바로 듣는 자세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했다. 말씀이 풍성한 시대이다. 문제는 말씀을 말씀이 되게 듣고 있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이방세계에 하나님을 알리도록 언약의 백성으로 사랑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독점하여 살았다. 이방인을 죄인처럼 취급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하나님의 은혜만 생각하고 그 은혜에 합당한 삶보다는 이웃과 세상을 정죄하는 식의 삶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말씀을 바로 들음은 성경을 가까이 하고 기도에 힘쓰며 사는 것이다. 삶은 기도요 기도는 삶이다.
 
그리고 변화는 삶의 현장으로 나타내야 한다. 변화는 외침이 아닌 생활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철저히 길들인 과정이 주님의 삶이요 십자가이다. 골고다의 채찍, 십자가에 못 박는 망치소리, 모두가 쓰리고 아픔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자신을 길들여,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우리의 믿음을 통한 변화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반드시 세상에 생명이 되게 하신다.
 
<오늘의 기도>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의롭다함을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내가 먼저 신앙적 인격으로 길들여 말씀을 바로 듣고 변화되어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믿음의 열매가 이웃과 세상을 변화시키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한병 목사/평화교회


목-하나님 아버지
본문 : 눅 15:11~24
찬송가 : 86장
 
탈무드의 저자 마빈 토카이거는 유대인의 가정에서 아버지는 네 가지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했다.
 
첫째 공급자(Supplier), 둘째 보호자(Protector), 셋째 인도자(Guider), 넷째 교육하고 훈육하는 자(Instructor)이다. 본문의 탕자의 비유에 나타난 하나님(아버지)은 어떤 하나님(아버지)일까?
 
첫째, 좋으신 아버지이시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돌아올 분깃이란 유산을 뜻한다. 세상을 떠나지 않은 부모에게 유산을 요구한 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요구였다. 당시 사회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반인륜적인 행동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떻게 하였는가? 각각 나누어 주었다. 유산을 요구한 둘째만이 아니라 맏아들에게까지 나누어 주었다. 여기서 보여주는 메시지는 좋으신 아버지시라는 것이다.
 
둘째, 부유의 아버지이시다.
 
상속 받은 둘째 아들은 그 돈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여 다 낭비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돼지를 치지만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었다. 이때 아버지가 생각났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탕자가 어려울 때 생각나는 아버지, 어떤 아버지였을까? 따뜻한 아버지요, 풍족하신 아버지였다. 성경은 하나님을 부유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한다(학 2:8). 하나님 아버지는 마음껏 의지해도 된다. 하나님은 자녀가 받아 누리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히 11:6). 풍족하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셋째, 회복의 하나님이시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혀 주었다. 이것은 아들의 권리를 회복시키는 행위이다. 손에 가락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표시이다. 또 신을 신겼다. 당시 종들은 맨발로 다녔다. 아들만이 신을 수 있었다. 이처럼 아버지는 아무 조건 없이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를 회복시켜 주었다. 아들은 품꾼의 한 사람으로 봐달라고 하였지만 아버지는 모두를 회복시켰다.
 
탕자가 한 일은 무엇인가? 아버지께로 돌아온 것밖에는 없다. 여기에 복음이 있다.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 이것은 탕자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결심이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 돌아가면 모든 권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좋으신 아버지, 부유의 아버지, 회복의 아버지이시다.
 
<오늘의 기도>
회복의 은총이 주님께 있음을 믿고, 탕자와 같은 인간이지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긍휼이 여겨 주시며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인근 목사/원주제일교회


금-집중하는 믿음
본문 : 요 6:16~21
찬송가 : 407장
 
예루살렘은 전쟁이고 갈릴리는 평화이다. 성지의 중심이라는 예루살렘은 사실 복잡하고 시끄럽고 정신이 없다. 그러나 갈릴리는 호수와 신록의 싱그러움이 넘치고 고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주로 갈릴리에서 활동하셨다. 갈릴리는 예수님께 딱 맞는 곳이고 또 예수님을 묵상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갈릴리 호수는 넓어서 바다라고도 불린다. 호수는 산들에 둘러싸여 있는 분지 형태이다. 바람이 이 산을 타고 내려오면서 빨라지고 거세어진다. 산을 타고 내려온 큰바람은 갈릴리 호수를 뒤집어엎는다. 그래서 온화한 갈릴리 호수에도 큰 풍랑이 일게 된다. 
 
요한복음 6장 16절 이하에 보면 배를 탄 제자들이 그런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았다.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의 상황 속에 제자들은 두려움에 빠져 허둥지둥 댄다. 고난은 복수로 오기에 견디기가 더 어렵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 잡힌 나머지 예수님을 귀신으로 생각했다. 두려움이 신앙의 가장 큰 걸림돌 이유가 여기 있다. 주님과의 관계가 깨져 버리기 때문이다. 두려움 때문에 열혈 제자 베드로는 여종 앞에서 주님을 배신했고 저주까지 했다.
 
두려워 말라는 명령이 성경에 365번 나온다. 고해와 같은 삶을 살아가지만 믿는 자들에게 매일매일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두려워하지 마라"이다. 그만큼 두려움은 강력하다. 어떻게 하면 두려움을 이길 수 있을까?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찾아오시어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바다 위를 걸어오셨다는 것은 파도를 '밟고'계셨다는 말이다. 즉 모든 환난을 밟고 계시는 분이 주님이시다. 우리의 모든 고통을 이미 다스리고 계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시다. 그렇다면 고통만 보고 있는 눈을 조금만 위로 들면 된다.
 
예수님께서 파도를 잠재우지 않고 파도 위를 걸으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마태복음의 병행구절을 보면 베드로도 바다 위를 걷는 은혜를 누린다. 그 순간에도 풍랑은 그대로였고 베드로는 주님을 보지 못하고 부는 바람, 즉 파도를 주목하게 된다. 그때 그의 몸은 물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결국 두려움을 이기는 문제는 다름 아닌 집중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파도를 보면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주님께 집중한다면 폭풍우 내 몸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
 
믿음의 사람은 두려움이 아니라 신뢰의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본다. 영적인 안목을 추슬러 끝까지 주님께 집중해야 한다. 그때 독수라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이 날아오를 수 있다.
 
<오늘의 기도>
주님, 태풍이 불어와도 주님을 바라볼 때 거뜬히 이겨내게 하소서.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이 하셨음을 감사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호성 목사/금성교회


토-유람선과 구조선
본문 : 신 30:15~20
찬송가 : 521장
 
금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황금'과 '소금'과 '지금'이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지금'이다.
 
김장철에 중요한 것은 '소금'이다. 7살 된 여자아이에게 물었다. "소금이 무엇이지?" 아이는 "배추를 죽이는 거예요"라고 답했다. 그렇다. 배추를 죽인다. 배추는 몇 번을 죽어야 할까? 여섯 번이다.
 
첫째, 밭에서 뽑힐 때 죽는다. 둘째, 다듬을 때 죽는다. 셋째, 소금으로 절일 때 죽는다. 넷째, 양념으로 버무릴 때 죽는다. 다섯째, 먹기 위해 도마에서 썰 때 죽는다. 여섯째, 우리 입에서 씹힐 때 또 죽어야 한다.
 
인생은 고해라고 하면서 흔히 우리 인생을 바다로 비유하곤 한다. 바다에는 어선, 유조선, 운항선도 있지만 우리가 탈 수 있는 유람선과 구조선도 있다.
 
유람선, 얼마나 낭만적인가? 타이타닉이 그 대표적인 배였다. 우리는 모두가 유람선을 타기 원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유람선을 타며 인생을 멋지게 살기도 한다. 그러나 끝까지 이 유람선을 탈 수 없다. 언젠가는 내려야 할 때가 오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말한다면 유람선은 넓은 문이다. 그 길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그러나 넓은 길은 결국은 사망의 길이요, 저주의 길, 지옥의 불로 떨어지는 길이다. 구조선은 볼품없고, 낭만도, 호화로운 분위기도, 재미도 없는 배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싫어한다. 좁은 문이다. 외로운 길이며 고통의 길이다. 협착한 험한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은 생명의 길이요, 복된 길이요 천국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유람선을 타겠는가? 구조선을 타겠는가?
 
우리 모두 구조선으로 이미 옮겨탄 줄로 믿는다. 구조선에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을 구조하는 일이다. 구원의 역사 이것이 하나님의 가장 뜨거운 소망이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는 데 도구가 되어야 한다.
 
철학자인 케에르케고르는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과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이 어떻게 다른가를 이렇게 비교해 보았다.
 
"캄캄한 시골 길에 한 농부가 등불을 켜고 마차를 몰고 간다. 불행히도 이 농부는 마차에 켜 놓은 등불 때문에 아름답게 빛나는 밤하늘을 보지 못한다. 세상에서 누리는 즐거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즐거움은 그것이 '고급한 즐거움'이든 '저급한 즐거움'이든 간에 이 농부가 마차에 켜고 다니는 등불과 같은 것이다."
 
구조선의 선장이신 예수님을 섬기며 함께 구원역사에 동참해야만 천국에 가며 천국에서 아름다운 보석집이 지어질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진정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신 주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고 순종할 수 있도록 성령님 간섭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정자 목사/한강성심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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