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10월14~19일

[가정예배]10월14~19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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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10일(목) 15:57

월-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으라!
본문 : 로마서 13:11~14
찬송가 : 330장
 
쓸쓸함이나 허무감을 잘 느끼게 하는 가을이 되거나, 노안이 갑자기 찾아오거나, 체력이 갑자기 저하되는 등 눈에 띄는 몸의 변화는 지난 날을 후회하게 되거나 돌아보게 만들기도 하면서 앞으로 살아갈 삶의 선택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살아온 삶이 후회되거나 마치 '빈 손의 이미지'처럼 내 인생의 열매나 남겨진 것들에서 삶의 무상함을 느끼면 계절의 변화나 시간의 흐름을 인식케 되는 순간 자신의 살아온 날들과 삶의 방식 등을 근본적으로 돌아보고 재점검 해보는 계기가 된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라는 표현에서 이 시기를 '자다가 화들짝 놀라 깨어있어야'하며 '우리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졌고',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음'을 자각하고 영적으로 긴장해야만 하는, '개인의 역사나 이 세상 역사에 하나님의 개입과 심판이 임박한 때'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의 심판이나 죽음일 수도 있고 역사적 종말의 때가 임박했음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영적 자각과 각성의 때임을 강조한 까닭은 방탕과 술취함, 음란과 호색, 다툼과 시기와 같은 일들이 이 세상에 만연해질 것이고 그런 일들이 하나님의 개입과 심판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한마디로 본문에서는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경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입고 있는 어둠의 옷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옷은 착용하거나 벗을 때 이외에는 우리 몸에 걸쳐져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할 만큼 옷을 입는 사람과 한 몸이다. 즉 내 안에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 세상의 정욕과 돈을 좇는 삶의 태도, 즉 오늘의 본문이 지적하는 방탕함이나 술취함, 음란과 호색, 다툼과 시기의 옷을 걸친 채 살아가게 되어 있다. 이런 삶의 태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옷이 옷을 입는 사람과 한몸이듯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예수님과 연합해야만 어둠의 일을 벗고 믿음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옷이 또한 신분이나 직분을 나타내고 보호의 기능이 있듯이 예수님이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려 할 때 어둠의 일은 우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되고, 또한 말씀과 기도의 옷으로 우리 믿음과 영혼을 무장할 때 유혹과 시험많은 종말의 때를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게 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지금이 깨어 영적으로 각성하고 기도할 때임을 알고 내게 맡겨주신 직분과 사명 신실하게 더 잘 감당할 수 있는 지혜와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학산 목사/김포이주민선교교회

 


 

화-예수님처럼 생각하고, 그림을 그리자
본문 : 빌 2:5~11
찬송가 : 455장
 
우리의 일상은 사람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가정, 이웃, 거리, 그리고 일터에서 많은 이들을 만난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크게 나누어 본다면 마음에 새겨 두고 싶은 사람들과 빨리 잊고 싶은 사람들이다. 우리의 마음에 오래 새겨두고 싶은 사람은 친절하고, 따뜻하고, 진실된 마음을 드러내며 도움을 주는 사람일 것이다. 그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고난도, 기쁨도, 함께 나누는 사람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반대로 악의적이고, 냉정한 모습, 이기적인 사람, 무엇인가 비뚤어지게 바라보는 사람은 빨리 잊어버리고 싶다. 이와 같이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내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나의 모습을 그려놓고 있으며, 다른 이가 나의 마음에 그들의 모습을 그려 넣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누구와 함께 있든지 우리의 말이나 태도, 행위들이 사람들의 마음에 그림처럼 그려지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어떤 그림을 그리며, 다른 이들에게 그려져야 할까?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본문에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마음에 그리며, 그 그림을 세상에 드러낼 것을 말씀하신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그림은 늘 겸손한 모습이다. 주님이 보여주신 이 겸손한 마음의 그림을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심령에 새겨주심으로 영원을 사모하며 살아가게 하셨다. 주님의 낮아짐의 겸손은 우리를 살리셨다. 생명을 사랑하게 하셨다. 영원을 소유하게 하셨다. 주님이 그려주신 겸손의 그림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가득하게 만들어 주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은 주님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주실 뿐 아니라 현세와 내세의 모든 권세를 정복하신 승리자로 세우셨다. 하나님은 야고보 사도를 통해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하신다. 그 주님이 우리를 높이시면 존귀한 자로 여김을 받게 된다. 그뿐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에게 승리자의 삶을 살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오늘도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 승리의 삶을 세상에 그려 넣으라고 하신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새겨진 주님의 겸손을 본받아 그림을 바르게 드러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고백하며 존귀와 영광을 드러내는 삶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이제 구속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스스로 믿음의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가에 따라 다른 이들에게 주님의 겸손한 마음을 그려 넣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영원한 승리자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을 마음에 바로 새겨 세상을 향해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한병 목사/평화교회

 


 

수-열매 맺는 신앙
본문 : 눅 13:6~9
찬송가 : 454장
 
가을은 추수의 계절이다. 농부는 이른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이 오면 결실의 열매를 찾는다. 심은대로 거두는 것이 농작의 법칙이며 이는 예외가 없다. 또한 나무는 열매로 그 상태를 알게 된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신 열매맺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첫째, 주님은 열매를 기대하고 계신다.
 
본문은 심은지 3년이 되어도 열매맺지 않는 무화과 나무에 대한 실망한 주인의 이야기이다. 무화과 나무를 심은 목적은 분명하다. 열매를 보기 위해서이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적 경고의 말씀인 것이다.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 열매 맺기를 원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 열매를 맺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주인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하여 더 이상 참고 인내할 수 없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 때 포도원지기는 일년만 더 참아달라고 주인께 간청한다. 포도원지기는 예수님이시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무화과 나무에 대해 열매를 기대하신 것처럼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 대한 열매를 찾고 기대하고 계신다. 
 
둘째, 열매 맺지 못함에 대한 회개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
 
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적극적인 죄가 있고 소극적인 죄가 있다. 악한 의도를 가지고 남을 해치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적극적인 죄이지만, 선한 것임을 알고도 행치않는 것이나 게으른 것 등도 소극적인 죄라고 할 수 있다. 열매맺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소극적인 죄이다. 혹시 어떤 사람은 '내가 힘이 없고 능력이 부족해서 열매맺지 못하는 것이 왜 죄입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인이신 하나님은 오늘 본문 7절에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고 책망하신다. 때가 되었는데도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는 단지 열매맺지 못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땅을 황폐화시키는 해로운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성숙한 성도라면 열매 없음에 대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셋째, 이제라도 열매 맺음에 대하여 열망하시기 바란다.
 
우리에게 아직 기회는 있다. 주님께서 일년동안 참아달라고 간청하신 것은 기회를 주신 것이다. 마지막이라 생각되는 때에도 기회는 있다. 왜냐하면 의인 열명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근거로 구원의 은혜를 베풀고자 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 무르익는 추수의 가을에 열매 맺는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은혜로우신 하나님, 추수의 계절인 이번 가을에는 하나님의 성도들과 또 모든 가정들이 다 열매맺는 결실의 계절을 맞이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기수 목사/수동교회

 


 

목-여호와 앞에 
본문 : 사사기 11:1~11
찬송가 : 288장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문장이다. 본문의 1절을 보면 성경에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문장이 나온다. 입다가 큰 용사라면 그에 합당한 설명이 뒤에 나와야 한다. 그러나 바로 나오는 말이 기생이 낳은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복형제들에게 쫓겨난다. 이방인의 땅에서 잡류, 즉 깡패들의 두목이 된다. 이런 사람이 도대체 왜 큰 용사인가? 하나님이 들어 쓰신 이유가 오늘 사건에 나온다.
 
첫째, 그가 가진, 믿음의 용기 때문이다. 강력한 암몬 족속이 침입해왔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에 맞서 미스바에 진을 친다. 그런데 싸움을 이끌 장수가 없다. 누구 하나 용기를 가지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결국 장로들은 돕으로 가서 입다를 만난다. 입다에게 길르앗의 머리될 것을 제안하며 싸움을 이끌어 달라고 한다. 입다는 누구를 믿을 사람이 아니다. 전세는 이미 암울한 상황이다. 더구나 입다는 고향에서 내쫓긴 상처가 크다. 그러나 놀랍게도 입다는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왜 그랬을까? 9절을 보라.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주시면" 하나님을 의지하여 용기를 내고 있다. 책임지실 필요가 전혀 없음에도, 예수님은 우리 죄에 대한 책임을 십자가로 지셨다. 주님은 이 시대에도 책임질 사람을 찾으신다. 에스겔 22장 30절,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입다가 가진 이 믿음의 용기, 책임감이 큰 용사로 일컬음을 받은 것이다. 
 
둘째, 입다는 여호와 앞에 서 있었다. 이것이 입다가 큰 용사로 인정받은 결정적인 원인이다. 입다는 창녀의 자식이다. 가족들에게 버림받았다. 아무도 의지할 사람 없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인생. 그러나 입다는 살아남았다. 결국 돕에서 건달들의 두목이 되었고 고향 땅 길르앗의 장로들이 스카웃 제의를 할 만큼 이름이 알려졌다. 상처와 분노가 얼마나 컸을까? 고집과 아집으로 똘똘 뭉쳐져 자신의 주먹만 믿고 사는 인생이 될 것이다.
 
입다도 기드온의 서자 아비멜렉처럼 피의 복수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입다는 달랐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입다는 '여호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분노와 상처 앞에 서 있지 않았다. 그는 사람 앞에 서 있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 큰 용사로 쓰임 받았다.
 
가정 안에도 내재된 또는 드러난 상처와 분노가 있다. 사람 때문에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 하나님이 듣고 계신다. 끝까지 여호와 앞에 서 있는 자는 승리하여 자신의 인생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구한다. 
 
<오늘의 기도>
내 안에 상처와 분노가 내 눈을 가립니다. 때로는 사람이 내 마음을 허뭅니다. 그러나 끝까지 주님 앞에 서 있는 신앙으로 승리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호성 목사/금성교회

 


 

금-휘파람을 불어 모으시는 하나님
본문 : 슥 10:8~12
찬송가 : 442장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휘파람을 부신다고 했다.휘파람은 어떤 때에 어떤 사람이 불까?

사람들이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입에서 절로 나오는 게 휘파람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부를 때 휘파람을 불어 신호를 보내는 경우가 있다.
 
성경 66권 중에서 '휘파람'이란 단어는 오직 한 군데 오늘 본문에만 있다. 휘파람의 원조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누구를 향하여 휘파람을 불으셨을까? 본문 8절에 의하면 구속한 백성을 향하여 휘파람을 불어 모으신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여러분을 휘파람을 불어 모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곁에 두기 위해서 휘파람으로 불러 모으신다.
 
9절에는 흩어진 자들을 모으기 위해 휘파람을 불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먼 곳에 있는 자들을 위해 휘파람을 불어 주신다고 했다. 영적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자들을 다시 불러 주신다는 의미이다. 처음 사랑, 처음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10절에 의하면 애굽에서, 앗수르에서부터 모으신다고 했는데 이는 여러 나라의 포로로 잡혀있던 자들을 해방시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악한 세력에 붙잡혀 있던 자들, 문제에 매여 있는 자들, 또는 죄악에 잡혀있던 자들을 풀어주시고 용서하신다는 말씀이다.
 
어떤 어둠 속에 있던 자들도 하나님의 휘파람 소리에 자유를 얻으며, 하나님의 휘파람 소리에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휘파람 소리는 진정 구원의 소리이며, 즐거운 소리가 아닐 수 없다.
 
본문 11절에 보면 우리들이 고난의 바다를 지나갈 때에 바다 물결을 치셨다고 했다. 휘파람은 이처럼 우리들을 위협하는 거센 물결을 제압해 주시는 위력이 있다. 깊은 곳은 마르게 하시고 적들의 교만을 꺾으시고 나를 억누르던 법을 다 없애주신다고 강하게 말씀하고 있다.
 
또한 8절 끝부분에 번성케 하신다고 하셨으며 번성케 해주시는 이유는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행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신다. 풀이하면 첫째, 하나님만 의지하고, 둘째,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과 셋째, 만사를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리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휘파람을 불고 계신다. 우리는 언제나 그 소리에 민감하게 귀 기울이며 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좌절과 고통 속에 있는 우리의 이웃을 향하여 우리도 희망의 휘파람, 사랑의 휘파람, 복음의 휘파람을 불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항상 기다려지는 하나님의 휘파람소리를 놓치지 않고 잘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고 우리의 영을 열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정자 목사/한강성심병원 원목

 


 

토-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
본문 : 역대상 11:9~10
찬송가 : 288장
 
다윗의 집은 점점 강하여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갔다(삼하 3:1). 왜 그렇게 된 것일까? 다윗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셨지만, 사울에게는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승리, 천국, 구원이요 은혜요 행복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첫째,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씀한다(행 13:22).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란 그가 하는 일이나 생각이 하나님 말씀과 같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많은 왕들을 무엇으로 평가하였는가? 그들의 정치력, 평화유무로 따지지 않았다.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했느냐? 우상숭배는 하지 않았는가? 그것으로 따졌다. 우리는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려고 애쓰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과 중심을 보신다.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였던가? 어릴 때부터 들판에서 양을 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다.
 
둘째, 하나님과 의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한 것은 매사에 하나님께 물어보고 의논하며 일을 했기 때문이다(삼하 2:1). 자기가 다 계획하여 결정하고 묻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우롱하고 사람을 우롱하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다윗은 사울의 사후 유리한 정세 속에서도, 블레셋과 싸울 때도(삼하 5:19)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러나 사울의 실패는 묻지 않은 것이었다(대상 10:14).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과 함께 하신다.
 
셋째,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윗이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다윗에게 대단한 충신이나 대단한 용사가 많았다. 그것은 다 하나님이 붙여주신 은혜였다(대상 11, 12장). 대략 숫자를 계산해도 수백 명은 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우리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 은혜를 주신다(약1:17). 능력을 구하면 능력을 주신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라."
 
물질을 구하면 물질을 주시고, 동역자를 구하면 동역자를 주신다. 모세 곁에는 아론과 훌과 여호수아가 있었고, 바울에게는 바나바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있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 점점 더 강성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란다.
 
<오늘의 기도>
항상 나의 생각과 나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찾고 생각하는 믿음을 주옵소서. 나의 가진 것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는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인근 목사/원주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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