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9월9~14일

[가정예배]9월9~14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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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9월 03일(화) 13:34

월-쓴 물을 단 물로
본문 : 출 15:22~27
찬송가 : 246장
 
애굽 군대의 추격을 받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홍해를 무사히 건넜으나 다른 문제를 만나게 되었다. 사흘길을 걸었음에도 물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가 마라에서 물을 발견했는데 그 물이 너무 써서 마실 수가 없었다. 인간은 물이 없으면 생명을 부지할 수 없기 때문에 마라의 쓴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고통이 되었다.
 
우리의 인생에는 마라의 쓴물처럼 쓰라린 환난이 다가올 때가 많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첫째, 원망 대신 기도를 해야 한다.
 
마라의 쓴물을 접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원망이었다. 그들은 불과 3일 전에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는 기적을 체험했고 그들을 추격하던 바로의 군대가 홍해에 수장되는 것을 직접 목도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했는데 3일만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다.
 
이 때 모세가 취한 행동은 기도였다. 본문 25절에 의하면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는 원망 대신 기도해야 한다. 원망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태만 더 악화시킬 뿐이다. 그러나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불러 일으킨다. 모세의 기도에 반응하셨던 하나님은 우리 성도의 기도에도 반응하신다. 그러므로 환난을 당했을 때는 기도로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해야 한다.
 
모세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은 한 나무를 가리키셨다. 그래서 모세가 그 나무를 마라의 쓴물에 던졌더니 그 물이 달아졌다.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물을 마시고 해갈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모세가 마라의 쓴물에 던진 나무는 무엇을 상징할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한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죄수를 사형시키는 나무형틀이었지만 이 십자가는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생명의 나무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단물을 쓴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증거했다. 우리 주님께서도 십자가로 승리하셨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의 환난을 이겨낼 수 있다.
 
환난을 당할 때 원망 대신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함으로써 이겨내야 한다. 이같이 행함으로써 환난에서 승리하여 평안을 얻으시기를 기원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환난을 만날 때 원망보다는 기도하게 하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함으로 승리함으로 주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문성열 목사/여주사랑교회


화-지금 나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본문 : 갈 5:10~13
찬송가 : 288장
 
사무실에 있으면 해마다 꼭 찾아오는 분이 있다. 일 년에 한번 오는 분이지만 이 분이 다녀가면 마음이 편안하다. 바로 가스점검원이다. 가스가 새고 있는지 확인하고 '안전필'마크를 붙여 놓고 간다. 그러면 더 이상 가스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일상에서 점검하는 것이 가스만은 아니다. 40대 이상이 되면 2년에 한 번씩 건강을 위해 필요한 건강검진을 받는다. 정기 검진 날짜가 다가오면 혹시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부담이 된다. 그러나 검진이 끝나고 이상이 없다는 소견을 들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신앙 점검 또한 필요하다. 초기에 질병의 원인을 발견하면 치유 확률이 90%를 넘는다고 한다. 건강한 신앙으로 성숙하기 위해서 영적인 질병도 초기에 발견하여 신앙 상태를 정직하게 점검해보자
 
첫째, 회심의 상태를 살펴보라. 나의 회심이 어떠한지, 회심한 이는 죄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자기 몸을 의의병기로 드리고 있는지, 의의병기로 싸움을 감당하는지 살피라. 새가 스스로 자기의 날개로 날듯이, 내 신앙도 스스로 믿음의 날개짓을 하고 있는가? 독수리에게 참새의 날개가 당치 않듯이, 비둘기에게 부엉이 날개가 생뚱맞듯이, 삶의 형태에 어울리는 나만의 삶의 날개로 성장하고 있는지….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지만, 나를 타인처럼 살게 할 수는 없다. 나의 몸짓, 나의 빛깔, 나의 향기로 나만의 믿음의 날개를 활짝 펼쳐보라.
 
둘째,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 우선순위에 있는지 살피라. 주님을 따르는 것은 자기 부모와 형제 자녀 물질보다 우선순위다. 힘들고 어렵게 보이나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는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 우선순위에서 흔들리지 않는지 살피는 것이 삶의 목적에 대한 점검이다.
 
셋째는 자발적 불편의 삶을 즐기라. 예수님은 가난을 경험하신 분이기에 가난의 아픔을 알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천국 백성의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기뻐하기를 원하신다. 하늘의 것을 기뻐하는 자는 이 땅에서 조금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그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자랑은 '오직 십자가'라고 했다. 복음을 전할 때 그의 영광이 충만하게 된다. 우리도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이다. 우리는 이 놀라운 복음을 자랑하며 전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이 신앙점검이야 말로 우리의 영적 충만을 지속하게하며 참된 믿음을 확인하는 길이다. 매일 신앙을 점검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천국백성이 되시기 바란다.
 
<오늘의 기도>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를 증거하고, 십자가와 함께 사는 것이 행복임을 고백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윤향자 목사/법성교회


수-생수의 강이 흐르는 배
본문 : 요 7:37~39
찬송가: 526장
 
올해 여름은 폭염과 열대야로 힘든 계절이었다. 여기에 전력난까지 겹쳐 더 힘들었다. 무더위의 계절은 시원한 물이 그리운 때이다. 물은 우리의 생명과 건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 깨끗한 물은 더욱 그렇다.
 
강이 흐르는 곳 주변은 땅이 비옥하고 식물이 잘 자라 곡창지대가 된다. 맑은 강물에서는 물고기들이 살기 좋고 그런 강물은 사람들의 식수원이 된다. 생수의 강은 깨끗하고 살아있는 물이 흐르는 강이다. 본문에서 주님은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리라." 여기서 배란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생수를 말할 때,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이시다"라고 한다.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렸음이니이다"라고 한다. 또 예수님도 생수의 공급자이심을 말씀하신다. 본문은 또한 성령님도 생수가 되신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주를 믿는 자에게 성령이 임하심으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게 된다고 했다.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에 생수의 강이 흐르는 곳이 있을까? 오염이 전혀 안된 강은 매우 귀하다. 하늘나라에는 생수의 강이 흐른다고 말씀하신다. 생수의 강이 흐르는 마음은 옥토와 같은 마음이다. 사막같은 마음은 메마르고 건조하고 황량한 마음이다. 은혜가 마르고 감사가 없으며 기쁨이 없다. 옥토같은 마음은 우리 마음을 활기있고 소망이 가득하게 한다. 생수가 흐르는 강가에 심겨진 나무가 가뭄을 타지 않듯이, 옥토의 마음을 가진 성도는 영적인 가뭄을 타지 않는다.
 
인생에는 목마름이 있다. 참 사랑을 구하지만 그런 대상을 찾기가 어렵다. 즐거움과 기쁨에 목말라 그것을 추구하지만 후유증이 없는 기쁨을 세상에서 찾기가 어렵다. 세상 것들은 사람의 마음을 만족케 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세상 것을 많이 가져도 자족하는 마음이 없으면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 사람의 마음은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으로 채울 수 있게 된다. 성령이 충만한 마음은 하나님으로 충만한 마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앙망함으로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며, 그 은혜를 누리며 살 때,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된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충만해질 때, 생수의 강이 흐르는 만족한 삶을 살게 된다. 이런 복된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저희 마음이 하나님으로 충만케 하소서. 하나님을 앙망함으로 성령충만한 마음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과 믿음으로 충만한 마음이 되게 하소서. 옥토의 마음이 되어 만족한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홍권 목사 / 신창교회


목-그리스도인의 소통  
본문 : 막 7:31~37  
찬송가 : 540장
 
우리 속담에 '말 한 마디에 천 냥의 빚을 갚는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상대방과의 의사소통이 잘 되면, 많은 액수의 채무도 순조롭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국의 경영학자 웰더의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경영자들은 실제 근무시간의 70%를 소통을 위해서 사용하며 모든 직무수행 함에 있어서 70%는 소통의 장애로 야기되고 있다"고 한다.
 
소통(疏通)의 사전적 의미는 '새길 소', '뚫을 통'. 즉, '막히지 않고서 통한다' 또는 '생각하는 바가 서로 통한다' 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통은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이자 정서이다. 소통이란 정보교환과 함께 인격적인 관계형성을 이루게 하여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소통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소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소통은 자신이 선호하지 않는 사람과도 상대하여야 한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귀 먹고 말을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신 기적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동쪽에 있는 데가볼리라는 지역에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이 귀먹고 말을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나와서 고쳐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 사람은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고통가운데 살고 있었던 사람이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외부세계와는 단절된 채 살고 있었던 사람이다. 본문 33~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 손가락을 그의 양 쪽 귀에 넣으시고 침을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면서 "에바다"라고 외치셨다.
 
이 사람은 곧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듣게 되었고 말을 하게 되었다. '에바다'는 '열려라'는 뜻이다. 이제 이 사람은 듣기 시작했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비극인가? 천국 복음을 듣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비극인가? 예수님께서는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시면서 들을 귀가 있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초대교회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서 보듯이 교회는 다양한 언어를 내면서도 함께 들을 수 있는 소통의 자리를 자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또한 교회는 외부의 사람들과 정보를 교환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더욱 원활하게 하여 소통에 힘써야 할 것이다.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마음과 생각이 소통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우리에게 언어를 사용 할 수 있는 혀와 입, 그리고 들을 수 있는 귀와 마음과 생각의 지각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성과 우리의 이웃과 소통 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영수 목사/무주 대차교회


금-백부장 고넬료의 가정
본문 : 행 10:1~5
찬송가 : 559장
 
고넬료의 가정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었다.
 
고넬료는 피정복민인 유대인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했다. 고넬료는 자기 혼자 신앙생활 하지 않았다. 온 가족이 함께 신앙생활 하였다. 내 영혼에 관심을 가지는만큼 내 가족의 영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가족구원이 정상적인 구원의 단위이다. 가족 가운데 단 한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그 가정의 선교사이다. 가족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절대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 간절히 기도하고 신앙생활이 왜 좋은지를 보여주고 눈물로 호소하고 그를 위해 애씀으로 그를 교회로 인도해야 한다.
 
고넬료의 가정은 이웃 사랑에 힘쓴 가정이었다
 
고넬료는 정복민에게 횡포를 부리고 그들을 압제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도와주고 섬겼다. 그는 매우 겸손했고 긍휼과 사랑이 풍성한 사람이었다.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 주었다.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라."(잠 19:17)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5~17)
 
고넬료의 가정은 기도의 가정이었다.
 
생각날 때만 기도하는 가정이 아니라 항상 주야로 기도하는 가정이었다. 하나님과 늘 영적으로 교제하는 가정이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행 10:4b) 한 두 번 기도하고 구제한 것이 아니라 그의 가정의 선행(기도와 구제)이 쌓이고 쌓여서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하나님께서 기억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고넬료의 가정은 열심히 전도하는 가정이었다.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놓고 기다리더니."(24)
 
고넬료는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의 복음을 혼자 듣기 원치 않았다. 여러 사람이 같이 듣기를 원했다. 우리에게도 이런 열심이 있어야 된다. 아직도 하나님의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교회로 열심히 인도하시는 가정이 되시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고넬료의 가정처럼 우리의 가정이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 사랑에 힘쓰며, 기도가 끊어지지 않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왕현성 목사/구의교회


토-살고죽고 죽고살고  
본문 : 마 16:24~25 
찬송가 : 436장
 
인생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슈퍼스타 k5'에 도전한 한 사람의 고백이다. 아내가 20년 전 질병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어 남편이 너무 힘들어 하니, 아내가 "당신은 애들하고 잘 사는 준비를 하고 나는 잘 죽는 준비를 합시다"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이후로 잘 사는 준비, 잘 죽는 준비를 했다고 한다.
 
인생의 아름다움은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이다.
 
축구 경기에서 개인 플레이를 하면 승리하기 어렵지만 팀 플레이를 하면 승리하기 쉽다. 내가 골을 넣을 수 있어도 더 확실한 동료에게 패스하면 승리하게 된다. 선수 개인의 희생을 통해 팀을 살려야 한다.
 
성도는 2번 죽고 3번 살게 된다. 죽어야 산다는 진리이다. 죽으면 어떻게 다시 살 수 있을까?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2번 죽고 3번 사는 것이 성도이다. 출생과 함께 육체적인 생명은 시작된다. 이 육체적 생명이 죽음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경우도 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음으로 거듭나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세례는 내가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한다(영적인 의미).
 
첫째,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죄인 중 괴수임을 고백하던 사도들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진리(의)에 대하여 살아간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주신 사명을 위해 살아가는 생명이다.
 
둘째,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을 입는 것이다.
 
육신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생명이다. 거듭남을 경험한 성도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간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 또 하나는 육체의 생명이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육체적인 죽음 후에 심판의 부활은 두번째 사망에 이르고(영벌), 생명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에 이른다(영생). 현재의 몸이 죽고 영원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이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 아니다. 전혀 다른 영광의 몸으로 다시 부활하는 것이다. 내가 날마다 죽음으로 내 안에 주님의 생명과 능력으로 충만하여 살게 된다.
 
성도는 두 번 죽게 된다. 한 번은 영적인 죽음이다(십자가 경험). 두 번째는 육체의 죽음이다. 죽음으로 영생에 이르게된다. 날마다 내가 죽음으로 주님의 생명과 능력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한다.
 
<오늘의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내가 날마다 죽으므로 내 안에 주님의 생명과 능력이 충만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동진 목사 / 화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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