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8월5~10일

[가정예배]8월5~10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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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7월 22일(월) 17:17

월- 할 수 있을 때
본문: 이사야 55:6~13
찬송가: 523장
 
요즘 동해안은 피서철이다. 서핑 중 파도를 탈 때에도 때를 잘 맞추지 못하면 여지없이 물 속으로 들어가 버리거나 뒤집어져서 콧속이 따끔한 경험을 합니다.

전도서 3장 11절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만물이 때를 따라서 열매를 맺고, 때를 따라서 아름다워진다. 고대 페르시아의 성인 오마는 돌아오지 않는 것 네 가지를 첫째 뱉어버린 말, 둘째 쏜 화살, 셋째 지나간 삶, 넷째, 잃어버린 기회라고 했다. 세상의 모든 일은 그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기회가 있고, 시간적 제한이 있다. 인간의 구원의 문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영생을 얻는 데에도 시간적 제한이 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무소부재하신 분이지만 인간이란 존재가 시간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역사 또한 시간적 관계 속에서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특별한 하나님을 가까이 느낄 때가 있다. 즉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가 있다. 그 때가 언제일까?
 
먼저 연령적으로 특별히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때가 있다. 유년기는 너무 어려서 인생의 깊은 뜻을 깨닫기 어렵다. 중년기는 생을 위해 매우 거칠게 살아가는 시기이고, 장년기는 여러가지 죄의 가시가 많아서 말씀에 뿌리 내리기가 쉽지 않다. 청년 시기는 피가 끓어오르기에 열정이 있고 그 심령이 옥토와 같은 때이다. 바로 이때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때이다.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을 가까이 부를 때가 있다. 그 때는 위기에 직면한 순간이다. 육체적으로 질병, 정신적으로 죄악과 고독에 빠지는 경우, 또한 실패와 좌절, 이별이나 죽음 등에 노출될 때마다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순간에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자신이 약할 때 주님을 더 가까이할 수 있었기에 주님의 능력이 자신에게 주어짐으로 자신이 더 강해졌다는 놀라운 고백을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을 바라보며 영접하는 생활이다. 준비할 수 있을 때 준비해야 하고 믿을 수 있을 때 청년의 열심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믿어야 한다. 그래야 인생의 풍랑이 밀어 닥칠 때 그 믿음의 힘으로 거센 물살을 이겨나갈 수 있다. 성경을 읽을 수 있을 때 열심히 읽고 기도할 수 있을 때 전심을 기울여 기도하시길 바란다. 전도할 수 있는 지금 열심히 전도해야 한다. 우리는 시간의 제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결코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 믿을 수 있는 지금, 여기에서 열심히 믿고 오늘 속에 계신 주님을 가까이 부르며 살자.
 
<오늘의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때를 알게 하는 지혜를 더하여 주셔서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날마다 경험하게 도와주옵소서. 주어진 한 날을 최선을 다해서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대윤 목사 / 양양교회


화-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자
본문: 히브리서 11:5-6
찬송가: 185장
 
에녹은 아담의 7대손으로 예언자로, 본문에는 믿음으로 승리한 영웅으로 나타난다. 그 이름의 뜻도 '헌신'이란 뜻이며, 365세를 살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보내며 살다가 하나님께서 에녹을 데려가시므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으나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란 증거를 받았다.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본문에 보면 그것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분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심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1965년 전후, 한국에 와서 70여회 집회를 인도한 조세광 목사는 에녹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에녹은 하나님보다 앞서지도 아니하고, 뒤 따르지도 아니하고 하나님 등에 업혀 갔다고.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하며, 믿음으로 동행했다. 먼저, 제일 중요한 요소는 믿음이었다. 우리 주님은 '임마누엘 예수'라 하였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으로 그 분의 등에 업혀가는 순종과 복종의 삶을 말씀한다. 자그만치 300년 동안을 동행하므로 하나님께서 데려가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6-7)"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항상 주님 앞에서 회개하는 삶이다. 누가복음 15장 7절에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 보다 다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잃어버린 드라크마 하나, 탕자의 회개와 부모와의 상봉, 이는 최고의 기쁨과 즐거운 연회가 기다리고 있다. 에녹이나 탕자는 희생제물의 성격이 있다.
 
이러한 말씀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깊은 의미는 우리들 자신에게 있어서는 희생적 각오와 불굴의 신앙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말씀이다. 아울러서 끝까지 전도하는 자를 사랑하시며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신다.
 
다니엘 12장 3절은 "많은 사람을 옳은 대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말씀하셨다. 회개는 나 자신 개인의 문제요, 전도는 이웃과의 관계요,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이는 곧 영원한 동행의 기쁨을 누리는 삶이 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우리는 종종 자신의 삶을 무아지경 속에서 방황하는 때가 많습니다. 속히 주님께서 함께하심 속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깨닫고, 회개와 전도와 경건을 통하여 영원한 기쁨을 샘 솟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만규 목사 / 안성교회


수-행복을 누리고 행복을 나누고(5)
본문: 욥 7:11~21
찬송가: 312장
 
욥은 부자였다. 경건한 사람이었고, 좋은 아버지였다. 하나님이 욥을 의인이라고 부르실 만큼 정직한 사람이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1:8)." 그런데 어려움을 당한다. 세상에서 이런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있을까 할 정도로 모진 일들을 당한다. 재산을 잃는다. 자녀들이 목숨을 잃는다. 자신의 몸에 병이 들었다. 이런 일을 당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왜 고난을 당했을까? 왜 이런 사람이 성경에 나오는 것일까?
 
욥은 부르짖는다.
 
"하나님, 저에게 이런 고난이 찾아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몸이 아픕니다(7:3~5). 마음도 아픕니다(3:20~26). 왜 고난이 찾아온 이유를 알려주지 않으십니까?(7:6~8)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고난을 다 당한다. 그래도 하나님은 대답을 안 하신다. 욥이 탄식한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겠습니다(19:26~27)."
 
욥은 어떤 과정을 겪는가?
 
'죽겠다, 죽고 싶다'하면서도 죽지 못한다. 고난의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으면서 욥이 조금씩 변한다. 처음에는 육신의 아픔을 토로하다가, 다음에는 마음의 답답함을 토로하다가, 그 다음에는 영혼의 아픔을 아뢴다. 고통을 견디고 참으면서 욥은 점점 성숙해 간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욥 19:25~27)." 이렇게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께서 때가 되었을 때 욥을 갑절로 회복시키신다.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욥42:12)"
 
욥이 성경에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욥이 당한 고난의 이유는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고난의 과정을 '참고 견딘' 욥은 자기와 똑같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행복 표지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욥도 견뎠다. 그러니 나도 견딜 수 있다. 욥을 보고 고난을 참고 견딘 나를 보고, 위로 받고 소망 얻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욥처럼 나도 행복 표지판이고 행복 전도사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욥이 성경에 나오는 이유이다.
 
<오늘의 기도>
오늘도 욥을 생각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나에게 오는 고난은 고난이 아니라 더 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남은 생애,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으로 행복하게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종균 목사 / 성답교회


목-자유를 주는 율법
본문: 야고보서 1장 19-27절
찬송가: 285장
 
완전한 율법은 곧 자유를 준다. 자꾸만 곱씹게 되는 말씀이다. 율법이란 고정불변, 고리타분한 어떤 틀인데 그것이 자유를 준다니! 예전 같았으면 무슨 소리냐고 반발이 앞섰을텐데 오늘은 말씀 앞에서 가만히 무릎 꿇게 된다. 완전한 율법은 자유를 준다. 발칙한 일탈이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고 완전한 율법이 자유를 준다. 그렇다. 완전한 율법이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별 게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 네가 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해주라는 것. 살인하지 말라는 것. 간음하지 말라는 것.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 이런 것들이다. 이 말씀 지키고 살아가면 자유를 얻는단다. 우리들 모두 그토록 목마르게 그리워하는 자유를 말이다. 과연 그런가?
 
어려서부터 율법을 되도록 철저히 지키면서 살려고 했던 필자에게 율법은 전혀 자유와 동의어가 아니었다. 주일을 지키려고 십일조를 내려고 또 다른 사람을 먼저 사랑하고 먼저 주는 사람이 되려고 발버둥칠수록 율법은 필자를 얽매고 억누르는 것이 되어 갔다. 보고 싶은 만화영화를 뒤로 하고 교회로 향하던 어린이에게 율법이란 무엇이었겠는가. 그래서 자유는 율법이 아니라 만화영화와 그 궤를 같이 했다.
 
지금은 다르다. 완전한 율법은 자유를 준다는 말씀이 가슴으로 믿어진다. 완전한 율법, 머리로 이해되고 가슴으로 동의되고 몸으로 드러나는 율법은 진정한 자유로 우리를 데려다 준다. 가슴으로 동의된 율법은 의무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기꺼이 따르고 싶은 무엇이 된다.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율법처럼 우리를 곧장 자유로 데려다주는 빠른 길이 없다.
 
참된 사랑은 아주 자연스럽고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그에게는 전혀 바라는 것이 없다면 그만한 자유가 또 어디 있겠는가. 사람은 반드시 사랑하는 만큼 자유로워진다.
 
그런데 참 그 사랑이라는 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래서 율법은 이 법을 따르는 것이 진리와 자유의 길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깊이 동의한 사람들에게 마침내 행함에 이르도록 하는 안내자가 되는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사랑해보지 않으면 어떻게 사랑이 자유와 연결되는지 모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완전한 율법은 자유를 준다. 오늘 이 말씀이 나에게 구원이 된다. 진리가, 완전한 율법이 나를 이 죄의 몸에서 자유롭게 하시는 것을 기쁘게 찬양하자.
 
<오늘의 기도>
주님, 온 몸으로 당신의 말씀을 행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법을 지키며 당신의 집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안지성 목사/새터교회


금-서로 받으라
본문: 로마서 15:1~7
찬송가: 455장
 
이 시대는 모두가 높아지려고 하고, 그러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러나 본문은 서로 연약한 자를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들이 연약한 자를 어떻게 담당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오늘 본문은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첫째, 이웃의 약점을 담당하고 기쁘게 하라고 말씀한다. 1절에서 자기만의 기쁨을 위해 살지 말라고 한다. 그럼 누구를 기쁘게 하라고 하는가? 남을 기쁘게 하라고 말씀한다. 주님은 자기의 기쁨을 위해서 살지 않으셨다. 바로 우리의 기쁨을 위해 사셨다. 그런데 남을 기쁘게 하는 것도 조건이 있다.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워야 한다. 세상적인 방법이 아닌, 주님의 방법으로 연약한 자를 기쁘게 해야 한다.
 
둘째, 서로 뜻을 맞추라고 말씀한다. '뜻을 같게 하여'라는 말은 '마음을 일치하여' 즉 '뜻을 맞추어'라는 의미이다. 주님의 마음으로 믿음이 약한 사람들과 뜻을 같이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셋째, 서로 받으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으로서의 인격을 그대로 존중해 주시며 우리의 온갖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다.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까지 던져 주셨음은 우리를 자신의 생명만큼 소중한 대상으로 인정해 주신 셈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심은 우리가 대단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우리를 조건 없이 하나님의 자녀로 용납하셔서 받아들이셨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 보면 서로 받으라는 말은 받을만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받은 것같이 서로 받으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믿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받아들여서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신뢰하라는 것이다.
 
로마서 5장 8절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사랑할 값어치가 전혀 없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만왕의 왕이요, 만군의 주가 되신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셨다. 그러한 예수님께서 우리를 받은 것같이 우리도 서로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다. 나를 미워하고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믿고 받으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예수님이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함에도 우리를 먼저 사랑하고 받아 주신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받아주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엄대용 목사 / 새능교회


토-회복시키는 순서
본문 : 열왕기상 19:1-8
찬송가 : 419장
 
갈멜산에서 큰 승리를 거둔 대 선지자 엘리야가 도망자가 되어 남쪽 국경까지 달아났다. 갈멜산 제단에 불을 내리게 했던 선지자가 자신이 처한 형편을 보고 지금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도 자신의 형편을 보고 도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을 보지 않고 형편만 보면 두렵고 도망칠 수밖에 없다.
 
결국 남 왕국으로 도망하던 엘리야는 함께 간 사환들을 분리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신의 절망을 방해할 것 같기 때문이다. 절망에 빠진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자기 주변에 사람이 없도록 한다는 것이다.
 
혼자 광야 길을 걷던 엘리야는 한 로뎀나무 아래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라고 한다. '넉넉하오니'라는 말은 '이제는 다 끝났다'는 뜻이다. 4절을 보면 엘리야는 거기서 하나님에게 죽기 원한다고 한다. 그리고 5절을 보면 그가 잠들었다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게 잠들었던 엘리야는 누가 자신을 어루만지는 것을 느끼고 눈을 뜬다. 그리고 "일어나서 먹으라"는 아주 부드러운 음성을 듣는다. 죽여 달라는 엘리야의 말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일어나서 먹으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어떤 설명이나 설득 없이 그저 어루만지면서 음식을 먹으라고 하신다.
 
엘리야가 눈을 떠서 보니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이 있었다. 죽고자 몸부림치다가 잠이든 사람을 회복시키는 방법은 먼저 어루만지고, 다음은 깨우고, 마지막으로 먹이는 것이다. 깨워서 먹이는 것이 아니라, 어루만짐이 먼저여야 한다.
 
죽으려는 사람을 깨우는 방법은 흔들어 깨우는 것이 아니라 어루만지는 것이다. 사람을 크게 흔들어서 깨운다고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작은 어루만짐이 죽음의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울 수 있다.
 
6절을 보면 엘리야는 그 음식을 먹고 다시 누웠다고 했다. 이는 '먹으면 무슨 대수가 있겠는가?'하는 자포자기의 태도이기도 하고, 정말 먹을 힘도 없었을 수 있다. 그러자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고 한다. 먹고 다시 누워버리는 인간을 또다시 어루만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어루만지면서 일어나 먹으라고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회복시키는 순서이다. 우리도 쓰러진 사람을 회복시키려면 다시 어루만지고 먹으라고 해야 한다. 8절을 보면 회복된 엘리야가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쓰러진 사람을 회복시켜놓으면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지치고 쓰러진 나를 어루만져주시고 먹여 주셔서 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명동 목사 / 의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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