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7월29일~8월3일

[가정예배]7월29일~8월3일

[ 가정예배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3년 07월 22일(월) 17:08

월-길과 걸음
본문: 히브리서 11:8-10
찬송가: 430장
 
모르는 길을 가는 것은 긴장되고 두렵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긴장되고 두려운 것은 내 걸음을 모를 때이다. 많은 사람들은 길만 보는 경향이 있다. 아는 길인지, 그 길이 안전한지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길을 가는 내 걸음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는 어디 가고 있는지 보다는 가는 발걸음이 어떠한지 묻고 싶다.
 
아브라함은 가야 할 길은 몰랐지만, 가는 걸음은 알았던 사람이었다. 본문 8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고 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안전이 보장된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날 것을 명령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세상적인 기반과 입장에서 떠나는 훈련을 시킴으로써, 훗날 모리아산행 명령을 가능케 하셨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기 위해서는 걸음 훈련을 받아야했다. 그렇게 훈련을 받았기에 100세에 낳은 아들(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당신이 '보여준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아브람은 당시 이교도 가정에 속해 있었고, 70세가 되기까지 큰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당시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한 달에 하나씩 해서 12개의 우상을 섬기고 있었고,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기도 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런 곳에서 떠나라고 한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하셨으면 갈 길을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가는 길을 모르는 아브라함이 의지할 것은 걸음뿐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갈 길을 가르쳐주지는 않으셨지만 자신의 걸음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어떤가? 가는 길은 알지 못하지만 내 걸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있음을 믿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내가 보여준 땅으로 가라'고 했으면 길만 신경 썼으면 됐겠지만 '내가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기 때문에 걸음에 신경을 써야했다. 걸음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하나님께 신경을 쓴다는 뜻이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길을 안다는 이유로 하나님 생각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지명'보다 '걸음'이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당시 아브람의 걸음을 갈대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브람의 친척들도 아브람의 발걸음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때로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 걸음을 이해할 수 없어야 한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걸음이다. 우리의 걸음은 어떤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는 것'이 믿음이다. 어디로 가야할지 장소를 확인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 가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가야할 길보다는 가는 걸음을 살피는 자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명동 목사/의선교회 


화-시험을 견디어냄
본문: 야고보서 1:12-19
찬송가: 410장
 
시험을 견뎌내는 사람은 복이 있단다.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란다.
 
시험이라는 게 뭘까? 시험은 말 그대로 시험이기도 하고 유혹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삶은 여러 가지로 우리를 시험대 위에 세운다. 중요한 관계가 끊어지거나,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했을 때,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거나 누군가 죽었을 때가 그렇다. 삶이 시험이 된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닥치는 거지? 내가 뭘 잘못한 거지? 하나님은 도대체 뭘 하고 계시는 거지? 절망적인 상황에서 절망적으로 묻게 된다. 그리고 고개를 젓게 된다. 만약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이럴 수는 없는 거라고.
 
살아가면서 이런 시험을 거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주위에 아무리 행복해보이는 사람이라도 아마 이런 시험의 시간을 한번쯤은 거쳤을 것이다.
 
말씀은 다시 우리를 새로운 관점으로 데리고 간다. 시험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건 다만 우리의 욕심이 우리를 이끌고 간 결과라는 것이다. 무슨 말씀일까? 결국 내가 욕심을 내서, 잘못해서 어려운 일이 내게 왔다는 이야기를 하고픈 걸까? 내 죄 때문이라는 걸까?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이 말씀은 우리가 삶에서 당하는 어려움의 원인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어려움의 원인이 아니라 시험을 당하는 것의 원인에 관한 말씀이다. 어려움이 현실의 문제라면 시험은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문제이다. 사업이 망했다고 누구나 다 시험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병에 걸렸다고 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다고 친구들이 떠나갔다고 누구나 다 시험을 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적인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나 그 일을 겪으면서 죽겠다고 힘들다고 괴로워하며 시험당하는 것, 그러니까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한 반응은 우리의 일이다. 시험당하는 것은 우리의 욕심이 낳은 결과이다.
 
현실은 종종 쓰디 쓴 시련과 고통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하나님이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커다란 선택권을 주셨다. 시험을 견디어내어 참된 사람이 되어 살 것인가, 시험당하여 욕심에 끌려다니며 결국 죽음에 이를 것인가. 그 선택을 우리에게 맡기셨다. 
 
믿기지 않는다면 잠시 주위를 둘러보라. 나보다 훨씬 어려운 여건에서도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다. 그들은 밝고 빛나는 얼굴로 시험을 통과하고 있다. 누군가 그럴 수 있다면 나도 그럴 수 있다. 시험을 견디어내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는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 어려운 일을 겪을 때 욕심에 이끌려 시험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저희를 구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안지성 목사 / 새터교회


수-무엇을 보는가?
본문: 출애굽기 14:10~14
찬송가: 546장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오랜 세월 종살이하다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떠나오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바람이 나서 보따리를 싸들고 애굽을 떠났다. 애굽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의 특별 병거 600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를 몰고 바로와 장관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불평하고 당황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명한다. 모세의 말씀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살고 애굽 군대는 다 멸망하였다. 고난과 역경이 많은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도들은 반드시 승리한다. 이러한 승리를 얻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것을 깨달아야 한다.
 
첫째, 우리 삶 속에 장애물이 있다.
 
본문 10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시무시한 바로의 군대를 보고 심히 두려워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퇴양난의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너무나 큰 장애물이다. 쉽게 넘을 수 없는 죽음의 장애물이었다. 이스라엘의 힘과 능력으로는 바로의 군대를 무찌를 수도 없고 홍해를 건널 배나 시간도 없었다. 누구에게나 거대한 장애물이 있다. 그러나 낙심하거나 포기하면 지는 것이다. 정신차리고 기도하면 언제나 길은 있고, 보이고, 열린다.
 
둘째, 불평은 죽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불신과 원망과 불평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 백성이 자신을 '열 번이나 시험했다'고 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신 분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세를 원망함으로 자신들의 믿음이 얼마나 뿌리 없는 것인지를 드러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이나 은혜와는 상관없이 일시적인 편리나 안락을 위하여 노예근성에 젖은 말을 서슴치 않았다. 이는 사탄의 예속 하에 있던 옛 성도의 모습과 같다. 불평은 저주이고, 죽음이고, 지옥이다.
 
셋째,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신다.
 
모세는 두려워 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사탄은 사람에게 두려움과 원망을 준다. 비록 상황이 절박하다 하더라도 다급해하거나 결코 좌절치 말고 조용히 그 상황을 맞이하라고 명령한다.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소망하라는 뜻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 한다. 맡길 때 홍해를 가르시는 기적을 행하셨다. 오늘도 이 사랑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오면 반드시 기적을 행하실 줄 믿는다.
 
<오늘의 기도>
구원의 하나님, 오늘도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엄대용 목사 / 새능교회


목-행복을 누리고 행복을 나누고(4)
본문: 마 6:12-15
찬송가: 267장
 
유대인들은 신앙의 정도를 세 가지 잣대로 측정했다. 금식과 기도와 구제다. 이것들을 잘해야 좋은 신앙이고, 잘못하면 어찌하여 그것도 못하냐면서 정죄(定罪)했다. 참 아쉬운 부분이다. 자기만큼 못하는 사람을 보면 불쌍한 마음으로 감싸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신앙이지, 기준도 되지 못하는 내 생각과 판단으로 남을 정죄하는 것이 신앙은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피 흘리셨다.
 
예수님 흘리신 피 위에 세워진 것이 교회이다. 믿음의 반석 위에 세운 것이 교회이다. 예수님 용서의 피 위에 세워진 교회는 당연히 용서가 있어야 한다. 용서하지 못하면 교회가 깨진다. 교회가 깨지면 은혜를 담을 수 없다. 교회에서 일을 잘 하려고 열심낸다고 하는데, 그 열심 때문에 정작 본질된 용서를 못한다면 그 신앙생활이 행복할까?
 
예수님이 '용서하라'하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예수님도 자기를 죽인 사람들을 용서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우리도 서로 용서하라 하신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3)."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말은 쉽지만, 실행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하라고 하신다. 용서를 해야 우리 심령이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용서는 '그럴 수도 있지'의 마음이다.
 
사람을 정죄할 수 있을 만큼 온전한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교회에서는 큰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는 '그럴 수도 있지'의 마음이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위하여 아들을 보내시면서 용서해 주신 사건이 기독교의 가장 큰 은혜(구원)인 것처럼, 우리가 서로 이해하고 용서로 감싸 주는 마음이 우리를 행복한 신앙으로 이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1~32)."
 
<오늘의 기도>
오늘 만나는 사람들을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으로 대하게 하시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이런 마음에 주님이 주시는 행복으로 넘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종균 목사 / 성답교회


금-하늘길을 가는 사람
본문: 고전 10:31~33  
찬송가: 214장
 
땅 위에 산다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니다. 땅에다 삶의 뿌리를 두고 있을지언정 영적으로 하늘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이 바로 그들의 삶의 원리를 밝혀 준다.
 
바울이 문제가 많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불타는 가슴을 가지고 권면하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의 삶의 원리를 찾고 우리가 비록 몸이 땅에 거주하여도 영은 하늘의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먼저 하늘길을 가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삼으라는 말씀이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행동을 통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자식의 잘못은 부모의 허물이 되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잘못하게 되면 항상 하나님께 욕이 돌아간다.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를 포함한 모든 태양계의 행성들은 항상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가듯이 우리들도 그렇게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다음으로는 하늘길을 가는 사람은 누구에게든지 거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게나 거치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한다. 거치는 것은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게 되는 것이다. 의도한 것이든지 우리가 미처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지 우리의 모든 삶의 모습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짓게 하는 원인을 피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비그리스도인들에게나 그리스도인들에게나 행동 하나 말 하나에 있어서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넘어져서 하나님을 멀리 하게 되지 않는다. 또 다른 하나는 하늘길을 가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나로 인하여 구원을 얻게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여 구원으로 나오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든 일에서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해야 한다. 나의 기쁨을 구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헌신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의 자리로 올 수 있는 권세를 얻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든지 나의 유익만을 생각하며 행동해선 안된다.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나의 이익을 포기하여야 할 때가 있다. 그 때 포기할 줄 아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모든 성도들이 이런 삶의 원리들을 지켜 나간다면 비록 땅의 길을 걸어가도 하늘길을 가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이다.
 
<오늘의 기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누구에게나 거침돌이 아닌 디딤돌로, 나의 유익이 아닌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대윤 목사 / 양양교회


토-염려하지 말고 기도로
본문: 빌 4:6-7
찬송가: 365장
 
하나님은 항상 자비로우시며 긍정적이시나, 인간들은 부정적인 생각이나 걱정, 근심으로 마치 염려로 가득한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이는 백해무익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실 뿐 아니라 우리들에게는 지극히 해로운 것들이다. 
 
사업가인 아서 랭크 역시 고민과 걱정거리와 미래에 대한 불안과 초조가 늘 엄습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한 주 중 수요일 하루만 걱정하는 날로 정하고 수요상자를 만들어 거기에 여러가지 걱정거리들을 모두 적어 넣었다. 그렇게 하여 매주 수요일마다 꺼내 보았는데 결론은 모두 별것이 아니어서 결국 염려상자를 버리게 되었다.
 
실제로 심리학자들이 조사한 내용을 보면 우리가 염려하는 것 중 45%는 이미 지나간 과거의 문제 이며, 또 45%는 앞으로 일어나지도 않을 미래의 일이고, 다만 10%만 현실적인 일인데 이것조차도 잠 못 이룰 정도의 것이 아니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 염려는 마치 톱밥에다 톱질을 하는 것과 같다. 미래에 대한 염려는 더 걱정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미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삶 속에서 불평과 불신의 삶으로 40년 동안 광야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마땅히 주님 뜻대로 하는 근심과 그리스도 안에서만 염려해야만 한다. 고린도후서 7장 10절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정의해 주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흘려 기도하실 때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맘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주님의 뜻을 먼저 기도하셨다. 주님은 모든 일을 행하실 때 항상 기도로 이루셨다.
 
다니엘은 사자굴 앞에서도 창문을 열어놓고 하루 세 번씩 기도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위기 속에서 오히려 금식기도를 함으로 민족을 살리는 역사를 이루지 않았는가! 물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시련과 역경과 고통은 필수과목으로 생각해야 한다.
 
하루는 마귀대장이 '인간을 어떻게 공격할 것이냐'는 주제로 강의를 했다. 마귀대장은 낡은 도끼 하나를 보여주면서 "이것이 최대의 무기니라"고 말했다. "이 도끼를 가지고 인간의 마음 속 희망줄을 끊어버리면 그것은 항상 나의 승리가 된다." 오직 구원의 희망은 주님께로부터 나옴을 결코 잊어서는 않된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하고 천명(하나님 뜻)을 기다리자.

<오늘의 기도>
모든 염려는 다 주님께 맡기고, 오직 믿음으로 기도하며, 주님 말씀 안에서 선지자들처럼 승리하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만규 목사 / 안성교회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