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7월22~27일

[가정예배]7월22~27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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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7월 15일(월) 15:28

월-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본문: 고린도후서 4:16~18
찬송가: 545장
 
비행기의 운항을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자동차의 운행은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계기비행의 속도는 세 가지가 있다. 그것은 첫째 계기속도, 둘째 대기속도, 셋째 대지속도로서 이 세 가지 속도는 예수님은 '길과 진리요 생명'이라 할 것이요, 항로(고도, 속도, 방위각)는 믿음, 소망, 사랑으로 대조할 수 있으며, 목적지는 곧 천국의 종착역으로 비유된다. 물론 이착륙시에는 시각비행(눈으로 보는)으로 조종을 해야 하지만 철저히 각 비행장의 최저접근고도라든가 속도, 콘트롤 지시 등 각종 규정은 철저하게 지켜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활주로를 이탈하여 큰 사고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비행장 규정과 제원은 일정 기간을 두고 책자로 발간된다. 따라서 우리들의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켜야만 함을 대조시켜 준다.
 
오늘 본문을 통해 볼 때, 겉 사람과 속 사람의 대조를 통해 신앙생활을 위한 영원불멸의 주옥들이 나열되고 있다. '육과 영의 대조', '겉 사람과 속 사람' 이는 '옛 사람과 새 사람'으로 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고, 믿음으로 거듭난 새 사람으로서 날마다 새롭고, 갱신되는 것을 말한다.
 
크리소스톰은 그러면 어떻게 날마다 갱신되느냐는 질문에 '믿음으로, 소망으로, 열심으로'라 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라고 하였다. 정 대조적인 두 사실은 '잠시와 영원', '환난과 영광', '경(輕)한 것과 중(重)한 것'으로 현재 주를 위한 고난이 크면 클수록 미래의 영광은 더할 것이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떠남으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물질의 정욕을 추구하다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열왕기하 6장에 보면, 요단성이 완전히 포위가 된 엘리사에게 한 사환이 밖에 나갔다가 겁에 질린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엘리사는 주께 기도했다. "여호와여 원컨대 저희 눈을 열어 보게하소서." 그때 사환의 눈이 떠져 여호와의 무수한 불말과 불수레를 보게 되었다.
 
키에르 케고르는 이렇게 기도했다. "무익한 사물에 대해서는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하옵시고, 당신의 온갖 진리에 관해서는 우리의 눈을 활짝 뜨게 하옵소서." 미래는 신령한 눈을 가져야한다. 신령한 눈은 하나님이 열어주는 눈이다.
 
보이는 것은 현세적인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미래의 것이다.
 
<오늘의 기도>
오로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저희들의 믿음의 신령한 눈을 소유하여 영원한 미래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만규 목사 / 무주 안성교회


화-행복을 누리고 행복을 나누고(3)
본문: 마 13:3~9
찬송가: 455
 
큰 나무가 있다. 큰 나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좋은 씨가 뿌려져 잘 자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라는 동안 외부로부터 짓밟힘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잘 자랄 수 있었다. 자라는 나무에 상처가 생기면 성장이 멈춘다. 사람도 똑같다.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은 몸은 커도 속은 자라지 못한다(성인 아이). 이러면 본인도 불편하고 주위에 어려움을 준다. 성경은 이런 마음 밭에 대해 말씀한다.
 
길가 같은 마음 밭이 있다.
 
사람들이 많이 밟아 딱딱해진 곳이 길가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몸에 상처가 생기면 그 부위가 딱딱해진다.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으면 그 심령이 딱딱해진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기 쉽다. 심령이 딱딱해지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면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좋은 사람이 와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런 사람이 길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돌밭 같은 마음 밭이 있다.
 
흙이 돌을 살짝 덮었다. 그래서 속에 있는 돌이 안 보인다. 이런 마음 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좋은 땅처럼 보인다. 그런데 자꾸 만나면 속에 숨어 있던 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교만이라는 돌멩이, 원망과 미움이라는 바위. 마음 밭에 이런 것들이 많으면 아무리 좋은 씨를 뿌리고 복음의 말씀을 들어도 뿌리내리기 어렵다. 성장도 어렵다. 돌밭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이렇다.
 
가시떨기 밭에 같은 마음도 있다(7절)
 
여기에는 흙이 제법 있습니다. 그래서 자랄 수 있는 여건은 됩니다. 뿌리는 잠깐 내렸지만 더 이상 자라지 못한다.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성장을 막기 때문이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22절)". 이런 곳이니 열매는 당연히 없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 열매가 없으니 영혼이 궁핍해진다. 가시 떨기밭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이렇다.
 
그러면 어떤 마음이 되어야 할까?
 
우리 마음에 있는 상처나 염려나 유혹 대신 예수님의 마음을 채우면 된다. 그릇의 가치는 그릇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우리 마음 밭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에 따라서 우리 마음 밭의 가치가 결정이 된다. 내 마음에 예수님이 채워지면 우리를 치유해 주신다. 그래야 우리 마음이 좋은 밭, 옥토가 된다. 우리 마음이 좋은 밭이 되어야 열매가 생긴다. 열매가 있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오늘의 기도>
오늘도 제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채우시고, 열매맺을 수 있는 좋은 밭이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예수님 주시는 행복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종균 목사 / 성답교회


수-하나님과의 대화
본문: 출 33:7~11
찬송가: 361장
 
많은 이들이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대답이 가지는 분명한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것 같다.
 
호흡이나 대화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들숨과 날숨이 있으며,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기도의 쌍방적인 측면을 내포하고 있는데, 우리는 정작 기도할 때에는 독백으로 끝내곤 한다.
 
하나님과 모세의 관계는 매우 인상적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대화하기를 친구들이 서로 대화하듯이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여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기도인 것이다. 그런데 대화라고 하는 것은 처음에 언급했듯 쌍방적이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대화, 즉 기도에 있어서 먼저 되어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 우리의 문제와 필요를 호소하며, 우리의 처지와 형편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다 토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이나 토해내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그 분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대화를 우리의 일방적인 독백으로 끝내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시간에 하나님께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기도 시간에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기도 시간에 어떻게 말씀하시며 우리는 그 말씀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사무엘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육성으로 말씀하신다면 대화가 쉽겠지만 보다 일반적인 방법은 기도하는 가운데, 말씀을 떠오르게 하신다거나, 우리의 내적인 음성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것은 영적인 일이기에 그것을 분별하는 기준과 방법을 분명하게 알고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기도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따로 내어야 한다.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시기를 기대하면서 "주여, 말씀하소서. 제가 듣겠나이다"하는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응답을 분별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훈련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양이 목자의 음성을 구별하듯이 반복하는 가운데 분명히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나님과의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시켜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오늘의 기도>
우리에게 온전하게 기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분별하게 하옵소서. 영의 귀를 열어 주시옵소서. 삶에서 참된 하나님의 음성으로 오늘 하루가 감동과 기쁨이 가득한 날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대윤 목사 / 양양교회


목-믿음으로 바라보라
본문: 로마서 4:18~22
찬송가: 545장
 
본문의 주인공인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18) 한마디로, 아브라함은 불가능한 것을 믿었다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
 
사람들 간에도 제일 귀중한 일은 믿어주는 것이다. 이 시대는 서로 간에 불신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시대이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시대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믿어진다. 엉뚱한 소리를 해도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소리라면 믿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 식어지면 이제는 믿어지지 않는다.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믿음이 나약하면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할 때에 나 자신을 보게 된다. 내 나약함을 먼저 보게 된다. 본문의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내 나이 100세요 아내는 90세로, 인간적으로는 아이를 출산할 가능성이 없다. 그렇다면 이제 생산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보면 죽은 자와 같은 것이다.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자신의 나약함이 여기에 있다. 인간 상식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도저히 믿어지지 않고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믿었다. 여기에 아브라함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된다 안된다 얘기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것으로 끝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상황을 19절에서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19절)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아브라함의 위대함이 있다. 자기의 허물을 알고도, 나약함을 알고도 믿었다. 나의 나약함이나, 나의 지혜나, 나의 판단능력, 나의 인간적 방법 이 모든 것들을 다 포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받아들이고, 나머지 모든 것은 다 포기해버리는 것이 믿음이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다.
 
우리가 바랄 수 없는 것을 끝까지 바라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고 있다. 환경이나 조건이 문제가 아니다. '최악의 상황'이 올지라도 절대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대가 더 커진다. 
 
오늘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보물은 하나님을 바라고 기대하는 믿음이다. 하나님을 믿고 바라는 자는 모든 것이 따라온다. 먼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그러므로 날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가지고 나가길 바란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진정한 축복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내 자신과 세상적인 것에 관심을 갖던 저희들에게 믿음의 눈을 열어주셔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담대히 나가며 승리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엄대용 목사 / 새능교회


금-생략된 이야기들
본문: 창세기 22:1-14
찬송가: 312장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낳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드리라고 하신 명령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 명령을 아브라함이 침착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하나님께 많은 질문을 했을법한데 아브라함은 침묵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생략했다. 2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다. 3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라고 되어 있다. 우리 같으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운 것을 요구해도 많은 질문을 했을 것이다.
 
4절을 보면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고 하였다. 실천하기 어려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길을 떠난 지 삼일이 되면 마음이 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침묵한다. 
 
5절에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고 한다.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함에 있어서 걸림돌이 될지도 모를 것들을 차단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어떤 것들을 차단하고 있는가? 
 
7절을 보면 이삭이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묻는다. 이 가슴을 찌르는 질문에도 아브라함은 많은 이야기를 생략하고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만 말한다. 이 대답에 대해서 이삭은 자신의 말을 생략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곳에 이르자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는다. 여기서도 있을법한 이삭의 저항이 생략되고 있다. 10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라는 말씀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고 급히 부르셨다. 아브라함의 행동이 얼마나 신속했는지 하나님께서 급하게 부르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에는 신속하지 못하면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행동이 느리다고 생각할 때가 있지 않는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반응보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반응속도를 먼저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때서야 아브라함이 주변을 보니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숫양을 보게 되고 그 양으로 이삭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렸다. 그 사건으로 인해 '여호와 이레'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오늘날 우리 삶의 자리에서 '여호와 이레'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내 이야기가 생략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모든 이야기는 다 듣고, 내 이야기는 많이 생략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명동 목사 / 의선교회


토-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고
본문: 야고보서 1:9-12
찬송가: 288장
 
늘 보던 성경인데 가끔씩 '이런 놀라운 구절이 있었나?'하면서 굉장히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오늘 야고보서의 말씀이 그렇다.
 
새번역에는 "비천한 신도는 자기가 높아지게 된 것을 자랑하십시오. 부자는 자기가 낮아지게 된 것을 자랑하십시오"라고 쓰여 있다. 비천한 자는 높아지고 부자는 낮아질 것이니 처지와 형편이 달라지게 될 것을 미리 자랑하라는 말인가? 뭔가 개운하지 않아 찾아본 개역에는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라고 쓰여 있다. 영어 성경들도 그렇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음을 자랑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 아니고 지금의 상태다.
 
가난한 자가 높음에 있고 부한 자는 낮음에 처해 있으니 각각 지금의 상태를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라는 것이다. 이상한 생각이다. 가난한 사람은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사람은 자기의 낮음을 자랑하라니.
 
백석 시인의 시 한구절이 떠오른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백석, '흰 바람 벽이 있어' 중에서)
 
시인과 말씀이 이구동성으로 말해 준다. 가난함이 높음이라고. 내가 처한 상황이 어렵다면, 비천하다면 그 높음을 자랑하고 기뻐하라고. 부한 사람은 또 그 낮음을 기뻐하고 자랑하라고. 왜냐하면 부자는 풀의 꽃처럼 마르고 시들어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모두 지나가는 것들이다. 한때 피었다가 또 해가 뜨면 시들고 마르게 마련인 것들이다.

야고보가 엿본 하나님의 세계는 지금 가난한 사람들이 오히려 높음을 자랑하고 부요한 사람들이 낮음을 자랑하는 것이 마땅한 세계이다. 이런 눈으로 지금의 나를 보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 어렵고 비천하게만 느껴졌던 상황이 높고 아름다운 비밀이 되고, 풍요로운 현실은 그냥 얼마간 내게 머물다가 지나갈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변한다.
 
하나님 믿는 일은 새로운 눈을 뜨는 일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는 일이다. 어려운 일이 많은가? 상황이 비참하게 여겨지는가? 그렇다면 그 높음을 기뻐하고 자랑할 일이다. 하는 일마다 잘 되고 있는가? 뭐든지 풍요로운가?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한때 주어진 선물임을 알고 오히려 겸손해져야 한다. 말씀 덕분에 내가 처한 상황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인생에 그만한 보물이 또 어디에 있을까.
 
<오늘의 기도>
오늘 하루 짧은 순간이라도 내가 처한 상황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주세요. 그래서 시들고 사라져갈 것들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안지성 목사 / 새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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