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5월13~18일

[가정예배]5월13~18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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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5월 08일(수) 15:49

월-삭개오의 열정
본문:누가복음 19:1 - 10
찬송가:315장
 
며칠 전 지하철을 타게 되어 마주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니 10명중 다섯 명은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있고 나머지 5명은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모두의 손에는 요즘의 대세인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었다. 지금 사람들의 혼을 빼고 있는 것은 단연 이 작은 괴물이라 할 수 있다. 스마트폰에 대한 열정. 오늘 다른 열정을 보여준 한 사람을 성경에서 찾아 보고 싶다.
 
성경에는 열정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느닷없이 큰 복을 받게 된 사람이 삭개오다. 수 천년의 고도 여리고에 삭개오라 이름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의 직업은 사람들이 천시하는 세리장으로 죄인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을 만 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지 보기를 원하였다. 아쉽게도 그는 키가 매우 작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주변에 큰 나무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세리장이라면 지위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창피를 무릅쓰고 예수님을 보고자하는 열정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예레미야 29장 13절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 했는데 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삭개오가 온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것을 아시고 그를 부르신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주님이 허락하신 부름이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가 얼마나 당황스럽고 놀랐을까? 한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를 본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예수란 자가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더니 죄인의 집에 들어간다고. 사람들이 크게 "삭개오는 죄인이예요"라고 말해도 삭개오는 기쁘기만 하였다. "주님  보세요, 저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어요! 만일 제가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어요." 그는 망설임없이 당장에 그런 결단을 한다. 그 안에 주의 성령이 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들이니 예수님도 당장에 그를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어떤 절차도 필요 없으며 시간이 많이 걸릴 것도 없다. 주의 말씀이면 그대로 된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하늘 아버지 앞에 지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순간에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의 역사이며 십자가의 능력이다. 이러한 위대한 역사를 하나님이 사랑으로 이루신다.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3)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성령을 보내 주소서. 맑은 물을 부어 주소서. 사랑의 영을 부어 주소서. 더럽고 추한 이 죄인들을 깨끗하게 씻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태완 목사 / 옥합교회


화-젊은 사람.
본문: 전 11:9-12:2
찬송가: 428장
 
'젊다'라는 단어를 사전을 찾아보면 '나이가 한창 때이다. 혈기가 왕성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곧 시간과 관련이 있다. 젊을 때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젊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일이다. 누구나 양귀비 뺨치던 젊었던 시절이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옛날 사진을 보며 우수에 젖었다. '나도 이런 시절이 있었는데…" 사진들을 보고 알았다. 지금을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곧 조금만 더 있으면 지금의 모습을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감사하고 기뻐하면 바로 오늘이 젊은 날이 된다. 감사하고 기뻐하면 어제뿐 아니라, 바로 오늘도 젊은 날이 된다.
 
젊음이라는 것이 시간이 있고 때가 있다는 것은 영원히 젊음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환갑을 매우 큰 잔치로 치렀다. 60살까지 사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제 어디까지나 옛날 일이 되어 버렸다. 요즘은 '인생은 60부터다'라는 말과 더불어 '100세 시대'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아무리 60을 젊다고 여겨도 그렇게 우겨보아도 젊음은 영원하지 않다.
 
그러므로 영원하지 않기에, 단 한번밖에 안 되는 젊은 날들이기에, 우린 그 시간, 그 순간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시간들이다.
 
본문 9절을 보라. 젊었을 때에 즐거워하며, 기뻐하며 살라고 하신다.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눈이 보이는 대로 행하라고 하신다. 맘껏 발산하고 맘껏 힘내서 살라. 은혜 안에서 은혜를 누리며 살아라. 그것이 젊음이다. 그 때가 젊음이다.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기쁘게 살라. 젊게 살라.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해보라. 하지만 하나는 꼭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에는 분명 계산하는 날이 있다. 그러므로 기쁨을 위해 근심을 떠나보내라. 더불어 마지막 날을 위해 악을 떠나보내라. 그리고 기억하라. 우리의 창조주를. 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는지, 왜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는지.
 
그것을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 그가 젊은이다. 나이가 젊다고 젊은이가 아니다. 정신이 젊어야 하고, 마음이 젊어야 하고, 영혼이 젊어야 한다. 어차피 우리의 육신은 새 옷과 새 신이 시나브로 낡아가듯 오히려 낡아가는 것은 더 자연스럽다. 그러나 육신이 낡아간다고 하여 영혼도 그런가?
 
푸르른 오월에 더욱 젊게 살라. 주님 앞에서 늘 젊은 사람들로 살아가자.
 
<오늘의 기도>
시간과 시절의 주인이신 하나님, 저희에게 어제와 더불어 오늘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날마다 젊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은총을 허락하소서. 오늘의 열정과 미래의 비전을 먹고 사는 젊은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안성국 목사 / 평안교회


수-가장 가치 있는 노동
본문: 눅 22:39-46
찬송가: 363장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일하는 존재로 지으셨다. 그래서 땀 흘리는 사람이 아름다운 것이고, 땀 흘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그런데 신앙생활에도 땀이 필요하다. 즉 신앙생활도 땀의 대가로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다.
 
본문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장면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는 매우 힘들게 기도하셨다는 것이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될 정도로 힘쓰시고 애쓰시며 기도하셨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기도를 거룩한 노동이라고 했다. 그렇다. 기도도 하나의 노동이다. 기도가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큰 특권이지만, 막상 해보면 가장 힘든 노동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도가 힘든 노동일지라도 가장 가치 있는 노동이다. 왜냐하면 기도는 헛수고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하는 일은 땀 흘려도 그 대가를 받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기도는 그 땀의 대가를 정확하게 받는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 대가를 지불해 주시기 때문이다. 거룩한 노동에 대한 대가가 바로 응답이다.
 
그렇다면 기도가 응답이라는 대가를 받는 가장 가치 있는 노동이 되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본문의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통해서 살펴보면 첫째, 기도는 습관화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시는 것이 습관화 되었다. 주님은 습관적으로 체질적으로 항상 기도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예수님의 제자이다. 그렇다면 스승이신 예수님의 본을 따라 기도의 습관을 몸에 지녀야 한다. 기도가 습관화 될 때, 응답이라는 결실을 거두는 가장 가치 있는 노동이 되는 것이다.
 
둘째, 기도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아셨지만, 십자가를 지는 일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마침내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내려 놓으셨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시기까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될 정도로 최선을 다해 기도하셨다는 사실이다. 기도는 내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추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쉽지 않다. 많은 눈물과 땀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기도가 노동이다. 하지만 이 힘든 노동을 가장 가치 있는 일로 여기고 최선을 다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이며, 그 뜻에 나를 맞출 때 하나님의 역사는 내가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기가 막힌 방법으로 나타난다.
 
<오늘의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도 예수님처럼 기도가 가장 가치 있는 노동임을 깨닫고 습관화 된 기도와 최선을 다하는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병철 목사 / 오산교회


목-믿음으로 사는 부부  
본문:롬 16:3-5
찬송가:435장
 
부부란 어쩌다가 만나 필요에 따라 적당히 짝짓고 사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남녀를 이끌어 손잡게 하심으로 맺어진 것이다. 가정은 거룩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부부가 일심동체되어 하나님께 헌신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매우 기쁘게 받으신다. 신약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부로 인정받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삶의 모습은 믿음으로, 사명으로 사는 부부이다.
 
첫째, 믿음의 부부는 서로를 존경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 브리스길라라는 이름은 로마 귀족 가문의 여인들에게서 발견되는 이름이다.
 
로마 귀족 가문의 귀한 처녀, 공부를 많이 한 지성인이며 영적으로도 깊이 있는 신앙인이고 기품있는 브리스길라가 소아시아 본도 출신 시골 청년 아굴라를 만나서 오직 믿음 안에서 신분을 뛰어 넘어 부부가 되었다. 이 부부는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남편은 열등감에 매이지 않고 아내를 귀히 여겨 앞세우고 아내는 남편을 항상 순종하고 배려하며, 최고로 여기며 존경하여 살았다. 신앙 가정의 부부들은 서로를 최고로 귀히 여기고 존경하며 배려하므로 예수의 향기를 풍겨내는 사랑의 부부로 살아가야만 한다.
 
둘째, 믿음의 부부는 어디를 가든지 항상 함께 동행해야 한다.
 
글라우디오 황제의 추방령 때에 유대인 남편인 아굴라만 로마를 떠나도 되었지만 브리스길라는 고생의 길을 함께 동행 하였다. 그들은 지금까지 살던 로마를 떠나서 고린도, 수리아, 겐그레아, 에베소 그리고 다시 로마로 이사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항상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끝까지 함께 동행하였다. 믿음의 부부는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늘 함께 동행하는 길을 택해야 한다. 자식이나, 사업이나, 다른 어떤 이유로도 부부가 떨어져 지내지 않도록 노력하라. 부부 사이가 금이 가고 가정에 위기가 오는 것 보다는 조금 덜 성공하고 온 가족이 행복한 것이 좋다.
 
셋째, 믿음의 부부는 복음의 사명을 위해서 합심하여 수고해야 한다.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나 신앙의 깊이를 더한 이 부부는 복음을 위해 전적인 헌신의 삶을 살았다. 자신의 집을 교회의 예배처로 제공하고 바울사도의 선교를 위하여 물질을 공급할 뿐 아니라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다시 로마로 이사하는 고생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부부가 서로 합심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삶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부로 살게 하는 비결이다.

<오늘의 기도>
주여! 우리 부부가 주님께 헌신하겠나이다. 우리 부부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사용해주소서. 복음전파와 교회를 위하여, 주의 종을 돕기 위하여 헌신하는 부부와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임광영 목사/ 삼덕교회


금-효도와 축복
본문: 에베소서 6:1~3
찬송가: 577장
 
제주시 용담동에 고려장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마을에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들이 살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 일도 못하는 할아버지가 밥만 축내는 것 같아, 아버지는 사사건건 할아버지한테 대들고 못되게 굴었다. 하루는 아들을 불러서, "저 하르방 지게로 져당 어디 강 던져 불라"고 소리쳤다. 아들은 "예, 알았습니다"하고 공손히 물러 나와서는 어머니에게 갔다. 그러고는 "어머님, 메밀가루 서 말만 허영 범벅허여 줍서"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범벅을 만들어 주자, 할아버지와 범벅을 지게에 지고 바닷가로 갔다. 자리를 골라 할아버지를 앉히고 범벅을 드리면서, "이 범벅 먹으멍 조금만 살암십서. 나 다시 오쿠다"하고 할아버지를 안심시킨 다음, 빈 지게를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빈 지게를 지고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가 찡그리면서, "왜 지게는 지고 왔느냐? 가찌 던져 불지 아니 허연"하고 다시 야단쳤다. 아들은 가만히 듣다가 "무사 지겔 데껴 불랜 허염수강? 이 지겐 가만이 놔뒀당 아방도 져가곡 또 후손덜이 나도 져가곡할 건디"하고 대답했다. 아들의 그 말에 아버지는 아차 싶었다. 그리하여 당장 할아버지를 모시고 와서 극진히 공경하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성대하게 초상을 치르고 삼년상도 잘 지냈더니, 하는 일마다 잘 되어서 오래오래 잘 살았다고 한다.
 
창세기 9장 20~27절에 보면 노아는 홍수사건 이후 포도주에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어 자신의 수치를 드러낸 적이 있다. 둘째 아들 함이 이를 보고 형제들에게 공개함으로써 아버지의 권위를 실추시켰다. 나아가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신 하나님께 패역하는 큰 죄를 짓고 말았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허물을 가림으로써 아버지의 명예와 인격이 더 이상 실추되지 않게 했다. 결국 아버지의 실수를 들추어내고 조롱한 불효자 함은 저주를 받았고, 아버지의 허물을 덮음으로써 아버지를 공경한 효자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았다. 오늘 본문은 첫째,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고, 둘째, 부모를 공경하라고 한다.
 
'부모에게'라는 말은 친부모에게만 한정되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모든 권위자들까지도 포함되는 말이다. '공경하라'는 말은 '높인다. 존귀히 여긴다. 존경한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내 부모를 어떻게 보든지 자녀들은 마땅히 자기 부모를 높여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십자가에서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효행을 실천하셨고, 지상에 부모에게 효도하셨다. 효도는 인간본연의 도리이고, 하나님의 명령이고, 우리 삶의 근간이 되는 가치관임을 기억하자.
 
<오늘의 기도>
모든 사람의 어버이 되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를 대신하여 우리에게 하늘처럼 바다처럼 넓은 사랑을 보여주신 부모님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백인 목사 / 성민제일교회


토-거룩함을 위한 호소
본문: 고후 6: 14-7:1
찬송가: 620장

우리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지 않으며, 죄와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세상과의 분리를 두 가지 주된 논점으로 가르친다.
 
첫째, 원리로부터 이끌어낸 논점이다. 반대가 되는 것끼리는 서로 교제할 수가 없다는 근본적인 원리이다. 모세는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말로 권고한다. 고린도 사람들은 결혼, 사회생활, 사업, 다른 방식에 있어서 불신자들과 멍에를 같이 하고 있었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잃어버리고 세상과 똑같이 살아가고 있었다.
 
여기에 나오는 의와 불의, 빛과 어두움, 그리스도와 벨리알(사단의 구약 명칭), 신자와 불신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 등의 상반된 대조는 죄와 분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고립이나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세상의 더러운 것에서 지키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신자와 동행하시기 때문에 신자가 세상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의 문제는 그가 하나님과 가지는 교제에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둘째, 약속으로부터 이끌어낸 논점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순전하게 유지하는 사람을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세속성이란 미묘한 것이어서 그리스도인이 모르는 사이에 점차적으로 다가온다. 타협적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것과, 삶을 정결케 할 유일한 경험인 성령 안에서의 보다 깊은 교제를 잃게 된다.
 
7장 1절에서 바울이 개인적인 거룩함에 대하여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분리를 위한 두 가지의 동기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극진히 사랑함)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에 이 두 가지는 언제나 작용해야만 한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건전한 두려움이 동기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가르치기 위해 징계를 하셔야만 한다. 거룩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소극적인 면으로는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하며, 적극적인 면으로는 거룩함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가 거룩함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두 종류의 죄가 있다. 육신의 추행과 영적인 추행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육신의 죄를 지었으나 그의 형은 심령의 죄를 범하였다. 
 
죄에서는 분리되어 있지만 개인적인 거룩함에서 성장하지 못하며 성령의 열매들을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바리새인들은 죄로부터 분리되어 있었으나, 그들의 삶에는 사랑과 마음으로 나는 순종이 결여되어 있었다. 죄로부터의 분리와 온전한 거룩함으로 나아감이 필요하다.
 
<오늘의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죄로부터 노출되어 있는 삶을 불쌍히 여기셔서 죄로부터 분리되게 하시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온전히 하나님의 거룩함을 입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성준 목사 / 경동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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