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3월25~30일

[가정예배]3월25~30일

[ 가정예배 ] 가정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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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3월 19일(화) 14:43

월-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본문: 마 19:27-30
찬송가: 354장
 
제자훈련 중 한 집사님께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는 주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모태신자인 자신은 왠지 나중될 것 같은 불안감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은 어떤 의도로 이 말씀을 하셨을까? 먼저 된 자는 자만하지 말고 나중 된 자는 낙심치 말라고 주신 말씀이다.
 
성경은 한절 한절로도 은혜가 되지만 앞뒤를 연결해서 읽고 해석할 때 훨씬 더 큰 축복과 감동을 누릴 수 있다. 본문 앞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에게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고 돌아갔다. 그때 주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행위구원과 인보응보사상인 율법주의에 물든 제자가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때 주님께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때 성급한 베드로가 "그렇다면 우리처럼 일찌기 주님을 믿고 따른 사람들의 수고가 어찌 되느냐"고 묻는다. 이에 대해 주님은 "구원은 은혜로 받되 하늘상급은 수고와 충성에 따라 받는다"고 하늘보좌와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이어서 혹시라도 교만하지 않도록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의 말씀을 하셨다. 먼저 된 자라고 자만하지 말고 계속 전진하고 믿음의 진보를 이루라고.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고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가라고. 그리고 혹시 나중 된자라 할지라고 분발하면 먼저 될 것이니 낙심하지 말고 열심을 내고 하늘에서 받을 축복을 사모하며 늦은만큼 더 열심을 내고 충성해야 할 것을 강조하셨다.
 
문제는 믿음의 진보를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은혜를 헛되이 받으며 먼저 된 자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탕자의 비유에서 나오는 맏아들마냥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하기 쉽다. 불평하는 맏아들에게 아버지는 말씀하신다. "너는 나와 함께 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그렇다. 축복을 누리지 못하면 불평하기 십상이다. 본문 바로 뒤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보듯이 이른 아침부터 부름받아 일했으면 "나처럼 부족하기 짝이 없는 사람을 일찌감치 부르시고 훈련하셔서 일꾼으로 사용하시다니 정말 모든 것이 은혜로구나"하면서 감사거리를 찾아야 한다. 늦게라도 부름받고 일하게 되었다면 그 또한 은혜요 축복인 줄 알고 더욱 감사의 조건을 찾아야 한다.
 
가족 중 처음으로 믿는 자가 되었거든 "우리 조상 아무개 덕에 우리 가문이 축복의 가문이 되었노라"고 평가받는 축복을 누리기를 바라며 전진하는 가정이 되기를 기도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먼저 된 자이거든 계속 전진하여 먼저 된 자의 축복을 누리고 유지, 보존, 계승하게 하시고 나중 된 자이거든 분발 전진하여 먼저 되는 축복을 누리는 우리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중식목사 / 산돌교회


화-내가 갈 길을 가야하리니
본문: 눅 13:31-35
찬송가: 449장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나는 내가 갈 길을 가야겠다고 선포하신다. 예수님은 그분이 가야할 길을 분명히 아셨다. 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 있는 예수님의 사명을 인지하셨고 그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갔던 모습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늘 듣던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죽음으로 끝난 실패작이 아니라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는, 모든 사람들의 영적 출애굽으로 이어지는 성공작이었다.  
 
오늘 본문은 '곧 그때에'로 시작하는데 그것은 본문의 앞 단락인 22-30절의 말씀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각 성과 마을로 다니시면서 가르치시고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실 때 있었던 일에 연이어 일어난 일임을 알려준다. 오늘 말씀 전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 숫자에 대해 질문했고, 예수님은 구원의 수에 대해 즉답하지 않고 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지 구원의 대상에 대해 말씀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구원을 받겠다는 말씀과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는 사람이 많겠다고 대답하셨다. 이는 선민의식 속에 사로잡혀 회개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따르지 않았던 선지자들이 구원의 나라 안에 있고, 이방인들이 먼저 구원받겠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지금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니 도망하여 여기를 떠나라고 권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하기를 거부하고, 메시아로서의 갈 길에 대해 당당하게 선포하셨다. 너희는 저 여우(헤롯)에게 가서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고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고 말하라. 그리고 지금은 내가 귀신을 쫓고 병 고치는 사역, 사단의 세력 하에 있는 사람들을 고쳐주고 살려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그들에게 맛보게 하는 일을 하고 종국에 가서는 이 모든 사역을 이루는 날, 부활의 첫 열매가 되는 때가 오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 죽음의 길을 당연한 길로 받아들이셨을까? 34-35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사람들을 무척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모으고 그 품에 품으려고 무던히 애쓰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랑을 거부했고 그들에게 파송된 선지자들을 돌로 치고 죽였다. 돌에 맞고 죽음을 당하면서도 예수님은 자신의 갈 길을 알고 그 길을 걸어가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을 살리신 능력의 길이 된, 십자가의 길을 당당히 걸어가신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내가 갈 길은 어떤 길인지, 지금 그 길을 걷고 있는지 생각하며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자.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셔서 죽음의 문턱에서도 내가 갈 길을 가야겠다고 선포하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의 사명대로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혜숙 목사/전국여교역자연합회 사무총장


수-신앙의 기초 다지기- 기도로 내려놓기
본문 : 빌립보서 4:4-7
찬송가 : 370장
 
SK 브랜드 관리실에서 4,50대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웃음에 관한 라이프 스타일'을 조사한 결과 하루 24시간 중에서 일하는 시간 8시간, 잠자는 시간 6.7시간, 먹고 마시는 시간 2.6시간, 걱정 근심하는 시간 3시간, 웃는 시간 90초였다고 한다. 평균 수명을 70년으로 본다면 일평생 걱정 근심하는 기간은 10년, 웃는 기간은 한 달 밖에 되지 않는다.
 
이 세상은 낙원이 아니라 고해(고난이 많은 바다)와 같은 세상이며 광야와 같은 세상이다. 모든 사람은 필연적으로 생로병사의 과정을 밟으면서 한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근심 걱정이 많은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고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데,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그 대답은 기도이다. 전능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걱정과 염려를 다 내려놓을 때 우리는 항상 기뻐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다.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첫째, 믿음으로 기도하자. 기도의 필수 조건이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해 주심을 믿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의심하는 기도는 응답받기를 기대할 수가 없다(약 1:6-8). 둘째, 감사함으로 기도하자. 마음에 감사와 기쁨과 평안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불신 때문이다. 염려는 신앙 성장을 방해하는 중요한 원인이다. 믿음으로 염려를 떨쳐버리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응답하신다. 셋째,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다. 성공의 반대는 실패가 아니라 포기이다.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일어선다. 한두번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다 해서 낙심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관을 비유로 드시면서 항상 기도하되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눅 18:1-8).
 
기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요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특권이다. 마음 속의 모든 근심과 걱정과 염려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내려놓으면 두 가지의 축복을 누린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응답해 주시는 축복을 누리게 되고, 둘째는 우리의 마음에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
 
말씀과 기도는 신앙인들의 경건생활의 기본이다(딤전 4:5).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 대화로 기도가 없는 사람은 명목상 신앙인에 불과하다.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것은 너무 바쁘거나 너무 평안하기 때문이다. 빌 하이빌스 목사는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라는 책을 썼다. 바쁠수록 더 기도에 힘써야 한다. 기도를 통하여 신앙의 기초를 견고히 다질 수가 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하나님과의 영적 대화인 기도의 줄을 놓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기도를 기뻐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태협목사 / 신곡교회


목-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이들
본문: 마 27:45-56
찬송가: 459장
 
오늘 우리 가정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다. 백성이란 본래 왕이 있음을 전제한다. 즉 우리 집은 사랑으로 가득하신 하나님께서 왕이 되셔서 왕되신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보호하심에 있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백성은 본래 세상의 모든 인류였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 분의 백성으로 살도록 하셨지만 사람들은 그 분의 왕되심을 외면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셔서 그 백성을 삼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백성됨을 거부하고 그 분의 다스리심을 외면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이렇게 된 세상의 외면과 배반의 현장을 구원하시고, 온 인류를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로 되돌리고자 하신 것이었다. 그 길은 죽음을 통해서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순절을 지내면서 우리 마음과 몸과 영혼을 구별하고 이렇게 우리를 위해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며,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분을 따라갔다. 이들이 주님을 따르는 발길에서부터 세상의 역사는 다시 시작되었다.
 
그 제자들 중에는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오던 여인들이 있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까지 주님을 따라온 이들이다. 죽음의 자리까지 따라온 이들이다. 갈릴리는 변방이요 벽지다. 보잘것없고 소외되고 가난한 자리다. 어떤 제자는 주님의 고난의 행선지에서 다 흩어졌고, 어떤 제자는 주님을 팔았으며, 또 어떤 제자는 심문받기 위해 끌려가는 예수님의 등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가는 이도 있었지만, 갈릴리에서부터 주님을 따라온 이 사람들은 십자가의 자리까지, 무덤의 자리까지 주님을 따라왔다. 그들은 영광된 부활에 참여하고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승천의 모습이 찬란한 감람산의 자리까지 간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따름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조용한 그 발길로 주님을 따르고 섬기며 십자가의 길까지 주님과 함께 한 것이다.
 
오늘 이 시대에 희망이 있다면 그리스도께 있다. 교회요 성도에게 희망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주님의 백성된 이들이 정말로 주님을 따름으로써 십자가의 정신과 사랑을 가지고 세상을 밝히고 깨우며 구원과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가정에서 그리스도의 빛이 나오고 세상을 밝힐 리더가 세워지는 복을 구하자.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각 사람이 좋은 리더로서 서기 전 팔로워가 되어야 한다. 좋은 리더는 좋은 팔로워이다. 진정으로 주님의 뜻에 따를 수 있는 사람이 좋은 리더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그 순종을 배우며, 절망이나 포기가 아니라 조용하나 분명하게 십자가의 길까지 주님을 따라 갈 수 있는 우리 가정으로 성장해 가길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은혜로신 하나님, 오늘 이 자리가 갈릴리 같을지라도 이 곳에서부터 주님을 따라 죽음의 길까지도 주님의 뒤를 따라갈 수 있는 우리 가정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창운목사 / 송탄동성교회


금-섬김의 기쁨
본문:눅10:38-42
찬송가: 459장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왜 온전히 섬기지 못하는 지를 지적한다. 우리는 섬기면서도 기뻐하지 못하고, 섬김의 자리에서 불평하기도 한다. 그러한 우리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주님은 섬김의 기쁨을 되찾으라고 말씀하신다.
 
섬김의 기쁨을 되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섬김이 주님의 마음을 읽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 집안을 청소하고 음식을 준비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마르다가 보기에 마리아는 일도 하지 않고 예수님 곁에서 아양이나 떨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마르다를 책망하셨을까?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중이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의지 가운데 내적으로 많은 고민과 갈등의 시간이다. 이때 베다니 마르다의 집에 오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예수님을 쫓아다니면서 자신의 잇속만을 채우려는 사람들로부터 떨어져서 쉬고 싶으셨을 것이다. 베다니가 '고뇌자의 집'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셨다. 그러나 마르다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일을 했다. 반면에 마리아는 주님의 마음을 읽었다. 쉬고 싶고 이야기 하고 싶어 하시는 주님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들었다. 섬김은 주님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자기만족을 위해서 일하면서 섬긴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영적 상태가 점검되어야 섬김의 기쁨을 되찾을 수 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다. 그리고 그 분주함은 결국 분노를 일으킨다. 분주함은 영을 죽인다. 분주함을 내려놓고 주님을 섬김으로 참된 안식을 얻길 바란다.    
 
왜 마르다는 동생을 조용히 불러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왜 마르다는 예수님 앞으로 와서 동생의 잘못을 책망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일까? 내가 하는 이 섬김을 주님께서 알아달라는 표현이다. 나의 섬김만이 최고라는 교만이다. 마르다는 마리아와 자신을 비교하며 누가 높은가를 잰 것이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하면 주의 부르심은 다른 사람의 신발털이개가 되라는 부르심입니다"라고 했다. 섬김이 주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신발털이개로도 주의 손에 들려 사용될 수 있다는데 감격해야 할 것이다. 그저 조용히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고백할 뿐이다. 이것이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기뻐하는 참된 섬김이의 고백이다.
 
<오늘의 기도>
 
부족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오늘도 돌봐주시는 하나님, 무익한 종이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교만이 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흡족하게 받으실 만한 섬김을 올려드리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임준형목사 / 삼각교회


토-낙심하지 않는 삶
본문: 고후 4:16-18
찬송: 445장
 
사람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복을 받았다고 좋아하거나 또 복이 없다고 낙심한다. 좋은 집, 좋은 음식, 좋은 물건들, 심지어는 좋은 피부까지, 온갖 좋아 보이는 것들이 내 형편에 나타나면 좋아했다가 그것이 사라지면 금방 낙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뜯어보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외가 아니다. 늘어만 가는 주름살, 남들과 비교해서 없는 내 형편, 내 삶에 벌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들, 이런 현실 속에서 자주 낙심했던 우리들이다. 보이는 걸 따라 좋아했다가 보이는 것 때문에 금세(今世) 낙심하는 모습, 이해는 되지만 안타까울 때가 많다. 어떻게 하면 '낙심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첫째, 겉사람에 집착하지 말고 속사람에 집중하라.(16절) 낙심을 일으키는 것 중에 큰 것 하나가 육체의 '낡음'과 '쇠락'이다. 그런데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육체로 볼 때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늙고 있다'는 것이고, '산다'는 것 자체가 '쇠락의 길을 걷는 것'이다. 육체로는 그렇다. 이 육체의 낡음과 쇠락은 막을 길이 없는데, 이걸 가지고 애통해하고 어쩔 줄 몰라 하고 낙심하고 절망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겉사람에 집착하는 습성은 속사람에 집중하는 새습관으로 대체하면서 넘어서고 극복할 수 있다. 지금 내 속사람을 한번 주목해보라. 어떤 모습인가? 속사람을 날로 새롭게 하자. 이것이 중요하다. 속사람에 집중하면 낙심이 물러가고 신바람이 난다.
 
둘째, 잠시 고난에 매몰되지 말고 영원한 영광을 주목하라.(18절) '크고 작은 인생의 고난들, 어느 날 불어 닥친 환난, 끊임없는 삶의 난제들, 이런 것들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지금 왜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이런 고민에 너무 천착(穿鑿)하지 말라. 원망하며 고민하다보면 우울해지고 낙심에 빠지게 된다. '인생은 본래 그런 거야! 이런 고난과 환난쯤은 아무것도 아냐!'라며 가볍게 취급하고, 우울한 고민과 연구를 사절하라. 그 대신, 17절의 믿음을 가지라.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이 모든 고난과 환난, 심지어 내게 닥친 불행까지도 영원히 중요한 것을 내 속사람에 이룬다고 믿으라. 그리고 영원한 영광을 주목하는 것이다. 그러면 절대 낙심이 되지 않는다.
 
'낙심의 삶'에서 벗어나는 길, 한마디로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하라. 영원한 복이 있다. 영원한 것에 집중하라. 잠시 받는 현재의 고난을 가볍게 대하고 장차 나타날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라. 믿음의 눈을 예리하게 뜨고 낙심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 바란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믿음의 눈을 예리하게 뜨고 영원한 세계를 주시함으로 낙심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에릭목사 / 상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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