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3월18~23일

[가정예배]3월18~23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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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3월 14일(목) 16:47

월-능력과 기적이 나타나는 삶
본문: 사도행전 3:1-10
찬송가: 91장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을 시시하고 비굴하고 힘없이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으로 일어나서 강한 믿음의 용사로 세상을 호령하며 힘차게 살아주길 바라신다.
 
오늘 말씀은 성전 미문에 주저앉아 힘없이 살아가는 한 걸인과 그 앞을 능력 있는 모습으로 지나가는 영적 강자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험난한 세상 속에 주저앉아 걷지도 못하는 절망적인 걸인의 모습을 떨치고 일어나, 베드로와 요한처럼 세상을 이끌고 호령하는 영적 강자 대열에 합류하는 비결이 담겨 있다. 그 영적 비결이 무엇일까?
 
첫째, 하나님과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시간을 구별하여 하나님과의 시간을 가졌다. 실수투성이면서 넘어지고 쓰러지고 부인하고 도망치고 피곤했던, 그리고 성질이 급했던 두 사람은 하나님과의 구별된 시간 속에서 점점 다른 사람으로 변모되었다. 그러다가 오늘 본문에서처럼 믿음직스럽고, 왠지 모를 영적 늠름한 모습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하나님과의 시간은 능력을 공급받는 시간이다. 두려움이 사라지는 시간이고, 용기로 충만해지는 시간이고, 전혀 새로워지는 시간이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하나님과의 시간을 구별하여 철저히 지켜라.
 
둘째,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의 걸인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믿음의 눈으로 주목하여 바라보았고, 더 이상 그를 절망적인 걸인으로 내버려둘 수 없는 믿음의 힘에 사로잡혔다. 그 순간 '그들에게 있는 것',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의 권세와 능력'이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의 믿음을 따라 역사해주셨고,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40년 동안이나 방치되어온 절망과 어둠의 그림자가 그들 앞에서 사라진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과 고난의 처지를 믿음으로 눈으로 바라보라. 그 안에 있는 희망을 주목하여 바라보고, 조용히 믿음으로 응시하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고 시도하라. 그러면 절망이 물러가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하나님과의 시간, 곧 기도하는 시간을 구별하고, 믿음의 눈으로 삶의 자리를 바라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여 믿음을 시도하고 삶에 도전하면, 능력과 기적이 나타나고,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쳐난다. 혹 주저앉아 있다면, 이 믿음으로 일어나 영적 강자 대열에 합류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거룩한 주의 백성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때로 앉은뱅이 걸인처럼 절망 가운데 주저앉아 믿음 없는 눈, 희멀건 눈으로 힘없이 살아갈 때가 많았음을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하나님과의 시간을 구별하여 능력을 입고, 믿음의 시선으로 시도하여 은혜를 입는 거룩한 삶을 다시 시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에릭목사 / 상도교회


화-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기 위하여
본문:벧전 2:9
찬송가: 218장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그 사랑은 우리 가정에 임하셨고 우리는 그 사랑을 믿고 따르는 가정이다. 우리 모두는 연약함과 허물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영원한 구원의 생명을 주셨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부족한 중에도 예배하게 하고 가정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생각하며 나누고 깨닫게 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향해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불러주시는 사랑이다. 얼마나 영예로운 호칭인가. 가문이나 혈통, 학력이나 사회적 계급이 어떠하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높고 귀히 보시며 왕족과도 같은 소중한 존재로 여기신다.
 
이러한 신앙의 관점은 오늘 우리 민족과 나라를 있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사농공상이라는 말로 계급을 나누어 사람을 차별하고, 특히 여성을 천대하고 노비를 천시하던 시절에 들어온 기독교의 신앙은 빈부귀천과 남녀 직업 간의 차별을 폐지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오늘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이 땅이 어두웠던 시절에 주님께서 우리를 그 어두웠던 곳에서부터 불러내어 우리 주님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덕분이었던 것이었다.
 
나아가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신 것에 대하여 겸허한 마음으로 그 부르심의 의미를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본문에 말씀은 우리에게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이어서 강조한다. 우리가 어둠 속에 있을 때 우리를 불러내어 신비로운 은혜의 빛의 자리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우신 덕을 전하여 나타내야 함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아름다우신 덕은 바로 그 분의 은혜와 사랑이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다. 이러한 아름다운 덕이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아름다운 덕은 창세기 18장에 기록에서 볼 수 있다. 무더운 팔레스타인 땅의 한낮에 아브라함은 나그네들을 보았다. 아브라함은 이들을 초대하여 극진히 대접한 후 가던 길을 가도록 한다. 아브라함은 뜨거운 사막의 한낮에 광야를 걸어가는 나그네된 사람들을 향한 눈길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마음을 귀히 보시고, 18장 19절에 마침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 즉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복주시고 택하셨던 이유를 밝히신다. 그 선택은 오늘 베드로후서를 통하여 아름다운 덕을 많은 이들에게 전하도록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뜻과 맥을 같이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왕 같은 제사장 가정으로 삼으시고 아름다운 덕을 전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 계절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께서 귀히 보시는 그 은혜와 부르심에 합당한 가정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어두운 데서 신비한 빛으로 인도하신 그 아름다운 덕을 나타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창운목사 / 송탄동성교회


수-예배의 기쁨
본문: 사무엘하 6:12-23
찬송가: 9장
 
모태신앙인 필자는 어려서부터 예배를 빠지지 않았다. 예배를 드릴 때 가장 많이들은 소리는 "조용히 해, 예배시간엔 조용히 하는 거란다"였다. 그래서 예배시간은 그다지 흥미로운 시간이 아니었다. 여러분은 어떤가? 예배시간이 즐거운가? 기다려지고 기대되는가?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예배자의 삶을 살았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엘리가 제사장이었던 시기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투를 하게 된다. 전세가 밀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들고 나가면 승리하리라 생각하고 언약궤를 들고 나갔다가 블레셋에게 빼앗겨 버린다. 그러나 그 언약궤는 블레셋의 신 다곤을 쓰러뜨리고 블레셋을 벌한다. 두려움에 떨던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이스라엘 땅으로 돌려보낸다. 그렇게 언약궤는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서 20년을 보내게 된다. 이 언약궤를 사울왕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찾아 예루살렘 성으로 가져온다.
 
왜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왔을까?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 하고 싶었다. 그래서 옷이 벗겨져서 벗은 몸이 보일 정도로 신이 나서 춤을 췄다. 하나님 앞에서 다윗은 어린 양일 뿐이었다. 하나님과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이 예배의 기쁨을 만끽하게 한다.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은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피곤치 않게 되며 가슴이 뛰게 한다. 기쁨이 가득 차게 만든다. 왜 그럴까? 우리 주님이 그러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조금 더 가까이 계시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다. 우리는 먹을 것을 주면 좋아하고, 병을 고쳐주면 따르는 저급한 사랑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주님은 더 큰 사랑으로 우리의 죄악을 대속해주셨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렀지만 주님은 하늘 아버지께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다.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셨다. 하늘의 권세를 가진 예수님이 우리가 만질 수도, 볼 수도 있는 인간으로 사셨다.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신다. 그분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질 때 그분의 사랑이 느껴진다. 그분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주님 나와 함께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때 주님의 권능이 나에게서 나오기 시작한다. 바로 이 시점이 다윗과 같이 춤추는 시점이 된다. 예배의 기쁨을 체험하며 늘 감격의 예배를 올려드리는 예배자 되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 기뻐하시는 하나님, 주님 없는 곳에서 잠깐 느끼는 쾌락보다는 주님과 함께 하는 예배의 자리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임준형목사 / 삼각교회


목-신앙의 기초 다지기 - 말씀대로 행하는 자
본문: 마태복음 7:24-27
찬송가: 200장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는 당시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을 가리켜 '집거위들'과 같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거위들은 매주 뒤뚱거리면서 걸어다닐 것이 아니라 하늘을 나는 새가 되어야 한다는 설교자의 열변에 신이 나서, "아멘, 아멘, 꽥꽥"하면서 화답을 한다. 그러나 예배가 끝난 후에는 거위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전과 같이 여전히 일렬로 줄을 서서 뒤뚱거리며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음을 비판한 것이다.
 
오늘날 신앙인의 딜레마가 있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과 삶의 연결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진리를 깨닫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지만 실제로 생활 속에서 그 진리대로 살지를 못하고 있다. 그래서 괴로워하고 한다. 그러나 정도가 심해지면 무감각해져서 말만 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죄의식도 가지지 않게 된다.
 
본문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결론으로 성도들 가운데도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비유를 드시면서 신앙생활의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예수님의 말씀임을 강조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아서 쉽게 무너져 버리지만,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과 같아서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로 말씀을 들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성경 읽기와 큐티를 규칙적으로 하고 교회 공적인 예배시간에 참석하여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가져야 한다. 둘째로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믿음은 순종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는다 할지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셋째로 의지를 가지고 결단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지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다.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는 의지적 결단이 필요하다. 다니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단할 때 놀라운 기적이 나타났다. 넷째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나의 의지력만 가지고는 말씀대로 행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기쁜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대로 행하게 된다. 
 
주일대예배에 참여하여 오늘 나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소그룹공동체인 구역예배나 셀예배에 참여하여 각자가 받은 은혜와 그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는지 삶을 함께 나누면서 함께 기도할 때 말씀과 삶이 함께 하는 건강한 신앙생활을 도모하게 되고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건강하고도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이 될 것이다.

<오늘의 기도>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그 말씀대로 행하기를 힘씀으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하소서. 열매 맺는 건강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태협목사 / 신곡교회


금-하루살이도 걸러내고 낙타도 걸러내야 합니다
성경: 마 23;23-24 
찬송가: 290장
 
오끼나와의 명동거리라 할 수 있는 국제거리를 아침 일찍 걷다가 나이가 지긋한 부부가 가게문을 여는 것을 보았다. 나무로 만든 조립식 계단을 2단으로 설치해서 드나드는 손님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해주는 간이 계단을 밤에는 치우고 문을 여는 시간에만 활용하는 가게였다. 나무계단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안정감이 있어 그대로 둬도 될법한데 굳이 조립식 나무계단에 대못을 박아 단단하게 고정했다. 가게물품을 상징하는 듯한 물건을 입구에 비치할 때도 다시 끈으로 묶어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혹시라도 불편을 주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였다. 조립식 선반 곳곳마다 혹시라도 손님들이 불편을 겪지 않도록 매일 빼고 박고를 반복하고 묶었다 풀었다를 반복할 못과 끈이 준비되어 있었다.
 
일본에 갈 때마다 그들의 친절, 배려, 그리고 철저하게 성실함에 감탄하며 어떻게 전국민의 0.5%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의 비율로 이처럼 성실하고 정직할 수 있을까 불가사의 하게 여기면서도 부러웠다.
 
국민 개개인으로는 이처럼 성실하고 정직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는 왜 거짓말투성일까? 시시때때로 군국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남의 나라와 민족을 짓밟고 파괴한 역사적 책임을 어찌하여 부인하는 것일까? 독도문제, 위안부문제, 원폭피해자문제 등 아직도 증인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인하고 역사교과서에서 취급조차 않고 오히려 자기들이 피해자인양 역사를 호도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2차세계대전의 당사자인 독일과 비교할 때 너무나 차이가 난다. 독일은 국가 지도자들이 틈만 나면 납짝 업드려서 그들의 책임을 통감하고 사과하며 무한책임을 약속한다. 그리고 다시는 그같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도록 국민교육과 2세 교육에 최선을 다한다. 독일지성인들의 철저한 집단자기반성의 결과다. 그러나 일본은 개인적으로는 참회하는 자가 있었지만 집단적으로 참회한 적이 없다. 그들에게는 기본적으로 복음이 없어서 회개의 기회를 잃었기 때문이다.
 
본문의 말씀처럼 하루살이는 걸러내되 낙타는 삼키는 꼴이다. 국민집단망각에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낙타를 삼키는 어리석음을 계속하면 주께서 "화 있을 찐저!"라고 하신 말씀이 어디로 가겟는가? 주님은 물질의 십일조도 드려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의와 인과 신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작은 것을 지킨 것을 책망한 것이 아니고 더 크고 중요한 것을 더욱 지켜야한다고 강조하신다.
 
일본인의 성실함과 일본이라는 나라의 불의를 보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사소한 일뿐 아니라 크고 중요한 일에 정직한 백성, 가정, 개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웃나라 백성들의 작은 성실을 보고 배우되 이웃나라의 불의와 거짓을 거울 삼아 우리의 가정이 작은 일 뿐 아니라 큰 일에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중식목사 / 산돌교회


토-내 등을 맡기며
본문: 사 50:4-9절
찬송가: 303장
 
오늘 본문은 기원전 6세기의 신바벨론 제국시대를 배경으로, 바벨론에서 떠나 이제 시온으로 되돌아가는 예언자의 구원이 선포되는 장이다. 아직 포로생활중인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되는 그 날을 꿈꾸고 노래하는 느낌을 준다. 본문의 주인공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일하는 사명이 있는 사람, 의로운 자, 평화를 가져오는 자를 의미한다.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자로 묘사되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이 세상의 고난들에 동참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어 '종의 노래'라고도 불리는 본문이다. 6절은 십자가형을 받기까지 당했던 예수님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

4절에 나오는 학자라는 말은 제자를 가리키는 말로 누구에게든지 제자라는 사람은 사명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스승의 말을 듣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들은 바를 곤고한 사람들에게 전해야하는 사명이다. 그 들은 말씀으로 곤고한 자들을 말로 도와주라고 한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생활중이였다. 포로상황의 비참함과 곤고함을 여러분은 알 것이다. 오늘날에도 곤고한 사람들이 많다. 회복되기 힘든 질병에 걸린 사람, 가난한 사람, 정신적인 억눌림을 당하는 사람 등 모든 곤고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종들이 전하는 위로의 말씀이 필요하다. 사순절기간에 예수님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은 이처럼 이웃의 고난을 함께 나누는 실천으로 이어져야한다.
 
예수님은 곤고한 자들에게 말로 위로할 뿐만 아니라 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분이다. 그는 십자가의 길을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가지도 않았다. 자신을 때리는 자들에게 날 때리라고 오히려 등을 맡겨버리고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수염을 뽑도록 빰을 내주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욕을 당하고 사람들의 침 뱉음도 견뎌내며 모든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순종하여 그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오늘 본문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나를 도와주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으로, 상황은 어렵고 곤핍하며 수치와 모욕이 우리를 누르겠지만 우리는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오히려 예수님에게 맞서는 자 대적하는 자들은 옷과 같이 헤어지고 좀들이 그들을 먹으리라고 말씀한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고통 중에 처할 때 강하게 반발하고 강하게 대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말씀대로 그런 순간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순순히 그런 상황에 나를 맡기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의 승리하심과 도우심을 기대하자.
 
<오늘의 기도>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기꺼이 맡기는 우리들이 되게 하소서. 또한 하나님께 들은 말씀으로 곤고한 자들을 말로 돕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혜숙목사 / 전국여교역자연합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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