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3월11~16일

[가정예배]3월11~16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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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3월 07일(목) 10:04

월-그대로 될 것을 믿는다.
본문: 사도행전 27장 13-26절
찬송가: 200장
 
오늘 말씀은 바울이 죄수의 몸이 되어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도중에 생긴 일이다. 바울이 탄 배는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된다. 배는 이제 본래의 목적대로 항해하지 못하고 바람이 부는 대로 그 몸을 맡길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선원들은 배가 난파되지 않도록 여러가지 노력을 한다. 쓸데없는 짐과 기구들을 모두 바다에 버려서 배를 가볍게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조치를 다했는데도 희망이 보이질 않았다.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뒤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그 속에서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본문에서 우리는 그 구원의 희망이 되는 단서를 만날 수 있다. 광풍이 불지만 그 광풍으로 인해 배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흔들리고 어디론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 속에 불어오는 광풍 때문에 내가 그 자리에서 곧 파괴되고 무너질 것 같지만, 오히려 그 광풍을 이겨내기 위해서 내 인생을 가볍게 만들게 된다. 즉 덕지덕지 붙어 있었던 불필요한 것들, 물질에 대한 욕심이나 잘못된 인간관계들, 필요이상으로 많이 소유한 물건들을 버리고 제대로 된 인생의 종착지에 인도될 수 있다. 그럴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본문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 바울의 말과 행동에서 발견된다. 배에 탄 사람들이 소망을 잃고 좌절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람인 바울은 일어서서 외친다.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손상이 없겠다."
 
바울의 이 외침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를 보여준다. 모든 사람은 인생의 폭풍을 만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러한 어려움에 속수무책으로 감당할 힘을 잃어버리지만, 믿는 자들은 바울이 보여준 것처럼 그 풍랑의 한 가운데에서 이제는 안심하라고 외칠 수 있다. 바울의 이런 믿음은 어디에서 올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바울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이처럼 절망적인 인생의 광풍 속에서도 안전한 섬에 정박할 희망으로 안심할 수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될 것을 믿는다고 증언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불가능을 가능케 한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다. 불안한 마음을 평안으로 바꾼다. 죽음에서 건져 생명으로 옮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도 믿음이 없이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바울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리라고 믿어야 한다. 우리들도 바울의 믿음을 본받아서 절망 속에서 희망을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말씀으로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 인생의 광풍 속에서 이리 저리 흔들리며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속에서 불필요한 인생의 짐들을 과감하게 버리게 하소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혜숙목사 / 전국여교역자연합회 사무총장


화-신앙의 기초 다지기- 성경 많이 읽기
본문: 히브리서 1:1-2
찬송가: 205장
 
구약성경은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히 1:1). 39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구약성경이 정경으로 확정된 것은 AD 90년 얌니야에서 있었던 랍비들의 회의에서 였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히브리어 구약 성경은 3부 24권으로 되어있는데, 39권으로 되어있는 기독교의 구약과 권수와 배열은 서로 다르지만 내용은 동일하다. 권수와 배열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기독교의 구약이 대체로 내용 중심으로 편성된 70인역을 따르고 있는 반면, 유대인의 구약은 각 권의 책이 형성되고 모아진 역사와 시대에 따라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말씀을 사도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히 1:2). 27권으로 구성된 신약성경이 정경으로 확정된 것은 393년 북아프리카 히포와 397년의 카르타고의 두 번에 걸친 공의회에서였다. 기독교에서 신약성경을 정경으로 확정하는 일을 서두른 것은 이단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일 뿐 아니라 이방 선교에 힘을 더하기 위해서, 또한 박해에 대항하여 성경을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성경의 저자는 성령이시다(딤후 3:16). 1천600여년에 걸쳐 40여명의 저자들이 성경을 기록하였는데, 그들이 함께 만나서 우리가 이런 책을 쓰자고 의논하고 결의한 적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한결같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으며, 성경의 일관성 있는 중심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인 것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기록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마다 우리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을 바로 이해하도록 기도해야 한다(딤후 3:16). 성령의 영감이 없이 우리의 이성과 지성만 가지고 성경을 읽고자 한다면 성경의 깊은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능력이 있어서 읽는 사람을 완전히 변화시키며, 변화된 사람들은 그 사회와 문화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음으로 읽어야 한다(히 4:2). 한갓 교훈이나 수양을 목적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우리에게 별 유익이 없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읽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신앙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무너지기 쉬우나, 말씀 위에 세워진 신앙은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쉬 무너지지 않는다(마 7:24-27). 금년에 최소한 성경을 한번은 통독하면서 신앙의 기초를 말씀 위에 견고하게 세워나가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다.
 
<오늘의 기도>
세속화의 풍랑 속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여 표류하는 저희들을 영원히 변치 않는 반석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붙들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그 말씀이 저희 안에 역사하여 풍성한 열매가 맺혀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태협목사 / 신곡교회


수-습관의 힘
본문: 딤전 4:6-8
찬송가: 420
 
두달 전부터 검지손가락부터 중지손가락까지 저리더니 이제는 손목아래와 팔꿈치 아래까지 수시로 저린다. 정형외과에 가서 각종검사와 사진 그리고 MRI까지 찍고서 목디스크 판정을 받았다. 수술할 단계는 아니라며 약을 처방해주고 계속 불편하면 손목수술 후 그래도 안되면 목수술을 생각해보잔다. 운동치료로 체육학박사학위를 받은 조카가 센터장으로 근무하는 트레이닝센터로 갔더니, 이거저것 만져보고 시도하더니 볼링공만한 고무공을 주며 들어보란다. 두손으로 들기도 솔찬한 무게였다. 고무공을 들고 앞으로 나란히 하듯 해보란다.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내 머리의 무게란다. 7킬로그램! 그 무게를 목뼈와 힘줄로 받치고 있는데 자세가 잘못되면 당연히 목디스크가 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수술이나 재활치료로 회복된다해도 자세를 고치지 않으면 다시 재발할 수밖에 없단다.
 
조카의 운동과 재활치료처방을 받고 내 자신의 습관을 돌아보니 성경읽기와 독서 그리고 신문스크랲으로 계속되는 나의 생활습관은 목디스크가 이제 온 것이 은혜임을 깨달았다. 조카의 처방대로 턱을 당기고 어깨와 가슴을 펴고 머리를 하늘로 들어올리듯한 자세로 걷고, 책도 보고 신문도 스크랲하려는데 그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1분도 쉽지않다. 의식하지 못한 새에 턱을 내밀고 어깨와 가슴은 움츠리고 머리 또한 위를 향해 올리는 듯한 자세는 풀리고 만 것을 확인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더니, 습관의 힘이란 대단하다. 팔목시계를 풀고서도 한 3년쯤은 시간을 알기 위해 왼손을 들어올렸다. 손목에 시계를 차고서도 광장에 시계가 어디 있나? 하고 둘러보거나 휴대폰을 꺼내보거나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몇시냐고 물을 때가 많다. 그리고 왼손목에 시계를 차고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선 실없이 웃는다.
 
오늘 본문은 연습에 따른 습관의 힘이 얼마나 크고 엄청난가를 가르쳐준다. 육체의 좋은 연습 즉 습관도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지만 경건한 습관은 범사에 유익하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구제하며 전도하는 경건의 습관이야말로 엄청난 자산이자 축복이다. 사교육시장이 우리만큼 번창한 나라는 세계적으로 없다. 그런데 사교육을 넘어 경건의 훈련으로 누릴 축복을 사교육에 비교할 수 없을 터인데, 우리 믿는 이들이 과연 얼만큼 경건습관의 힘과 축복을 누리고 있는가?
 
습관적으로 예배하고, 습관적으로 기도하며, 습관적으로 성경을 읽고, 습관적으로 구제하며, 습관적으로 감사하고 사랑하고 용서하며, 습관적으로 주님 말씀과 성령님의 감동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경건한 습관의 축복을 누리는 우리 가정이 되기를 힘쓰자.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 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시 37:25~26)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가정이 경건한 가정 되어 경건한 습관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중식목사 / 산돌교회


목-치유의 초대
본문: 막2:13-17
찬송가: 471장
 
평소 교회라고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람도 중병이 들면 약해져서 교회를 찾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 똑같은 사람이 기도하는데 누구는 낫고 누구는 낫지 않을까? 왜 누구는 기도 받아도 낫지 않는데 누구는 기도 받지 않아도 낫는 걸까?

성경은 예수님의 치유가 단순히 병을 고치는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님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며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왜 그러셨을까? 그 해답은 오늘 본문에서 찾게 된다. 예수님은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나를 따르라며 제자로 부르신다. 레위는 곧바로 응답하고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 잔치를 벌인다. 그의 직업은 세리이다. 세리란 자신들을 정복한 나라인 로마에 자국민들의 세금을 걷어 바치는 사람이다. 그들은 돈 외에 인정, 사랑, 교제, 신앙, 예배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니 인정받지 못하고 미움당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이 당연지사 아닌가. 세리 레위가 모여 있는 잔치를 보자. 세리와 죄인들 판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들과 어울린다고 욕하고 비난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신다.
 
왜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을 고치시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셨을까? 왜 모두가 죄인이라 하는 세리의 친구가 되어 주시며, 의사되신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죄인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실까? 이것은 단순히 질병의 원인이 죄 때문이라는 것이 아니다. 질병은 더 큰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레위란 이름의 뜻은 연합이다. 그러나 레위는 세리이기에 철저히 분리되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그의 마음은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죽을병 들린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피해서 지나친다. 그런데 예수님은 따뜻한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봐 주신다. 순간 레위의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내린다. 말씀을 걸어주신다. 그와 함께 집으로 들어가신다. 식사를 나누신다. 예수님은 현재 세리인 레위의 모습만을 보시고 정죄하지 않으셨다. 성경학자 윌리엄 바클레이는 "예수님은 레위라는 이름을 가진 이 세리를 보았을 때 그 안에 있는 위대한 전도자 마태를 보았다"고 하였다.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죄와 냉대 속에 죽어가는 세리 레위와 연합하셔서 예수님의 제자이며 신약의 첫 복음서인 마태복음을 기록한 하나님의 선물인 마태로 치유하신 것이다.
 
태어나 죽음으로 치닫는 인생에서 질병 너머의 주님의 원대한 뜻을 깨닫자. 그리하여 한 가지 질병의 일회적인 치유가 아닌 영원히 치유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 오늘 내 질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질병을 주신 뜻을 깨달아 인생의 회복이 아닌 회복된 영생을 사는 주의 자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임준형목사 / 삼각교회


금-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
본문: 요한복음 14:16-17
찬송가: 182장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항상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현실은 끊임없이 두려움을 주고, 어려움을 주고, 유혹하고 괴롭히고 몰아치면서 소원의 길을 막는다. 고통의 바다로 빠트리는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기쁨과 평강을 바라는 소박한 소원은 도저히 성취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기쁨과 평강 넘치는 삶이 현실에서 과연 불가능한 일이기만 할까? 그렇지 않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렇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첫째, 혼자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내 안에 기쁨과 평강은 잠시뿐이고, 두려움과 불안과 외로움과 어려움에 자주 빠지는 것은 '나 혼자'라는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혼자라는 의식은 영적 어둠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영적 착각인데, 그 영적 착각에서부터 앞에서 열거한 모든 방황이 시작된다. 그러나 알고 보면 나는 혼자가 아니다.
 
제자들 곁을 떠나가야만 하는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을 대신할 보혜사를 저들에게 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하셨다. 그리고 약속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이 얼마나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약속인가!
 
'보혜사-파라클레토스'의 '파라'는 '평행, 옆'이라는 뜻이고, '클레토스', '부르다'라는 뜻이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를 곁으로 불러서 늘 함께 해주시는 분이다. 이 보혜사가 우리와 함께하시면 현실은 달라진다. 그리고 변해간다. 어둡게만 여겨졌던 현실은 어느 사이 밝은 분위기 속에 젖어들고 내 마음에는 기쁨과 평강의 넘쳐나기 시작한다. 혼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라. 그건 착각이다. 지금 내 곁에 보혜사가 계신다. 그분과 함께라면 언제나 기쁘고 평안할 수 있다.
 
둘째, 진리의 영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죄악과 마귀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 속에서 날마다 죄악된 생각과 어둔 세력의 속삭임에 끌려가다보니 마음이 무겁기만 했던 것이다. 영적 짓눌림의 상태, 그런 상태로 살아온 것이다. 그러니 힘들 수밖에! 여기에 눌려있는 한 절대로 기쁠 수 없고 평안할 수 없다.
 
우리 곁에 와 계신 보혜사, 그분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진리의 영이시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에 늘 귀를 기울이라. 그러면 만만치 않은 세상 속에서도 언제나 충분히 기쁠 수 있고 평안할 수 있다. 복이 될 수 있다. 세상은 보혜사를 모르지만 우리는 그분을 안다. 그분의 실존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매순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길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바람에 흔들리는 부평초처럼 세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불안한 모습으로 지내지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살아 기쁨과 평강이 넘쳐나는 거룩하고 복된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에릭목사 / 상도교회


토-날마다 새 세상으로
본문: 막 1:14-18 
찬송가: 347장
 
우리 고향은 000이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내 고향은 000이고 내가 태어난 집은 000한 곳의 000이었다(인도자의 고향과 태어난 집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그 곳이 바로 우리 가문에 속한 나의 고향이요, 탯자리라고 할 수 있다. 여러분 각자의 탯자리는 000이다.(자녀들에게 태어난 자리와 소감을 들려주자). 이러한 물음은 우리가 걸어온 길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하며, 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함께 지내며 예배할 수 있는 것이 참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마음이 숙연해지게 된다. 우리 모두가 각각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로서 여기까지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왔고, 어느새 그런 세월을 거쳐 우리는 오늘 여기까지 와 있다.
 
어찌 보면 이것은 기적이 아닐까?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계획과 섭리 속에서 한 가족으로 살아가며 오늘도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함께 만나고 있다! 살아온 것에 대한 감사, 앞으로 다가올 은혜에 대한 기대와 소망. 그것은 바로 새 세상을 향한 소망이다.
 
본문에서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이다. 이제 새 세상이 도래하고, 하나님께서 언약하셨던 메시아의 구원의 때가 성취된다는 선포였다. 당대의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고도 상당수가 깨닫지 못했고 믿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늘 우리 가정은 그 구원의 역사가 성취된 성도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때가 이루어진 새 나라, 새 세상에 속한 사람들인 것이다. 다만 우리는 이 몸과 유한의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음으로 인해서, 이 땅에 속해 있고 이 땅의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루하루 새 세상을 향하여 나아간다.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고, 은혜와 소망의 최종적인 목적지를 향해 함께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발걸음에는 과거의 시간 속으로 버려두어야 할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생업의 도구였던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갔다는 말씀은 주님과의 동행, 새 세상을 향하여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 것이 있음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새 세상을 향하여 떠났다. 그 떠남은 바로 과거와 본토 친척과 조상의 집을 떠난 것이었다. 우리 주님의 부르심은 새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발걸음의 출발을 의미한다. 그것은 새로운 역사를 위하여 떠나보내야 하는 것들, 특히 우리의 영혼과 우리 가정을 얽매는 것들을 끊고 그런 것들로부터 떠남의 발길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새 세상을 향한 출발은 불편하고 어려운 길이 아니다. 도리어 거기에 주님과 함께하는 참된 생명력과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있음을 기억하자.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가 주님과 새 세상의 길을 걸어가고자 할 때에, 우리 영혼과 인생을 얽매이게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떠남으로써 참된 생명과 성장의 길을 걸어 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창운목사 / 송탄동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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