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2월25~3월2일

[가정예배] 2월25~3월2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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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2월 21일(목) 14:59

월-모든 것을 이기는 하나님의 사랑
본문: 요 16:33
찬송가: 15장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사탄은 성령의 일들을 흉내낼 수 있지만 겸손에 바탕한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따라할 수 없다.
 
현재 많은 국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심하게 박해를 받고 있다.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질수록 빛과 어둠의 대조가 극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주의 백성에게는 큰 부흥과 영적각성이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와 함께 비열함과 폭력으로 나타나는 사탄의 역사가 함께 증폭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에는 영원히 멸망당할 타락한 천사에 불과하다.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다 감옥에 갇혔을 때 초대 제자들은 철야 기도회를 열어서 그가 놓이기를 간구했다. 그 응답으로 하나님은 간수들이 자는 동안 천사를 보내어 자연적으로 문을 열고 친히 베드로를 인도하셨다. 예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핍박받는 자들에게 특별한 대접이 있을 것을 예언하셨다.
 
주님은 우리가 복음전파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버린 모든 것을 백배로 갚아주겠다고 하셨다. 그 말은 우리가 많은 시험에 통과하고 진실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며 하나님의 우선권에 순종하면, 때가 될 때 문자 그대로 감당 못할 축복을 부어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약서에 첨부된 세 단어가 있다. "박해를 겸하여 받고."
 
믿을 만한 조사기관들은 20세기와 21세기에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순교하는 사람들이 모든 세기를 합친 수보다도 더 많았다고 보고한다. 선교 다이제스트에 의하면 순교자가 1억에 육박한다고 한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곳에 사는 성도들은 오직 신앙 때문에 박해받는 성도들의 짐을 덜어주어야 할 책임과 특권이 있다. "너희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히13;3) 기도의 명령이다. 박해의 불은 하나님의 사랑의 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슬픈 일은 박해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들을 통해 온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확실한 치유책은 예수님이 하라고 명한 일을 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사랑하고 축복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고통을 치료하고 자유케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그 분의 심장을 이식한다. 우리가 할 일은 순종뿐이다. 그러면 그 분의 방법과 때에 우리를 통해 주의 사랑을 나타낼 기회를 주실 것이다.
 
원망의 불은 우리를 황폐하게 할 수 있지만, 원망을 태워 없애는 사랑의 불로 새롭게 될 수 있다. 비통한 마음으로 까맣게 타서 숯이 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거룩한 불꽃이 되어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지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어떤 고난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의 힘으로 넉넉히 이기게 하옵소서. 이 땅에 복음으로 인하여 고통 받는 모든 형제, 자매들이 사랑으로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희순목사 / 논산목민교회


화-죽어야 신자 맛이 난다 하십니다.
본문:마가복음 8:35
찬송가: 150장
 
요즘 층간 소음으로 이웃집 간에 생명을 해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서로의 삶을 행복하게 한다.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으면 이웃 간에 천국이 임할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약속하고 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면 천국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구원은 천국의 삶을 살게 한다. 
 
홍어는 죽어서 삭혀져야 맛이 난다. 이처럼 죽어야 맛이 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이다. 자신의 이기주의와 고집과 철학이 죽어야 신자가 된다. 자신을 부인해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바로 육신에 속한 인격을 죽이는 것이다.
 
필자의 친구가 '김치와 인생의 공통점'이라는 글을 보내 주었다.
 
"맛있는 김치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배추가 다섯 번이나 죽어야 한다. 땅에서 뽑힐 때 한 번 죽고, 배추통이 갈라지면서 또 죽고, 소금에 절여질 때 다시 죽고, 매운 고추와 짠 젓갈에 범벅 되서 또 다시 죽고, 마지막으로 장독에 담겨 땅에 묻히면서 죽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김치 맛을 낼 수 있다."
 
다른 사람들과 공존하는 삶 속에서 김치처럼 풍부하고 맛있는 숙성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욱하고 솟구치는 성질이 죽어야 하고, 자기 고집이 죽어야 하고, 남에 대한 삐딱한 편견과 고정관념도 죽어야 한다. 또한 자기만의 욕심을 챙기기 위해 남을 배려하지 않는 성질도 죽어야 한다.
 
우리가 죽을수록 예수님의 성품과 삶이 열매를 맺게 된다. 그분의 향기가 퍼지게 된다. 나쁜 감정이 죽고 죄성이 죽고 자존심이 죽고 분노가 죽을 때만 예수님의 삶의 열매가 가득하게 될 것이다.
 
히브리 격언에 하나님은 부서진 것을 사용하신다는 말이 있다. 기독교는 죄에 대하여 죽음으로 생명을 얻고, 육의 것을 버림으로 영의 것을 얻고, 부서지고 깨어질 때 하나님께서 쓰신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다. 한번만 깨어져도 안된다. 한번만 부서져도 안된다. 날마다 순간마다 부서지고 깨어져야 한다. 우리의 삶에 천국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자신의 생명과 몸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제 사순절 절기를 맞아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는 삶을 경험할 때 신자다운 맛이 나고 빛과 소금이 된다. 사순절에 죄악에 물든 내 자신은 죽어지고 예수님이 살아나는 절기로 삼자.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 내어주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의 삶을 본받게 하소서.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육체의 소욕이 날마다 죽게 하소서. 맛있는 김치처럼 내가 죽고 주님의 향기만 드러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상원목사 / 목천교회


수-해 아래 새 것?
본문: 전도서 1:8-11
찬송가: 421장
 
전도서는 전도자 솔로몬의 글이다.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의 후광을 누렸을 뿐 아니라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재산과 지혜는 세상의 그 어느 왕보다도 컸다(왕상10:23). 이 만큼 누리고 살았으면 "인생 살만했다"고 말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실상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라고 말하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인가? 그 이유가 8절에 있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사람은 만족을 모른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새로운 것이라고 좋아하지만 시간이 흘러 보면 그것도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결국 새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다면 지혜의 왕이요 이 땅의 부와 영광의 지극함을 누려보았던 솔로몬의 결론이 해 아래에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하는 것인가? 아니다. 전도서의 결론(전12:13-14)을 보면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들을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라고 감격스럽게 고백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 날로 새로워진다고 간증하고 있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새로움은 자기 수양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야 진정한 새로움을 알았다.
 
우리는 이 땅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난다. 그 후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새로 태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 때부터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에게 날마다 새롭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날로 풍성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각각 행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후5:10).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는 쾌락주의자가 되는 것도,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다고 절망에 빠지는 허무주의자가 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고 날마다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서야 하는 우리의 자세일 뿐 아니라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하는 길인 것이다.
 
해 아래에 새 것은 없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믿음의 새로움이 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13:5)."
 
<오늘의 기도>
온 세상을 홀로 지으실 뿐 아니라 지금도 홀로 다스리시는 하나님, 저희가 세상 헛된 것을 좇아가다가 실패하지 아니하고 푯대를 오직 그리스도에게로 향하여 주의 일에 더욱 힘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준영목사 / 성석교회


목-일곱 번씩 일흔 번
본문 : 마태복음 18:21-35
찬송 : 276장
 
예수님은 용서하되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다. 이는 문자적으로 4백90번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용서의 제한을 두지 말고 '묻지 마 용서'를 하라는 것이요, 분노를 안고 살지 말라는 말이다. 우리 주님은 용서에 대한 예화로 한 임금과 만 달란트 빚진 종을 말씀하셨다. 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그 돈을 갚을 길이 없어 아내와 자식들 모두를 팔아야 할 처지였지만 임금이 그를 불쌍히 여기고 빚을 탕감해 주었다. 이 소식은 복음이다. 그런데 탕감받은 자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나 돈을 갚으라고 하면서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 얘기를 들은 임금은 화를 내면서 그를 감옥에 집어 넣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이 엄청난데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산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만한 일이다.

평론가인 더글러스 러시코프는 이 땅의 많은 발명품 중에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지우개'라고 했다. 만일 지우개가 없었다면 데생이나 스케치가 불가능했을 것이고 많은 작곡이 어려워졌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깨끗이 지워주셨는데 우리가 조그만 잘못을 한 사람의 허물을 용서해주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이고, 이 세상을 살기 힘든 세상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이다.
 
용서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아내가 자제력을 갖고 남편을 대하기에 하루는 남편이 '당신의 자제력이 대단한데 어떻게 분노를 다스리는가?'를 물었다. 아내는 '화장실 청소로 분노를 푼다'고 했다. 그게 어떻게 도움이 되느냐고 했더니, "난 늘 당신의 칫솔로 변기를 닦거든요"라고 대답을 하더란다. 비록 앞에서 화를 내지 않더라도 어떤 앙갚음을 함으로 풀려는 것은 용서가 아니다. 용서는 마음 속에서 화나는 사건을 없애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마음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맡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때 용서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마음 속에 분노를 담고 살아갈 때 자신의 마음이 더욱 불편할 뿐 아니라 그 분노를 통해 내 마음이 썩어져 갈 수 있다. 훌훌 터는 방법을 연습해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의 용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용서해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용서의 연습을 해야 한다. 나는 용서할 수 없으나 하나님이 하게 하실 때 비로서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용서는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이다.
 
웨슬레가 용서에 대한 설교를 했는데 한 장군이 "난 내게 총부리를 겨눈 그 사람만큼은 용서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웨슬레는 "장군님, 그렇다면 앞으로 당신은 죽어도 죄를 짓지 마셔야 합니다"라고 대답해 주었다고 한다. 많이 용서하면서 살아가자.
 
<오늘의 기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처럼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한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살게 하소서. 내 힘으로 용서하지 못할 때, 성령께서 도우셔서 용서하며 살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장경덕목사 / 가나안교회


금-하나님의 명령과 약속
본문: 출 23: 24-26
찬송가: 446장
 
소와 사자, 그 둘은 서로 사랑하여 마침내 결혼하였다. 둘은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했다. 소는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풀을 날마다 사자에게 대접했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살코기를 날마다 소에게 대접했다. 하지만 참을성에도 한계가 있는 법. 결국 소와 사자는 크게 다투고 헤어지고 말았다. 헤어지면서 서로에게 한 말은 "나는 최선을 다했어"였다. 이들의 문제는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배려가 없는 것이다. 나 위주로 생각하는 최선은 언제나 문제가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이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자기 일을 하며 자기 왕국을 세운 사람들이다. 신앙은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내 생각에서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꾸는 것이다.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홍해와 광야를 거쳐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모세가 받은 말씀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모든 생각을 나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라는 구체적인 명령이다. 먼저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들의 신을 경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풍요와 다산을 약속하는 신들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 둘째,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는 것이다. 즉 부도덕하고 사악한 우상숭배 의식을 따르지 말라는 것이다. 셋째는 우상과 주상을 깨뜨리라는 명령이다. 경배의 대상이었던 모든 우상들을 부숴버리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눈과 하나님의 심장을 가지고 가나안에서 살라는 말씀이다. 이때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복을 말하고 있다. 먼저 양식과 물에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이다. 그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고 낙태하는 자와 임신 못하는 자가 없게 하신다는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끝으로 내가 너의 날수를 채우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장수의 복을 약속하신다.
 
생각의 중심에 내가 있으면 모든 것이 파멸이다. 하나님께 신앙의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한다.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오늘의 삶에 적용함으로 복을 누리시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시길 바란다. 하나님을 믿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삶과 말과 생각의 무게중심이 하나님께 있는 사람이다.
 
<오늘의 기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 오늘의 생각을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는 주님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정우목사 / 안동서부


토-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본문: 로마서 12:1-3.
찬송가: 425장
 
신실한 남 왕국 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북 왕국 아합 왕과 혼인 동맹을 맺게 되었다. 이렇게 전쟁이 없이 삼 년이 지난 후 아합은 아람 왕에게 빼앗긴 길르앗 라못을 탈환하기 위해 여호사밧 왕도 이 전쟁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자 이에 응한다.
 
그러나 여호사밧 왕은 출전하기 전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는데 이에 아합 왕은 4백여 명의 선지들을 소집하여 그들의 의견을 묻는다.
 
그러나 다른 선지자들의 의견과는 달리 기도의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기를 힘쓰던 참 선지자 미가야는 기도 중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환상을 통해, 이 전쟁은 거짓말하는 영을 통해 아합을 꾀어 길르앗 라못에 가서 죽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아합은 이를 무시하고 여호사밧 왕과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간다.
 
아합은 왕복을 벗고 변장하여 전쟁터에 들어가는데 아람 군사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아합의 갑옷 솔기를 맞히게 된다.(왕상 22:34) 결국 아합은 하나님의 뜻대로 길르앗 라못에서 죽게 된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사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일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더라면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버림을 받아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던 요셉은 비통한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 것이며, 요셉의 아버지 야곱 역시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깊고 놀라운 운총이며 섭리임을 알았다면 사라져버린 아들 요셉을 죽은 줄로 알고 안타까워하면서 자기 옷을 찢으며 비통의 눈물을 흘리는 대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고 경배했을 것인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다음의 경우에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첫째, 신실한 예배자로 살 때에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된다. 너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도 예배할 때에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힘써 기도해야 한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이 세상 사는 동안 신실한 예배자로 살고 깨어 기도하기를 힘쓰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현용목사 / 빛과소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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