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벼 꽃

<단편소설> 벼 꽃

[ 제10회 기독신춘문예 ] 제10회 기독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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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4월 08일(수) 10:35

글  김 은 미

상기 씨는 나의 등과 엉덩이에 퍼진 욕창 소독을 마친 후, 빈 약통에 각각 알코올과 포타딘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 다시 상처를 내려다보며 제 혼자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많이 아물었네. 좋아졌어요." 상기 씨는 걷어 올려진 나의 윗도리를 추스르고 일어서려다 "아차!"하며 다시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가방에서 시집 한 권을 꺼내 엎드린 나의 가슴 깨에 내려놓으며 이 시인이 우리 문단에 큰 영향을 끼친 거목이며, 학창시절부터 매우 존경하는 시인이라는 말까지 덧붙였으나, 나는 솔직히 시집이란 것에 도통 관심이 없는지라 적잖이 당황했다. 우두커니 시집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낯선 그 시인이 엉거주춤 한쪽 엉덩이를 내 침대에 걸치고 앉아 퀭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기라도 하는 듯해, 결국 나는 그 두껍지 않은 자그마한 책 한 권에 눈길을 주지 못한 채 괜히 데면데면해지고 말았다. 상기 씨가 주방 싱크대에서 세제로 거품을 내어 손을 씻고, 약상자를 들고 나간 후, 방 한쪽에서 빨래를 개어 서랍에 챙겨 넣던 아버지는 '노인정에 가마' 손짓을 하고 그의 뒤를 따라 집을 나섰다. 그들이 방을 나간 후, 나는 침대 머리가 맞닿은 벽면 위의 열린 창을 통해, 아버지의 녹슨 자전거가 집 앞 비탈을 내려가고 뒤이어 상기 씨의 초록색 승용차가 천천히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내려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여름 낮 시간은 더디게 흐르고 창밖 풍경은 눈부신 채로 한참 정지되어 있었다.

   
▲ 그림 조혜연
상기 씨가 일주일간 모았다가 전해준 두툼한 신문 뭉치를 뒤적뒤적하다가, 시집 겉표지를 열고 한 장씩 펼쳤다. 시인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듯도 한 시들 두어 편. 단어의 뜻조차 모르는 글자들로 나열된 서너 편. 하, 그래도 이렇게 고즈넉한 한낮, 시란 것을 읽는 재미도 괜찮구나 하고 생각했다. 문득 내 눈을 멈추고 내 생각을 붙잡은 시 한 편이 있었다.
 
 먼 곳에서부터 / 먼 곳으로 / 다시 몸이 아프다 //
 조용한 봄에서부터 / 조용한 봄으로 / 다시 몸이 아프다 //
 여자에게서부터 / 여자에게로 //
 능금꽃으로부터 / 능금꽃으로... //
 나도 모르는 사이에 / 내 몸이 아프다    
 (김수영, <먼 곳에서부터>)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몸이 아픈 것에는 시인도 모를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나 역시 평소 그 이유를 굳이 상기하거나 아픈 부위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결국 구차하게 시인은 여자에게서부터, 사과인지 사과 꽃인지를 들먹이며 그 이유를 떠벌리고야 말았는데, 나 역시 낯선 시인의 주정 같은 하소연에 옳소 하고 내 속내를 들켜버려 내내 이 시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꼴이다. 그의 속내가 나의 그것과 같을 리야 없지만 아무려면 어떠하겠는가, 그의 시가 내 눈앞에 있는 동안 나의 속사정과 별반 다를 것 없어져 버린 것을. 글쎄 그의 시가 나의 속 어느 부분인가 그대로 찍어냈다고 하면 시인은 뭐라고 할까, 아니 상기 씨는 뭐라고 되물을까. 그는 가끔 나의 눈빛이나 말투만 읽고도 내 속을 빤히 들여다본 듯, 웃어 보이거나 농 섞인 말로 슬쩍 속을 떠보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처음 내 방문을 열었을 때의 그 완강했던 거부감과 경계심을 어느 순간 슬며시 놓아 버린 것이. 서울에서 살다가 느닷없이 낯선 시골에 내려와 글을 쓴다는 그가, 어디서 내 사정을 듣고 왔는지 문득 찾아와 대뜸 나를 돕겠다고 했을 때, 나는 참으로 사나운 짐승처럼 으르렁 대며 그를 내쫓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점잖은 행색은 영락없이 교회의 전도사나 목사 같은 분위기여서 자주 들락거리며, 성경을 읊어가며 나를 예수쟁이로 만들려 작심하고 접근하는 것이려니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교회에 다니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아직까지 한 번도 나에게 신앙을 권유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먼저 입을 열어 마음을 보인 건 내 쪽이었다. 숙자 이름을 대며 지난 일을 떠벌리다가 급기야는 '숙자년', '그 년' 해가며 욕을 해댔다. 상기 씨는 잠잠히 듣다가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상처란 시간이 지나면 아물게 마련이라면서 더 이상 숙자로 인해 내 상처를 곪게 하지 말라고 말했다.
 
칠월 한여름, 뜨거운 뙤약볕 아래, 이제 벼꽃이 필 게다. 

팔 년 전, 집을 나가버린 숙자를 찾아 오토바이로 우리 면에서 읍내까지 몇 차례나 돌아다니다가, 무슨 사고라도 났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에 그야말로 똥줄이 바짝 타들어가 모든 파출소와 경찰서마다 찾아가 사고자 명단을 확인하고 실종 신고까지 했다. 그 후 경찰서마다 수시로 전화해 숙자의 이름을 문의했으나 열흘 여간 아무런 기별이 없었고, 지글지글 애간장이 끓다가 뒤틀려버린 창자에서 가슴으로 다시 목구멍을 타고 슬슬 욕지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다음부터 나는 통 일손을 잡지 못한 채 논두렁에 주저앉아 소주병째 나발을 불곤 했다. 해질 녘 벌겋게 술이 오르자 나는 가슴속에서부터 스멀대던 몹쓸 년, 몹쓸 년을 급기야 큰소리로 토해버리고 말았다. 그 날 이후 겨우 돌 지난 딸아이가 안쓰럽게 울어 재낄 때마다, 후두암 때문에 수술하고 나서 말을 못하는 아버지가 아이를 업고 포대기를 둘러 맬 때마다 벌컥벌컥 괜한 술만 들이켰다. 숙자는 이후부터 자식을 버리고 도망간 못된 여편네였다. 몇 마지기 안 되는 남의 땅 부쳐 먹는 일은 입안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울 때가 부지기수였으니, 가난한 소작농의 아내가 싫어서, 혹은 다른 사내와 눈이 맞아서 집을 나간 여편네를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다짐했다. 이젠 숙자가 찾아와 무릎을 꿇고 사정을 해도 내쳐버리리라 이를 악물고 다짐했다. 밤새 마신 술 때문에 한 낮이 다 되어서야 게으르게 일어나,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집을 나섰다. 하늘이고 땅이고 공기고 온통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소주병을 꺼내 병째 마셨다. 연초록으로 펼쳐진 논 가운데 길게 이어진 신작로가 눈부셨다. 그 위를 달렸다. 갑자기 내 눈꺼풀이 푸르스름하게 닫혔다가 다시 시나브로 밝아지는 즈음, 그만 논바닥에 고꾸라져 버렸다. 내 앞에 큰 산 하나가 짐승처럼 와락 덮쳐온 것 같은 찰나가 기억될 뿐이었다. 사흘 후 중환자실에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난 다음, 중학교 동창 병국에게서 들었다. 달리던 내 오토바이가 덤프트럭과 정면충돌했다고. 그 해, 벼꽃을 마지막으로 보고 나는 더 이상 논에 나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 가을, 추수도 하지 못한 논은 다른 소작농에게 넘겨 줄 수밖에 없었다. 허리 아래는 몸뚱이 꼴만 갖추었을 뿐 영락없는 통나무 신세가 되었다. 울화가 치밀어도 나는 더 이상 술도 마시지 못한 채 꼼짝없이 누워 지내야 했다. 딸 연지가 점점 커 가는 동안 내 등짝과 엉덩이는 점점 썩어가고 있었다. 병약한 아버지가 커다란 통나무가 되어 누워 있는 커다란 아들의 몸뚱이를 자주 앞뒤로 바꾸어가며 누이기란 어려운 일이다. 

라면 상자만한 창문 밖으로 느릿느릿 자전거를 끌고 구부정한 아버지가 현관 앞 언덕을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전거 핸들에는 장거리에서 사왔을 두부나 콩나물 따위 찬거리가 담긴 검은 비닐봉지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나의 창문 밖 풍경 안에서, 집 앞 비탈은 몇 년 사이 훨씬 더 가파라졌다. 더구나 가난하기 짝이 없는 저 검은 비닐봉지의 흔들림은 감각 없던 다리를 퉁퉁 쳐대며 '아파봐라, 아파봐라.'하며 요사를 떨었다.
 
저녁때가 다 되어 가는데 연지가 아직 안 돌아왔다. 아까 학교 수업이 끝나고 책가방을 현관문으로 슬쩍 던져놓고는 미끄러지듯 언덕을 달음박질쳐 내려가던 딸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해지기 전에 오라고 소리쳤었다. 어느새 부엌에서 아버지의 둔탁하고 불규칙한 도마질 소리가 된장찌개 냄새에 묻어 집안에 가득하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아이들이 제각기 집으로 향하고, 콩대를 가득 실은 이장의 경운기가 탈탈 집 앞 골목을 빠져나가자 쭈쭈바를 입에 문 연지가 비탈을 오르고 있었다. 숙제도 안 하고 나간 딸에게 괜스레 화가 나 읽던 시집을 침대 아래로 던져 버렸다.  연지가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폴짝폴짝 고무줄놀이를 하거나 어느 집 양지바른 장독대 앞에서 제 또래 계집아이들과 어울려 소꿉놀이하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이웃 사람들의 말을 전해 들어, 연지가 제 또래들과 잘 어울리며 활달한 아이라고 해 그렇게 가늠할 뿐이다. 

"아버지, 나 피아노 학원 좀 보내 줘. 다른 애들 모두 피아노 배운다. 나도 피아노 치고 싶다. 피아노는 안 사도 돼. 학원에 다 있으니까."

숙제 안 한 것을 나무라기도 전에 연지는, 현관에 들어서 신발도 벗기 전에 혀 짧은 애기 소리를 내며 졸랐다. 아홉 살짜리 딸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피아노를 가르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학교 잘 다니고 어디 가서도 깔끔한 여자아이로 비춰지기만을 바라고 지냈다. 물론 요즘 아이들은 모두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는 것, 컴퓨터를 할 줄 알고 영어도 배운다는 것을 이렇게 저렇게 들어 알고 있긴 하다.  그렇긴 해도 우리 가정의 매월 기초생활보조금과 장애인 보조금을 따져 보아도 아이에게 학원을 보낼 여유는 빠듯하다. 한 동안 시무룩해 있던 딸아이는 아무 대꾸 없이 창밖만 응시하고 있는 제 아비의 속을 눈치 챘는지 부엌에서 밥상을 차리는 할아버지를 도와 수저를 챙기고, 냉장고에서 김치 통을 꺼내 김치를 그릇에 담았다.
"밥 먹고 숙제하고 씻고 일찍 자야지."
연지는 밥상을 들고 들어오는 할아버지 뒤에서 쉬지 않고 쫑알대었다. 제가 한 피아노 얘기에 한동안 무거웠던 분위기를 무마하려는 듯 제 딴엔 잰 눈치를 발휘했다. 그런 아이의 맹랑한 눈치에 나는 당해내지 못하곤 한다. 더구나 내가 끙하는 소리를 내거나 두어 번 바투기침을 하면 아이는 숙제를 하거나 텔레비전에 빠져 있다가도 알아서 물을 가져다주고, 적당한 시간 간격을 알아차려 침대의 높낮이를 조절하고 침대 밑에 놓인 쓰레기통을 비우곤 했다. 그런 아이의 손놀림은 매우 익숙하고 재서 아홉 살이라는 나이를 떠올리면 아비가 되어 안쓰러워지는 것이 어쩔 수 없다.

"연지야, 피아노 해라. 내일 가서 한다고 해."
"응."

아이는 신이 나서 서둘러 밥을 먹고, 내일 학교 갈 책가방을 미리 싸놓고 방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했다. 방 한쪽 구석에 아이가 벗어 놓은 발바닥이 까만 양말 옆에 과자처럼 납작하게 말라 죽어버린 작은 청개구리 한 마리가 보였다. 나는 연지에게 방 좀 한번 빗자루로 쓸어라 하려다 그만 두었다.


시골에서 물려받은 한 마지기 땅도 없이 가난한 농가에서 자란 노총각으로 잡다한 일용직이나 소작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다보면 결혼이란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었다. 동창 중에는 사십이 넘은 노총각이 흔했지만, 그래도 그들의 대부분은 나보다 처지가 나아 부모에게 물려받은 적잖은 농지가 있는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한 해 농사를 짓고 추수를 마치고 나면 제법 지갑이 두툼해져서 거친 자갈길에도 끄떡없는 지프차를 몰고 다니며 간혹 맞선자리에 나갔다가 도회지 아가씨들과 서너 번 정도 데이트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데이트란 남자 쪽의 일방적인 공세에 지나지 않았고, 제대로 결혼에 이르는 경우는 드물었다. 몇몇은 마을 다방에서 일하던 여자들과 결혼한 친구들이 있으나,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느라 한 곳에 머물기가 쉽지 않았는지 그녀들은 결혼 이년 여를 못 버티고 집을 나가버리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누구네 아들 결혼이 있다고 하면, 결혼식장을 찾은 하객들 몇몇은 불안한 낯으로 자기들끼리 쯧쯧 혀를 차며 생기지도 않은 문제를 염려해 입방정을 떨었다.

"오래 못 가지. 얼마나 붙어 있겠어? 애라도 낳고 내뺀지면 그걸 안쓰러워 어찌  봐. 또 알아? 명식이 처 만양 시부모 잘 모셔가며 오래오래 살지? 믿어 보자고. 요즘은 저기 물 건너 온 외국 처자들도 많드만, 차라리 그쪽이 낫지 않아?" 

안타깝게도 그들의 말은 씨가 되는 경우가 있어, 아이를 하나둘 낳고 날개 달린 선녀 옷을 찾아 입은 선녀인 양 색시가 안 보이곤 했다. 그리고 돌도 안 된 갓난아기를 맡아 키우는 것은 모두 남겨진 노부모의 몫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작은 면의 아이들 중에는 엄마 없는 아이들이 유난히 많다.
 
숙자는 달랐다. 숙자는 다방이나 술집에서 만난 여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선을 봐서 만난 것도 아니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인력 사무실의 연락도 없어, 나는 집안에서 빈둥대거나 경철이의 비디오 가게를 대신 봐 주곤 했다. 숙자를 만난 것은 경철의 비디오 가게에 앉아 한가하게 성룡의 영화를 보고 있던 오후였다. 망가진 비디오테이프를 들고 난감해 어쩔 줄 모르고 들어선 숙자는 다짜고짜 죄송하다는 말부터 했다.

"죄송해요. 제 비디오가 망가졌는지 그만 테이프가 이렇게 엉망이 되어버렸어요. 중간에 걸려서 안 나오길래 힘껏 당겼는데 그냥 뚝 끊어져 버렸지 뭐예요? 어떡하죠? 잇는다고 해도 잘 안 나올 것 같은데... 물어 드릴게요. 얼마 정도나 할까요?"

최신프로 라는 라벨이 붙어 있던 그 테이프는 이미 손을 써보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져 버린 상태였다. 숙자는 경철이보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내가 가게 주인인 줄 알았고, 드라이버로 진지하게 테이프를 분해해 이것저것 살펴보는 나를 보고 꽤나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냥 두고 가세요. 반품하죠 뭐."

반품이 가능한 것인지, 수리가 가능한 것인지 확신이 없었지만, 경철이가 없는 사이 나는 너그러운 주인 행세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숙자에 대한 호감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비디오를 보다 보면 누구나 한두 번 정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는 평범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녀는 나의 호의에 몇 차례나 고맙다는 말을 하고 가게를 나섰다. 잠시 후 유리문 밖 거센 빗줄기 속에서 그녀의 연두색 우산이 연신‘고마워요’하며 종종 걸음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그 여린 음성과 수줍은 미소를 나는 오래도록 붙잡고 있었다.


숙자를 다시 본 것은 일주일쯤 지나서 우체국에서였다. 인력 사무실 연결로 우체국 건물 앞 깨진 아스팔트 도로를 보수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한참 일을 하다 잠시 그늘에서 담배 한 대를 피우는데 우연히 우체국 유리문을 통해 유니폼을 입고 앉아 소포를 정리하고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얼른 먼지투성이인 차림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그녀에게 인사했다. 다행히 그녀는 나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책상 위에 있던 캔 커피를 건네며 다시 한번 지난 일을 고마워했다.

그 다음날부터 나는 일을 마치고 집에 가기 전에 우체국에 들러 잠깐씩 숙자를 보고 나오곤 했고, 얼마 후 휴일이 되자 함께 가까운 유원지를 산책했다. 산책하는 내내 숙자는 영화 이야기를 했다. 비비언 리의 '애수', 나탈리우드의 '초원의 빛' 같은 옛날 영화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나 남자 배우는 톰 행크스나 짐 캐리 같은 유쾌한 타입이 좋다고 말했다. 나는 정작 그 배우들의 얼굴을 잘 몰랐다. 나는 나중에 경철이 가게에서 그 배우들의 영화를 죄다 빌려다 보았다. 드디어 숙자가 보고 싶어 하던 영화가 개봉하던 날, 표를 예매해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읍내 극장 앞에서 기다리다가, 나는 문득 영화나 드라마처럼 장미꽃 한 다발을 급히 사서 숙자에게 고백할 말들을 떠올렸다. '결혼해 주세요.', '내 반려자가 되어 주시오.'… 숙자가 저만치 걸어오는 것이 보이자, 나는 정말 두근두근한 마음에 아직 때가 아니면 어쩌나, 그만 숙자가 등을 돌려 가버리면 어쩌나 불안해했었다. "와! 꽃이네. 아저씨, 저 주는 거예요?" 숙자의 해맑은 웃음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꽃을 건네주었다. 극장 안에서 영화가 막 시작할 즈음에야 나는 불쑥 숙자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조급함에, "결혼하자."하고 숙자의 귀에 대고 또렷하게 말했다. 숙자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나는 숙자의 대답을 기다리느라 꼴깍꼴깍 숙자의 숨소리까지 예민하게 귀 기울이느라 영화의 줄거리는 드문드문 기억할 뿐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우루루 출구로 사람들이 몰리며 줄을 서서 상영관을 나설 즈음, 숙자는 "해요. 결혼. 아저씨."하고 말했다.
 
   그러나 너의 얼굴은/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 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번개처럼/금이 간 너의 얼굴은         (김수영, <사랑> 중에서)
 
나이 차이가 열네 살이나 나는 숙자와 결혼하는 문제를 반대하는 사람은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나를 아는 이웃 사람들과 친구들의 부러움 뒤에는 물론 나보다 한참 어린 숙자에 대한 적잖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숙자는 고등학교 때, 화재로 부모님을 여의고 고모네, 삼촌네를 전전하며 자랐고, 몇 해 전 우체국에 취직해 들어가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하고 있는 터였다. 그런 숙자가 선뜻 가난한 소작인의 아내가 되겠다고 한다니 이 얼마나 감지덕지한 일이 아니겠는가.

결혼 후 숙자는, 아침 일찍 일어나 먼저 아버지가 세수하실 물을 한 솥 가득 데우고, 두어 줌 불려 둔 검은콩을 넣어 쌀을 씻어 밥을 지었다. 정작 자신은 세수도 하지 않은 채 눈을 부비고 하품을 하며 부엌에서 부스럭부스럭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숙자를 열려진 문틈으로 보며, 나는 이뻐 죽겠어 하는 낯으로 해죽해죽 해지곤 했다. 화장도 잘 하지 않고 그 흔한 퍼머를 한다고 미용실도 가지 않았고, 제 또래 젊은 여자들끼리 몰려다니며 노래방을 가거나 수다를 떨며 고스톱을 치려 다니지도 않는 착하고 순박한 여자였다. 여러 모로 나의 색시는 다른 색시들과 달랐다.
 
쉐쉐하는 거친 숨소리가 이어지다가 힘들게 몇 차례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버지는 그제서야 편한 잠을 채비하며 일어나 천정에 매달린 형광등 줄을 당겨 불을 껐다. 나는 침대 위에서 시집을 보다가 갑자기 꺼진 형광등의 잔류 전기가 희뿌옇게 깜박이는 사이사이 끼어드는 생각들을 쉽게 놓지 못했다. 어스름 속에서 깡마른 시인의 까만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다가 펼쳐 봐, 내 속인가 네 속인가 펼쳐봐 하며 노래인 양 푸념인 양 중얼대었다. 
 
 죽음이 오더라도 / 이제 성을 내지 않는 법을 배워주마 (김수영, <여편네의 방에 와서> 중에서)
 
 중얼대는 그의 노래, 네 푸념 위에 케케묵은 옛 기억들이 얹어지며 형광등의 미세한 빛이 완전히 사라지고도 어둠 속에 잡힌 그 기억들은 한참 서너 시간은 더 머물고 있었다.
 
잠자리에서 숙자가 적극적으로 나를 원한 기억은 별로 없다. 숙자는 가슴팍을 더듬더듬 하는 크고 거친 내 손에 간혹 진저리를 치며 돌아눕기도 했다. 어스름 속에 하얀 몸뚱이를 돌려 누이고 나 혼자 달아올라 일을 치르고 나면, 숙자는 서둘러 일어나 부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한 겨울에도 몇 차례씩 물을 끼얹으며 씻고 또 씻었다. 쫙쫙 끼얹는 찬물은 그녀의 몸뚱이만이 아니었다. 나의 가슴까지 시리도록 차갑게 쏟아지는 그것에 한참 민망한 채로 눈을 감지 못하곤 했다. 그래도 나는 그저 앳되고 참한 숙자 덕에 마을에서 복 많은 서방으로 대접받았고, 아버지 역시 늘그막에 복 많은 시아버지가 되어 노인정에서도 내내 싱글벙글해, 며느리가 해다 주는 김치전이며, 찐 고구마로 그들에게 생색을 낼 수 있었다.
 
욕창 때문에 살 썩는 냄새는 고약하게도 딸아이에게까지 배어났다. 아이에게서 나의 몹쓸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안 것은 며칠 되지 않았다. 피아노 학원을 다녀온 첫날, 아이는 책가방과 피아노 가방을 내려놓기 무섭게 훌훌 옷을 벗었다.

"선생님이 내일 목욕하고 오래. 아빠! 나한테서 냄새 나?"

그랬다. 아이에게서는 익숙한 그 오래된 냄새가 치렁치렁 늘어진 거미줄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래서인가, 큰 거리 교회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반찬을 갖다 주러 오는 진이 엄마, 아니 정 집사는 집안을 한 번씩 둘러보며 갈 때마다 코를 큼큼거리다 연지의 옷가지와 내 옷들을 분리해 세탁기에 넣어 빨아 널어 주었고, 간혹 연지를 목욕탕에 데리고 가 말갛게 씻겨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한 이틀 정도는 연지에게서도 달디 단 비누 냄새와 상큼한 로션 냄새가 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향기는 오래가지 않아 나의 고약한 냄새에 견디지 못해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았다.
 

상기 씨는 오늘따라 오래도록 상처를 소독하고 살폈다.
"시집 어때요? 좋죠?"
"모르겠수다. 하나도 뭔 소린지... 더러 알아들을 만한 소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좀체 어려워서."
"다른 시집도 드릴게요. 자꾸 읽다 보면 별 것 아녜요. 다 사람 마음 담은 건데요, 뭐."
"한자 공부나 하게, 천자문 책이나 사다 주구려. 국어사전이랑. 뜻을 알아야 해먹지. 가방 끈이 짧아 영 자존심이 상합디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내 말하는 본새다 보니, 상기 씨 역시 만만찮게 농을 섞어 은근슬쩍 나를 놀리기도 했다.
"이제 철 좀 드시네. 좋아요. 배우려는 자세, 점점 맘에 드네! 아저씨 우리 초등학생 아들 녀석 한자공부 책이면 되죠? 헤헤... 내가 선물하죠. 국어사전은 오늘 당장 갖다 드릴게요."

초저녁 불그스레한 마을 입구, 폭이 좁고 군데군데 금이 간 콘크리트 다리 앞에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앉아 있다. 잠시 후 승합차 한 대가 와서 십여 명의 할머니들을 태우고 사라졌다. 읍내 터미널 앞 사거리 큰 건물에서, 일주일 넘게 서울에서 온 약장수가 이런저런 경품을 나눠주며 시골 노인네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도 언젠가 화장지 한 다발을 들고 들어와 뿌듯해 한 적이 있었다.

약아빠진 그들의 상술과 어수룩한 노인네 때문에 영 못마땅해 하는 나에게 상기 씨는 달래듯 말했다.
"어르신들 주머닛돈으로 약 좀 팔 요량인가 봐요. 약값이 만만치 않다고 하던데... 소일 삼아 재미로 가시는 거니, 이렇다 하게 소일거리를 찾아드리지 못하는 입장에서 나무라기만 할 일도 아닌 듯하고..."

매사가 긍정적인 상기 씨의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부아가 나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우리 노인네도 쓸 데 없이 몰려 다니길래, 한마디 했죠. 빈 주머니로 가 앉아 있다가 괜히 덤터기 안 쓰려면 화장지 한쪽도 집안에 들이지 말라고. 사기꾼들인 거 빤히 알면서 앉아 있는 것하며..." 
 
딸아이의 이름을 연지라고 지은 것은 숙자였다. 숙자는 임신 사실을 처음 안 후 열 달 내내 뱃속의 아이를 연지라고 불렀고, 아버지나 나는 아이가 태어나 출생신고를 할 때, 이연지라고 올리는 것을 당연히 여기게 되었다.

출산 후 숙자는 아기에게 모유를 먹였다. 아기 옆에 누워 때때로 젖을 물리다 잠이 들곤 하던 숙자는 젖가슴을 들어낸 채 잠들기 마련이었다. 고단한 아기 보기 탓에 우리의 아침 식사는 늦어졌고, 아버지와 나는 손수 이른 아침을 차려 먹고 일찍부터 각자 논이나 밭에 나가거나, 일이 없을 때 아버지는 제일 먼저 나가 노인정 문을 열었다. 숙자가 잠옷 바람에 아무렇게나 질끈 머리를 동여매고, 김치만 차려 놓은 밥상 앞에 앉는 시간은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아이가 생기면서 기저귀며, 때 맞춰 먹일 이유식이니 하는 먹거리 등을 위해 나는 더 많은 돈을 벌어야했지만, 주머니에 들어오는 것이란 턱없이 모자라, 아버지의 장애인 보조금까지 고스란히 생활비에 써버리기가 허다했다.

모내기도 막 끝나고 사람들은 저마다 한숨 돌릴 겸 나이든 어르신들을 모아 여기저기 여행을 보내드린다고 떠들썩했고, 젊은 사람들도 잦은 모임을 만들어 잠시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고 싶어 안달이 나 있기도 했다. 그러나 처지가 다른 우리 같은 이들은 그 짬을 여유 있게 보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오히려 발 빠르게 인력사무실에 연락해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한 번도 크게 제 목소리를 높인 적 없던 숙자가 달라진 건 아이가 돌이 채 안 된 그 즈음부터였다. 농사일 대신 인력사무실을 통해 읍사무소 담장 보수 일을 하고 저녁 늦게 돌아왔을 때, 숙자는 파마를 하고 짙은 화장을 한 얼굴로 영화 비디오에 푹 빠져 있었다. 그리고 전에 없이 향수 냄새까지 풍기고 있었다. 저녁상을 차리는 그녀의 등 뒤에서 나는 내내 낯설어 어색한 낯이었다. 아버지 역시 불편해 하긴 마찬가지여서 대충 저녁을 먹은 뒤 슬며시 나가 밤 열두시가 다 되어서야 들어왔다. 여자가 미장원에서 파마를 하는 것이 무슨 특별한 일인가 하겠지만, 숙자가 파마를 했다는 사실보다 더 불편했던 것은 무슨 결연한 의지를 품은 듯한 낯선 눈빛과 단단하게 닫힌 그 붉은 입술 때문이었다. 평소 화장도 좀 하고 가꾸어 보라고 말한 것은 나였기에 그녀의 화려해진 외모에 대해 딱히 탓할 입장이 못 되는 처지라 나는 조심스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가 불길해지기까지 했다.

공치는 비 오는 날이었다. 나는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 세수도 안 하고 먼저 텔레비전을 틀었다.
"아버지는 아침부터 허리가 아프다며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어요. 점심 좀 챙겨 드리세요. 보건소에 연지 예방접종 좀 하고 올 게요."

이가 맞지 않는 아버지의 방문 틈새로 바튼 기침소리가 자주 들렸다. 숙자는 포대기에 싼 아기를 안고 우산을 찾아 들고 현관을 나서며 말했다.

누워 있는 아버지는 아프다는 말도 못한 채 고개만 저어 식사를 마다했다. 혼자 아침 겸 점심을 챙겨 먹고 치우고, 간혹 또 잠들다 깨곤 했다. 방안에 들여놓은 건조대에서 걷어 둔 아기 기저귀도 차곡차곡 개어 놓고, 아픈 아버지를 위해 죽을 쑤어 드리고 나도록, 저녁에 하는 드라마가 시작하도록 숙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부엌과 현관을 들락거리며 벌컥벌컥 냉수를 마셔댔다. 나는 내 입으로 숙자가 집을 나간 것 같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당신 며느리는 다르다고 말하지 못했다. 숙자도, 숙자가 안고 나간 연지도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주인공 여자와 남자가 버스에서 만나는 장면이 나오자 보건소에서 전화가 왔다. 아기를 찾아 가라고. 보건소에 혼자 남겨진 이연지 아기를 찾아가라고. 잠시 다녀온다고 나간 아기 엄마가 안 와서 할 수 없이 연락한다고. 드라마 주인공 여자의 눈물 가득한 얼굴이 화면 가득 잡힐 때,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일어났다. 잠시 다녀오다니 어딜? 무슨 사고라도 난 것인가? 손바닥 만한 지역에서 사고가 나면 바로 연락이 올 테지? 애를 얼마 동안 방치해 둔 것이란 말인가? 정말 잠깐 볼 일이 있어 나갔는데 사정이 생긴 것일 수도 있다.

숙자의 그 사정이란 길기도 해 어느새 팔 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상기 씨가 갖다 준 천자문 책은 진짜 활자도 크고 획순도 한눈에 알아보기 좋게 되어 있어 한자 한자 따라 쓰고 익히기가 매우 쉬었다. 그리고 그는 국어사전과 함께 다른 시집 두 권, 소설책 두 권, 그리고 자그마한 성경책 한 권을 내 머리맡에 가지런히 쌓아놓으며 말했다.

"시집만 보지 말고 소설도 보세요. 제가 읽은 책인데 문장도 쉽고 내용도 재미있어요. 소설가가 여자인데...봐요, 인상도 좋죠? 이 사람의 다른 작품이 저한테 있으니 얼마든지 빌려 드리죠. 다시 말하지만 이후로는 그냥 드리는 게 아니고 빌려 드리는 겁니다. 아, 성경책도 두고 갈게요. 이건 그냥 드리는 거니까 아저씨 거예요. 하하...언제든 내키는 대로 펴 보세요."
 
   믿음대로 될 지어다 그가 말하고 / 믿음대로 그가 걸었다 / 믿음대로 될 지어다 그가 듣고 /
    믿음대로 그가 눈을 떴다 / 믿음대로 될 지어다 그가 믿고 / 믿음대로 죽었다가 살아났다 //
 과연 그럴까 그가 말하고 / 의심대로 그는 물에 빠졌다 / 과연 그럴까 그가 듣고 /
 의심대로 그는 버려졌다 /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가 믿지 못하고 / 의심대로 죽었다 영영 죽었다
 
상기 씨가 준 다른 시집을 펼쳐 보았다. 시인은 '삶의 방식'이라는 시에서 믿음이란 것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고 하는데, 믿음이란 것이 누구를 상대로 하느냐에 따라 오히려 믿었다가 죽을 수도, 안 믿어 살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믿고 있는가. 내게 믿음이란 것이 있는가. 어느 것도 믿지 못하는 나는 늘 눈이 먼 채로, 늘 세상에 제대로 발 한번 디뎌보지도 못한 채로, 결국 삶의 바다 한가운데서 침몰해버릴 것인가. 나는 살 수 있는가, 내 의심은 온당한 것이긴 한 것일까.

상기 씨는 엉덩이 욕창을 소독하고 나서 서너 번 찰싹찰싹 내 엉덩이를 때렸다. 그의 손길은 소리로만 전달될 뿐 무감각한 살덩이는 이제 더 이상 민망함도 모른 채 푹 퍼진 반죽 같기만 했다. 나는 어느새 이 사내를 믿고 있는가 보다. 병색이 한결 더 짙어진 아버지가 음식물 넘기는 일조차 버거워하는 것을 보며, 언제까지 이렇게 누워서 나는 과연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까. 막막해질 때마다 가슴에 탁 얹히는 것은 연지, 나의 어린 딸이었다. 그런 딸을 나는 은근히 상기 씨에게 부탁하고 싶었다. 제 아버지처럼 잘 따르는 연지나 자상하게 아이들과 짓궂은 장난도 해가며 스스럼없는 상기 씨의 성격과 무던한 그의 아내를 보며 내심 속뜻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믿음대로 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그와 연지의 미래를 믿을 만도 할 것이다. 상기 씨가 현관을 나서려 하자 아버지가 숨이 턱에 차 그렁그렁하며 들어서 금방 캔 감자가 담긴 자루를 상기 씨에게 건넸다. 상기 씨는 자루를 잠시 내려놓고, 채 떨어내지 못한 흙이 묻은 아버지의 두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어르신, 잘 먹을게요. 아이고, 힘드시겠다. 얼른 들어가 쉬세요. 집사람이 무척 고마워할 거예요." 상기 씨, 그의 음성이 문득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보다 더 따스하게 와 닿았다.
 
창밖, 다리를 허옇게 드러낸 채 스쿠터를 타고 커피를 나르는 다방 아가씨가 지나갔다. 제법 날씨가 차가워져 성급한 사람들은 두툼한 점퍼를 챙겨 입고 다니는 요즘인데 허연 다리 아가씨는 추위도 모르는 듯 사계절 내내 저런 차림이었다. 뒤에서 빵빵대는 지프차 사내는 차창으로 손을 내밀며 허연 다리 아가씨에게 아는 채를 했다. 허연 다리 아가씨가 "오빠, 안녕!"하며 호들갑을 떨며 속도를 내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나의 네모난 시야 폭에서 사라지자, 정지된 마을 풍경이 길게 이어졌다. 나는 이 정지된 풍경이 싫었다. 누군가 저 풍경 속으로 들어서 주길 바라며 한나절 내 창밖에 둔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아직 학교 수업이 끝나지 않은 시간이라 집으로 향하는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고, 간혹 낡은 유모차를 밀며 느릿느릿 구부정한 걸음을 걷는 할머니 하나 겨우 지나칠 뿐이었다. 할머니의 뒷모습이 아스라이 흐려지며 나는 살며시 잠이 들었다.
 
깜박 든 잠에서 깬 것은 병국이 과자가 잔뜩 든 봉지를 들고 들어서면서였다. 어제 동창회가 있었다는데, 가끔 들르는 병국이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얼굴 좋네? 아버님은 노인정 가신 모양이네?"
물려받은 땅으로 제법 많은 농사를 지어 어느새 마을 유지 대접을 받는 병국은 내년의 유력한 이장감이기도 하다. 그의 시원시원한 말투와 사려 깊게 이곳저곳 챙기는 것이 좋아 그가 가끔 이렇게 들렀다 가는 것이 반갑기만 했다.

"동창회에는 많이 참석들 했어?"
대답 대신 먼저 껄껄 호탕한 웃음을 내뱉고 나서 병국은 잠시 침묵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의 안색을 살필 쯤 그가 말했다.

"너 놀라지 마라. 너 위해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언젠가 누군가에게 듣고 놀라는 것보다 낫지 싶어 내가 말한다. 경철이 서울 간 거 알지?"

비디오 가게를 해 제법 큰돈을 벌어 권리금까지 크게 얹어 가게를 넘기고 아버지 도움으로 서울서 큰 식당을 차렸다는 경철이 소식은 이미 두 해 전에 들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경철이가 서울 갈 때 여자가 있었다더라. 서울서 식당도 잘 돼 동창 몇몇이 가봤는데 거기 연지 엄마가 있다고 하더라고. 경철이랑 함께 산단다. 경철이 부모님도 몰랐나 보더라. 녀석 결혼도 안 하고 용케 사업만 잘 하나 했더니..." 

이 몹쓸 사실을 지금 병국한테 듣는 것이 나은 건지, 내내 모르고 있는 것이 나은 건지 나는 좀체 머릿속이 하얘져 잠시 도리질을 하다가 순간 허리 아래까지 온통 욱신거리는 듯했다. 하, 그랬다. 숙자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살아 있었다. 경철의 여자가 되었다는 말보다 숙자의 주검을 찾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오히려 나았을까. 병국은 이런저런 친구들 소식을 더 전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의 안색을 살피다가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병국의 뒷모습이 사라진 문지방에 눈을 둔 채 옴짝하지 못했다.

예방접종을 한답시고 제 자식을 보건소에 내버리고 갈 만큼 숙자에게 경철은 대단한 존재였다. 숙자는 말할까. '나는 영화를 원래 좋아하잖아요. 경철 씨는 저랑 많이 통해요. 당신에게 너무 많은 것이 부족하고, 경철 씨는 부족한 것을 더 많이 채워줄 수 있어요.' 숙자가 이렇게 말하면, '당신보다 그와 사는 편이 내 미래를 위해 낫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은...당신은 가진 것이 너무 없어요.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가난이 무서워요.' 이렇게 말하면 나는 벌떡 일어나 숙자의 따귀를 때릴 수 있을까. 숙자가 이렇게 말하면, '나는 당신보다 경철 씨를 더 사랑해요. 원래 처음부터 그랬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이렇게 말하면 나는 경철에게 당장 달려가 멱살을 잡고 피 터지게 그 놈을 두들겨 패줄 수 있을까.
 
아버지는 새벽부터 커튼이며, 연지 이불, 나의 침대 커버까지 벗겨내 하루 종일 빨래를 했다. 그리고 구석구석 걸레질을 해가며 집안 청소를 하느라 분주했다. 집안일을 하는 아버지의 부지런함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갑작스레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영 못마땅해 나는 연신 아버지를 나무랐다. 더구나 이불 빨래는 상기 씨 아내가 간혹 들러 해주곤 하기 때문에 노인네의 유난스러움이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나의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당신의 귀를 닫아 둔 채였다. 나는 혹시나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숙자 얘기를 들은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미 떠난 사람, 경철이든 그 누구든 젊은 여자가 임자를 만난 것이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일이 아닌가.'하고 아버지에게 말할 뻔했다. 아니, 어쩌면 아버지는 더이상 제 며느리 기다리기를 하지 않게 되어 홀가분해졌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조용한 우리 부자를 두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버지든 아들이든 그토록 무심할 수 있는 것도 세월 탓 아니겠는가, 오랫동안 세상과 단절되어 서너 평 방안에 고립되어 있는 동안, 어느 경우에도 꿈쩍하지 않을 만큼 무뎌진 감정 탓이라고.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리고 어쩌면 그럴 수조차 없는 처지라고 혀를 찰는지도 모른다.

연지가 현관에 들어서며 피아노 학원 가방을 내려놓고, 친구네 간다며 마당에 세워둔 자전거를 타고 시원스레 비탈을 달려 내려갔다. 어느새 많이 자란 아이의 다리는 두 개의 자그마한 바퀴 위에서 커다랗게 삐죽 삐죽 대었다. 덩치에 비해 이제 많이 작아 보이는 자전거. 창고에 넣어둔 오래된 내 자전거를 손봐서 연지에게 물려주어야 할 텐데. 내일 상기 씨에게 부탁해야 할 듯하다.
 
저녁 늦도록 아버지는 저녁상을 차리지도 않고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연지는 배가 고프다면서 할아버지를 흔들어 깨우다가 소리쳤다.

"아빠, 할아버지가 숨을 안 쉬어!"
아버지가 죽었다. 연지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설핏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파랗게 질린 낯으로 일어서서 주름지고 깡마른 주검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할아버지가 죽었다. 아버지가 죽었다.

상기 씨와 그가 다니는 교회 사람들이 도와 읍내 병원에서서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나는 겨우 벽에 기대어 앉아 상주 자리를 지켰다. 값비싼 상복은 엄두도 못 내고, 구겨진 양복 상의에 아래는 늘 입던 트레이닝복 바지 그대로였다. 연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왜 아이는 자신을 키워준 할아버지가 죽었는데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아이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는 무표정함으로 문상객들을 맞이했다. 나는 오히려 그런 강한 딸이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이는 제 어미 없이도 밝게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으니, 할아버지가 없어도 무엇이든 제 스스로 척척 잘 해낼 것이다. 아이는 나중에 병약한 아비가 없어도 어른이 될 것이며 제 품은 꿈 하나쯤을 키워낼 수 있을 것이다. 옛 시인의 말대로 연지의 믿음대로, 상기 씨의 믿음대로, 내 믿음과 죽은 내 아버지의 믿음대로 말이다.

더 이상의 조문객도 없이 새벽 한 시가 다 되었을 무렵, 상기 씨가 종이컵에 담긴 커피 한 잔을 건네며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양복 안주머니에서 꼬깃하게 접힌 종이를 꺼내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건넸다.

"아버님이 지난 주일에 직접 교회에 나오셔서 저에게 주신 거예요. 마음에 오랫동안 상처로 담아 두셨던 모양이에요. 참 오랜 동안 눈물로 기도하시더군요. 이제 아버님을 편히 보내드렸으면 좋겠어요."

상기 씨의 말이 영 뜬금없어 종이를 펼쳐 보기가 괜스레 부담스러워졌다. 연지의 줄 공책에서 뜯어냈을 종이 한 장에 씌어진 어설프고 못생긴 글씨들이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챙피하서서 쓰까마까하다가 씀니다. 연지어멈은 옌날에 내가 그양 내보내습니다. 연지 어멈이 경칠이비디오 경칠이하고 조아지내는 거를 나는 몃뻔 봤음니다. 그래서 어멈이 쥐기도록 미워서 내가 며뻔 벼르고벼르고 해슴니다. 연지 아를 보건소 주사 마친다고해 내가 가방에 미리 어멈 짐을 챙기서 보건소로 쫀자가서 가방주고 도망가번지라고 해슴니다. 그리고 내 아들 저리 사고 당해 꼼짝못하는 몸 맹들고나서야 후회해느데 어멈은 진짜로 집에 다시 오지 안습디다. 이제사 아들하고 연지에게 말하며는 얼마나 땅을 치고 나를 왼망하겟쏘. 내가 죄가 만쏘. 내가 저 세상 가 지옥불에 떨어지면 선생이 우리 아들에게 사실을 말해주소. 그 벌을 내 모두 받겠으니 너무 아파하지 말라고. 내가 교회 가 하나님께 기도하느건 내죄를 빌고 우리불쌍한 자식하고 손녀를 위해선니다. 하나님. 그래도 선생을 우리집에 보내주시고 고마운마음 큽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부끄럽꼬 몬난 할애비를 둔 불쌍한 우리 연지도 선생이 좀 잘 챙겨주소. 면목이 없소. 선생님 죄송하고 부끄롭소.”
 
아버지가 숙자를 내쫓았든 숙자가 스스로 집을 나갔든 이제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쨌든 숙자의 마음이 오래 전에 나를 떠나버린 것은 사실이니까. 그저 병든 노인네가 그 긴 세월 동안 말 못하고 앓았을 그 속이 얼마나 곪고 곪았을까가 더 마음 아플 뿐이다. 그의 가슴 속이 내 썩어가는 등과 엉덩이의 욕창처럼 진물렀을 것이 아닌가. 가여운 아버지를 내가 어떻게 원망하겠는가. 나는 아버지의 편지를 아버지의 영정 앞에서 태웠다. 못나고 불쌍한 글자들이 천천히 타들어가 검게 부서졌다. 상기 씨가 믿는 그 분께 내가 손을 내밀면 이즈음 내 마음에 패인 골을 한번쯤 쓸어 줄까, 묻고 싶었다. 나도 기도라는 걸 하고 나면 숙자를 용서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묻고 싶었다. 묻고 싶었다, 이 즈음 아버지는 평안하실까 하고. 나는 처음으로 길고 긴 기도를 했다.
 
팔 년 전, 오토바이를 타고 숙자를 찾아다니다가 그녀를 봤다는 누군가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숙자가 어떤 사내의 검정 지프차를 타더라고. 그게 얼핏 비디오가게 주인 같았는데 잘못 봤을 지도 모른다고. 나는 그때 말도 안 되는 그 소리를 귀담아두지도 않았었다. 터미널 매점에서 소주를 하나 사서 벌컥벌컥 물처럼 들이켜고 다른 한 병을 주머니에 넣고 나서 경철의 비디오 가게를 지나 우체국을 지나 뙤약볕에 달궈진 신작로를 달렸다. 눈부신 신작로 양쪽으로 펼쳐진 초록의 논들이 출렁거리기 시작할 때, 나는 오토바이 위에서 혼자 소리쳤다. "내년에는 저 논이 우리 논이 될 수 있는데. 저 논을 살 수 있는데, 숙자야, 얼른 와라. 우리 벼가 익어간다." 우리 읍에서 다른 읍내까지 몇 차례 돌고 나서 나는 논두렁에 주저앉아 남은 소주를 모두 마셔버렸다. 비칠대며 오토바이에 올라타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던져진 신발 한 짝처럼 논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질펀한 흙 속에 처박히고 나서 설핏 벼꽃을 보았다. 꽃인지 말라버린 진흙인지 모르겠는 그것. 숙자는 벼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숙자는 벼도 꽃을 피우긴 하겠지 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나는 대답했다. 꽃이 피니 벼이삭이 익지. 없는 듯해도 모두 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법이라고. 열매를 맺는 법이라고...
 
 먼 곳에서부터 / 먼 곳으로 / 다시 몸이 아프다 //
 조용한 봄에서부터 / 조용한 봄으로 / 다시 몸이 아프다 //
 여자에게서부터 / 여자에게로 //
 능금꽃으로부터 / 능금꽃으로...... //
 나도 모르는 사이에 / 내 몸이 아프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다리가 아프다. 숙자에게로부터 연지에게로 아버지로부터 벼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온몸이 아프다. 내가 품고 있던 시인의 시를 읊조리며 이제야 숙자를 완전히 놓아 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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