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기도

6월의 기도

[ 교계 ]

안홍철
1999년 06월 05일(토) 00:00

나라를 생각하는 달 6월. 국립묘지 탐방
관악산 기슭의 동작 능선이 병풍 치듯 3면을 감싸고 앞에는 한강이 굽이쳐 도는 동작동 국
립묘지(현충원)는 나라를 위하여 고귀한 생명을 바친 순국선열이 잠들어 있는 민족의 성역
이라고 불린다.

구한말 시대의 항일 의병을 비롯하여 조국의 광복을 위해 투쟁한 애국지사, 나라의 발전과
민족의 번영을 위해 평생을 바친 국가 유공자와 적의 침략에 의한 전쟁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투하다 장렬히 산화한 국군장병 등 16만 2천여 위의 순국선열이 이곳에 잠들
어 있다. 더욱이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정신으로 일제의 신사참배에 항거하다 옥사한 주기철
목사가 이곳 애국지사 묘역(충열대)에 잠들어 있다.

기자가 찾아간 날은 간간히 비가 뿌리는 흐린 날이었다. 현충문을 지나 무명 용사의 탑과
현충탑을 거쳐 이승만 전 대통령 묘소를 바라보며 우측으로 들어가니 충열대라는 묘역 안내
판이 보였다.

애국지사 묘역 '충열대’
충열대는 애국지사묘역, 임정요인묘역, 무후선열제단을 포괄하는 묘역이다. 이곳에는 구한말
의 의병을 위시하여 3.1운동 민족대표,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신명을 바친 순국선열 3백54여
위가 안치되어 있다. 특히 임정요인 묘역에는 임시정부의 총장급(현 장관급) 이상의 직분을
역임한 인사들을 안장하였으며, 무후선열제단에는 유해가 없는 분들을 위패로 봉안하고 있
다. 묘역 중앙에는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충열대 제단이 있다. 제단 전면 상단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휘호한 '민족의 얼’이란 글이 새겨져 있으며 제단 후면 상단에는 노산 이은상
시인의 헌시가 있다.

'조국과 겨레는 나의 사랑

나의 영광

나의 힘

나의 생명

그를 위해 짧은 인생을 바쳐

그와 함께

영원히 살리라’

짧은 싯귀지만 조국과 겨레와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해 생명을 바친 이들의 마음을 잘 나타내
고 있어 읽는 이의 마음을 촉촉하게 한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민족 자존을 내세웠던 주기철 목사가 안장되어 있는 애국지사 묘역은
애국지사 2백6위가 묻혀 있는 묘역이다. 이중에는 독립협회를 창설, 만민평등을 주장하고 전
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던 서재필 박사와 @한국통사’로 민족혼을 일깨웠고 임정
2대 대통령을 역임한 박은식, 관동창의 대장으로 13도 의병사령관이 되어 서울 탈환작전을
진두 지휘한 이인영, 일본군의 최신식 무기를 두려워 하지 않고 필마 단창으로 적진을 누빈
서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 1923년 1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한국인의 의기를 높이고
순국한 김상옥, 1905년 노령으로 건너가 안중근과 같이 1천여 명의 의병을 양성하였고 이등
박문 살해사건에 직접 참여하였던 우덕순 등이 있다.

주기철 목사는 1938년 친일단체인 평양기독교친목회가 개최한 시국강연회에서 도미타 목사
가 “신사참배는 성경적으로 죄가 되지 않는다”는 식의 강연을 하자 분연히 일어서서 “신
사에 절하는 것은 1계명과 2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항변하였고 이후 신사참배를 반대한
다는 이유로 남다른 고문과 수난을 겪다가 1940년 7월 10년형을 선고받고 다섯 번째 구속되
었고 결국은 이것이 마지막 길이 되었다. 주 목사는 일경의 잔혹한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점점 나빠져 1944년 4월 21일 오전 9시 해방을 1년여 남기고 옥중 순교를 했다.

한편 외국인으로서 대한민국에 공로가 현저하여 그 시신이 안장된 사람은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 등 3위가 있다.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영국계 캐나다 인으로서 1916년부터 연세대
교수로 재직 중 기미 독립선언이 있자 파고다 공원에서 한국인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시위
하는 광경을 촬영하여 국내외에 알리는 등의 활약으로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리기까지 하였
다.

"한국땅에 묻어달라”
스코필드 박사는 학생과 죄 없는 부녀자들까지 마구 잡아가는 일본 경찰을 보고 일본 경찰
국장을 방문하여 수많은 제자와 시민 등을 석방시키기도 하였으며 제암리교회 방화 학살사
건의 현장을 사진으로 찍어 국제적인 여론을 환기하는 등 음양으로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어
서 여러 차례 구속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다시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였고 @68년도에
는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으며 임종시에는 “생전에 정든 한국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
였다. 이에 따라 국무회의에서 박사의 유언을 존중하고 생전의 업적을 추모하며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하였다.

비가 개이자 노란 옷을 입은 유치원 학동들이 단체로 참배를 왔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나라를 지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묵념을 했다. 그리곤
“조용하라”는 선생님 말씀에 아랑곳도 하지 않고 이내 깔깔거리고 뛰어 다녔다. 학동들이
뛰어 다니는 오솔길엔 오래된 향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마치 “그래, 너희들이 이
렇게 자유롭고 편안할 수 있는 건 바로 이곳에 잠들어 계신 분들 때문이란다. 그 분들의 나
라 사랑을 잊지 말거라”하고 속삭이는 듯 했다. 비가 개이며 다시 파래지는 6월의 하늘을
바라보며 새 천년을 맞이하는 한국의 앞날도 푸르게 빛나기를 기도했다.
안홍철
hcahn@kidokongbo.com

국립묘지 현충원
국립묘지는 일제에 빼앗겼던 국권의 회복과 공산군의 침략으로부터 자유와 국가 번영을 위
하여 고귀한 생명을 바친 16만2천여 순국선열이 잠들어 있는 민족의 성역이다.

국군 창설이후 조국을 수호하다 산화한 국군의 유골은 서울 장충단 공원내의 사찰에 안치해
왔으며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이 발발하여 전장에서 전사한 시신은 국내 주요 사찰에 임시
로 안치했었다. 그러나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전사자가 증가하자 1955년 7월 이곳에 국군묘
지를 설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국립묘지는 1955년 7월 15일 국군묘지로 창설되어 군인과 군무원만을 안장하였으나, 10년후
인 1965년 3월 30일 국립묘지로 승격,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위시하여 국가유공자, 경찰,
예비군 등이 추가 안장되고 있으며 1979년 8월 29일 대전지역에 국립묘지를 창설했
다.

한편 1996년 6월 1일 "국립묘지관리소"라는 관리기관 명칭이 "국립현충원"으로 개명되었다.
안홍철 hcahn@kidokong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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