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멕시코 동포 찾기의 숨은 공로자

선교사, 멕시코 동포 찾기의 숨은 공로자

[ 땅끝편지 ] 멕시코 최남영 선교사편(7)

최남영 선교사
2024년 03월 05일(화) 16:24
티후아나의 한인 후손들.
유카탄 메리다 기념대회 모습.
멕시코 선교사로서 2005년은 가장 의미 있고 보람찬 한 해였다. 그 해, 멕시코 한인이민100주년 기념 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렸고, 100년동안 흩어져 살던 멕시코 한인 디아스포라(한인후예) 자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오랜 세월 속에, 이미 정체성까지 잊고 살던 이들은 모처럼 모국의 정과 한국인 자긍심을 함께 공감했던 자리였다. '에네깬(선인장)한국인'이라 불리던 멕시코 한인 이민자들의 애달프고도 자랑스런 흔적 찾기다. 백 년의 시간은 모든 게 잊혀질 만큼 기나긴 세월이다. 그런 망각의 세월들이 두 한국선교사의 피 땀어린 노력으로 어렴풋이 되살아났다. 유카탄 지역 조남환 선교사(감리교)와 티후아나의 이성균 선배 선교사다. 멕시코 초창기 한국선교사들로서 그 땅에 흩어진 한인 후예 흔적을 만나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였다. 조 선교사는 유카탄 선교 현장에서 한인 후예 가족들을 만나고, 도우면서 흩어진 이야기 조각들을 담기 시작했다. 그와 정반대 쪽, 티후아나에서도 이성균 선교사는 국경 근처에 흩어진 한인 후예들과 교제를 나누며 관심이 커져 갔다. 이성균 선교사는 97년도 안식년을 이용해 1년간 멕시코 전 지역을 돌며, 흩어진 한인 후예 찾기를 작정했다. 멕시코 사람 이름은 부모의 양쪽 성씨가 반드시 들어간다. 변형된 성씨도 있지만, 어느 도시든 두툼한 전화번호 책을 뒤지면 Kim씨, Lee씨, Park씨처럼 한국 성이 나오게 되어 있다. 전화로 물으면 거의 틀림없다. 그렇게 발로 뛰며, 만나서 사진을 찍고, 그들이 소중히 보관해오던 여러 자료들을 모아서 정리했다. 1998년 우리가 티후아나 선교센터에 합류해 공동 사역하는 동안, 한인후예 찾기로 선배 선교사가 손으로 쓴 메모, 깨알처럼 적어 둔 노트 기록들, 많은 사진들을 만났다. 그 분의 손작업 기록을 정리해서 컴퓨터로 작업해 두었다. 정말 뜻있는 협력 사역이었다. 함께 해서 더욱 뿌듯했다.

2000년대로 바뀌었고, 2005년 100주년 기념 행사에 대한 관심이 각계각층에서 커져갔다. 이 행사 준비의 숨은 공로자가 더 있다. LA에 거주하던 이자경 작가(한국인 멕시코 이민사, 1998)다. 이 작가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유카탄 조 선교사의 도움과 직접 발로 뛰며 후예가족들을 취재해서 완성한 분이다. 100주년 행사 준비를 앞두고 티후아나 선교센터에서 우리 가족과 함께 6개월을 함께 거주하며, 한인후예 자료기록들을 추가로 준비해서 보완하고 정리했다.

행사를 위해 대한민국 정부와 동포재단의 깊은 관심과 한국 대사관이 앞장서서 적극 홍보에 나섰다. 신문, 방송기자들이 몰려오고, 특히 MBC의 3부작 특집 '에네껜' 시리즈가 방송되면서 관심도가 최고조로 올랐다. 대한민국과 멕시코 양국 정부는 문화교류 차원으로 4개 도시(메리다, 멕시코시티, 과달라하라, 티후아나)에서 치뤄질 거창한 행사 진행 계획을 발표했다. 문화공연과 자료전시, 국제교류 심포지엄까지 다양한 행사 계획이다. 그와는 별개로, 100년전 이 땅에 흩어진 한인 후예들의 삶과 애환들이 조명되면서, 신문 방송사와 주최측에서는 역사적인 조사 자료, 전시를 위한 사진들을 요청해왔다. 두 분 선교사들이 각각 현장에서 오랫동안 직접 준비해서 보관해 온, 보물 같은 상당수의 자료들이 빛을 발하게 된 순간이다. 그런데,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번다는 말이 있던가? 공은 행사 주관자들의 몫이고, 선교사들의 숨은 공로와 수고, 노력은 과연 누가 알아주었을까? 이 지면을 통해서라도 밝힌다.

2005년 멕시코 한인이민100주년 기념행사는 성대했다. 멕시코 선교사로서 이 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첫번째 기념식이 열린 유카탄 메리다를 처음으로 직접 방문했다. 1905년 제물포항을 출발한 1033명이 긴 항해 끝에 첫 발을 딛고, 여러 농장으로 흩어진 도시다. 멕시코 지역 분위기와 사뭇 다른 모습에 놀랐다. 멕시코의 맨 남쪽 유카탄 반도는 고대 마야 문명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였다. 근처 팔랭케 마야 유적지는 마야 문명의 핵심인데, 유카탄에서 벨리스, 과테말라, 온두라스까지 광대한 도시형태를 만들었고, 이 당시 얼마나 크게 번성했는 지를 충분히 실감케 한다. 이런 다양한 마야 유적지와 커다란 피라미드가 유명 관광지 칸쿤 해변까지 곳곳에 산재해 있다. 지금도 마야인 후예들은 마야어를 쓰고,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해가려는 노력이 멕시코 본토와 달라 보이는 이유다. 참 신기한 것은 조선의 노동자들이 흩어진 농장 일터가 바로 이곳 유카탄 반도, 마야인 후손 땅과 일치하는 점이다. 마야인의 뿌리가 한국인이라는 좀 억지주장도 없지 않거니와, 마야인의 생김새가 서양인과 어울리지 않게 작달막한 동양인 모습이다. 100년전 한국인의 얼굴 모습을 생각해보라. 흡사하지 않은가. 그런 인연 때문이었을까. 당시 결혼 상대가 많지 않은 한인 이민자 중 마야인 처녀 총각을 만나 짝을 이룬 가정도 적지 않다. 100년 후 이들은 과연 어떻게 달라졌을까?



최남영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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