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 출산과 위급한 아내

쌍둥이 출산과 위급한 아내

[ 땅끝편지 ] 멕시코 최남영 선교사2

최남영 선교사
2024년 01월 24일(수) 09:27
멕시코 국경 앞에서 함께 한 부부.
거리의 악사들.
꿈 같은 과달라하라의 1년이 지나갔다. 그해 겨울은 추웠다. 106년만에 눈이 내렸다고 했다. 멕시코는 적도가 가까워 더울거라는 추측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위도상으로 멕시코 중부에 위치한 과달라하라, 멕시코시티와 같은 곳은 더운 게 맞지만, 큰 도시들 대부분 지형고도가 1500~2700미터로 높은 고지대라서 기온은 언제나 선선한 편이다. 그 대신 멕시코 유명한 관광지인 칸쿤, 아카풀코와 같은 해변가는 대부분 더운 계절이다. 미국, 캐나다 여행객들이 겨울 강추위를 피해 따뜻한 멕시코 남쪽 해변을 많이 찾는 이유이다. 충분한 정보 없이 겨울 옷을 다 버리고 가벼운 옷만 챙겨온 탓에 우리도 많이 추웠다.

멕시코 중부 쪽의 또다른 특징은 모든 정치, 경제, 역사, 문화, 종교의 심장부를 이룬다. 멕시코 고대문화를 크게 두개로 구분하면, 마야문명이 남쪽이고, 아즈텍 문명이 중부지역이다. 오랜 역사 속에 원주민들의 토착문명이다. 아직도 많은 곳에 태양신, 달신을 섬기던 피라미드가 존재한다. 그런데, 유럽의 스페인 군대가 신무기로 거대한 아즈텍 왕조를 단숨에 정복했다. 군대를 태운 범선에 선교사도 함께 왔다. 칼이냐 성경이냐, 선택의 자유는 없었다. 그 이후 멕시코 토착민 문화는 파괴되고 불태워졌다. 일례로 멕시코시티의 첫번째 대성당은 옛 피라미드 신전을 무너뜨리고, 그 터 위에 교회를 세웠는데, 지금은 교회와 피라미드 유적이 함께 공존하며 관광지가 되었다. 현대와 중세의 혼합형태다. 덕분에 멕시코를 가톨릭 국가로 인정한다. 국가종교는 아니지만 특히 중부지역 대도시의 영향력은 매우 강하다.

개신교가 약한 중부에서 선교 접촉점을 찾기 위해 과달라하라 주변도시를 답사하고, 몇 군데 예상리스트를 적어 파송 교회로 보냈다. 그 중에 티후아나 도시로 낙점되었다. 의외였으나 생소하지 않았다. 총회 선교훈련 때까지는 티후아나 도시가 최종 도착지였기 때문이다. 1년만에 짐을 다시 꾸렸다. 떠남은 늘 쉽지 않지만 지상명령이다. 파송교회 당회 결정이 공문으로 전달됐다. '티후아나로 가서 선배 선교사님과 협력 사역하라.' 멕시코 땅은 크고 광대했고, 티후아나는 멀었다. 이제 막 친구들 사귄다고 좋아하던 아이들이 시무룩해졌다. 4시간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 본 티후아나 모습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푸르름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회갈색의 뿌연 먼지가 내려앉은 삭막한 광야를 보는 듯 했다. 지도의 맨 끝자리 변방 국경도시였다. 두번째 선교지이자 현재 사역지이다.

티후아나에서 두번째 선교는 선교센타 공동생활의 시작이었다. 흙먼지 풀풀 날리는 도시 변두리 산동네는 선교 사역지로 적절했다. 10년 먼저 오신 선배선교사님은 교회를 개척했고, 기술학교 교실을 세웠는데, 이곳이 선교센터 역할을 했다. 협력선교의 시작이었다. 협력은 대등한 입장을 고려하므로 협력보다는 보조가 맞다. 처음부터 부선교사 역할을 자청했다. 공동생활에 필요한 공동식사, 설거지, 청소, 땅파기, 배관 설치, 나무 자르기, 축대 쌓기, 사무실 컴퓨터 작업, 예배찬양 기타 반주, 손님맞이까지 내가 평생 배워야 할 것을 거기서 다 훈련했다. 거목 아래서는 그늘도 넓다. 인생학교의 유익함이리라. 8년의 세월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티후아나 도착 직후 쌍둥이가 태어났고, 시청에 등록하니 멕시코 시민권도 얻었다. 애들 덕에 보호자인 아빠도 시민권을 받았다. 보너스의 기쁨이었다. 이보다 확실한 선교열매가 또 있겠는가?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출산 당일, 수술 대기실에서 간호사가 오더니 작은 이불 두개를 준비해 오란다. 밖에 나와 이불가게로 들어가니, 신생아 성별을 물어온다. "어 아직 모르는데.." 한국과 달리 여기에선 미리 알려준다. 첫 초진 때 쌍태아가 너무 가까워서 분별이 어렵다는 이유로 알지 못했다. 이후엔 아예 묻지 않고 믿음으로 기다렸다. 가게 주인이 성별을 물은 이유인즉 남자는 파란색, 여자는 분홍색을 추천하기 때문이다. 잠깐 고민에 빠졌다. 아직 성별은 모르지만, 기도해온 믿음대로 하나는 파란색, 다른 하나는 노란색으로 정했다. 긴장하며 대기실을 서성이는 데, 간호사가 아들이라며 하나를 안고 왔다. 1분후 아들 하나를 다시 안고 왔다. 사십을 넘어 두 아들을 얻은 뿌듯함이 가슴깊이 벅차 올랐다. 그 행복감도 잠시, 의사가 보호자를 부르더니, 산모 혈압이 갑자기 높아져서 과다출혈로 위급하단다. 아내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혼수상태였다. 수혈이 필요하니 혈액병원에서 피를 받아오란다. '아니 병원에서 할 일이지 왜 내가?' 따져 물을 새도 없이, 그 때부터 내 머리 속이 하얗게 되어, 얼마나 정신없이 뛰어 다녔는지.. 응급상황에서 항의하고 원망할 만큼 1년차 선교사의 소통능력은 한없이 빈약했다. 벙어리 냉가슴 앓는다는 말이 그때만큼 절감되던 때가 없었다. 늦은 오후에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큰 병원으로 옮기란다. 가슴 치며 통탄 할 일이지만, 어찌하지 못하고, 시립병원 응급실로 급히 옮겼다. 환자가 안으로 들어가니, 내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보호자 대기실 구석에서 멍하니 바깥을 보았다. 비가 내린다. 두 손 붙잡고 기도하는 것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최남영 선교사

총회 파송 멕시코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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