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부문 당선작 '웜우드의 보고서'

소설부문 당선작 '웜우드의 보고서'

[ 제20회기독신춘문예 ] 글 : 강현규 그림 : 고영빈

강현규
2023년 01월 11일(수) 14:54
그림/ 고영빈 작


1941년 7월 5일 영국에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이 책은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조카인 웜우드에게 보내는 31통의 편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저자인 C. S. 루이스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이 편지들을 자신이 어떻게 입수했는지는 밝히지 않겠다고 말했다.



1.

아직 내가 치고 들어갈 찬스는 오지 않았다. 오래 기다리다 보니 긴장이 되고 조바심도 난다. 하기야 악마의 프로젝트라고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니까. 어쨌든 오늘은 그동안 애써 공들여 온 이 일을 마무리해야 하는 중요한 날이다. 바보천치. 오래전 다 잡은 줄 알았던 내 환자 피터를 막바지에 놓쳐 버린 사건을 놓고 삼촌이 내게 한 말이다. 피터란 놈이 그렇게 쉽게 빠져나갈 줄 낸들 어찌 알았겠나. 빌어먹을. 오늘 같은 날 하필 그따위 말이 떠오르다니, 벌써 80여 년이 지난 풋내기 시절의 일이잖아.

토요일 오후, 창문 너머 구름 한 점 없는 먼 하늘이 보인다. 나의 초조한 기분과는 달리 서울과 접경한 P시 중심부에 자리한 이 건물의 3층 회의실은 졸음기로 차 있다. 구르르릉. 아득히 들리는 비행기 엔진소리가 오후의 나른한 분위기를 더욱 부채질하는 듯하다. 회의실 맨 안쪽 중앙에는 마이크가 설치된 단상이 있고 그 앞에 탁자들이 좌우 양쪽으로 기다랗게 잇대어 놓여 있다.

"제안 안건에 대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받기를 동의하십니까?"

총무의 발표가 끝나자 사회자인 회장이 말한다.

"받기를 동의합니다."

"동의가 들어 왔습니다. 제청 있으면 받겠습니다."

"제청 있습니다."

"제청 감사합니다. 가하시면 예, 하시고 아니면 아니오, 라고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

오후 3시 반. 저들은 조금 전 경건회를 마치고 지금은 2부 월례회를 진행 중이다. 회의 때마다 동의입네 제청입네 하며 저렇게 애들 유희 같은 짓을 되풀이하는 것을 보면 인간들은 저런 형식적인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서기의 회원 점명과 성원 보고에 따라 회장이 개회를 선언했고 이어 회계 보고가 있은 다음 총무의 안건 설명이 있었다. 자기들끼리의 이런 모임에 이골이 난 친구들이라 지금까지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왔다. 이어서 예정된 3부 모임도 그럴지 모른다. 이 웜우드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이제 막 첫 번째 안건에 대한 의결 절차가 끝났다. 난 두 번째 안건에서 기회를 엿볼 작정으로 이들의 회의를 지켜보는 중이다. 오늘의 프로젝트 명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몽골 텐트 두 개는 구청에 헌납하는 것으로 하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회장의 머리가 불빛에 번쩍거린다. 숱이 많지 않은 머릿결이지만 말끔히 빗어 넘긴 빗자국이 선명하다. 대기업 임원 출신답게 회장은 깔끔한 용모에 옷매무새 또한 세련된 편이다. 진한 남색 모직 양복 안에 받쳐입은 하얀 실크 와이셔츠가 붉은 넥타이와도 잘 어울린다. 회의실 맨 앞자리엔 회장과 사뭇 다른 분위기의 남자가 앉아 있다. 한 고집 하게 보이는 고수머리에다가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갈색 잠바가 아무래도 추레해 보인다. 올해 초 중학교 교감으로 퇴직한 자로 지난해엔 이 모임의 회장직을 맡았었다.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처박고 앉아 있는 모습이 회의엔 별 관심이 없는 모양새다. 어쨌든 회장과 전임회장, 이 둘은 오늘 시나리오에서 주역을 맡은 VIP들이다. 이 말은 나의 메인 숙주라는 뜻이기도 하다. 굳이 역할의 경중을 따지자면 전임회장인 교감 출신에게 더 기대를 걸고 있긴 하다. 심심해하던 교감 출신이 결국 하품을 참지 못하고 손을 입으로 가져간다. 교감 출신 말고도 눈을 내리깔거나 감은 채 앉아 있는 사람들이 많고 아예 고개가 모로 젖혀진 친구도 있다. 다행히 이 환자 녀석들은 나의 존재에 대해선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하기야 요즘은 어딜 가도 우리의 실재를 설마, 하며 반신반의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따위가 어디 있어? 라며 아예 우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자들도 많더군.

회의실 탁자 위에는 A4 사이즈의 두툼한 유인물이 참석자들 앞에 놓여 있다. 회의 시작 때 회장이 유인물에 출석과 회비납부 현황이 첨부되어 있으니 꼼꼼히 읽어보고 잘못이 있으면 지적해달라고 당부했지만 다들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유인물 앞표지에는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라는 글이 씌어 있고 단상 뒤의 벽면에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세로로 기다랗게 걸려있다. 사랑하는 웜우드. 삼촌의 편지 말이 귓전에 울린다. 환자의 아픈 데를 찔러 신경을 긁어 대거라. 제발 내 말을 우습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웜우드. 이건 초등기술이긴 해도 잘만 써먹으면 아주 유용한 기술이란다. 맞아, 삼촌은 사랑, 이란 말을 즐겨 사용했지. 그의 편지도 사랑하는 웜우드, 로 시작해 너를 아끼는 삼촌 스크루테이프, 로 끝맺었잖아. 더욱이 마지막 서른한 번째 편지는 낯이 간지러울 정도였어. 사랑하는 너무나 사랑하는 웜우드, 내 귀여운 것, 이라니 어휴. 삼촌이 나를 사랑한다고 한 것처럼 나도 그대로 따라 했다. 답장할 때면 꼬박꼬박 사랑하는 삼촌, 이라는 인사말로 시작했지.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철이 덜든 나는 사랑이란 말이 우리 세계에서 아무나 사용하는 언어인 줄 알았어. 삼촌이 애용하는 언어였으니 말이야. 사랑을 자기들만의 전유물처럼 여기는 인간들이 간혹 우리 악마를 가리켜 사랑을 빼고는 모든 능력이 천사와 대등한 존재라고 떠들 때면 그자들에게 우리의 편지를 한번 보여주고 싶은 적도 있었지. 우리가 어떤 인사말로 편지를 시작하고 끝맺는지를 알고 나면 그들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지 않았겠나. 또한 삼촌은 환자를 돌보라는 표현도 좋아했다. 원수 편에 가담한 저들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원수 같은 존재이긴 하지만 몹쓸 병을 앓는 불쌍한 환자로 여기고 우리가 잘 돌봐야 한다는 것이었지. 원수가 자기 제자들을 산 위에 모아놓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것과 대등한 맥락인 게야. 아, 내가 놓친 환자, 피터가 또 생각나네. 그렇다면 나는 과연 피터를 사랑한 것일까?

하지만 사실 내가 불가사의하게 여기는 것은 사랑이라는 말보다 회개, 라는 말이야. 인간들이 그 양반 앞에 나와 엎드려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걸 보면 참 가관이지. 하지만 나는 궁금했다. 회개라는 게 우리 악마에게는 도대체 무얼 의미하는지. 동료들은 물론 삼촌도, 심지어는 아버지조차도 회개라는 말이 나오면 하나같이 입을 닫거나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더라. 원수가 세상에 나와 저들 환자들에게 처음으로 외친 말이 회개하라, 라는 말이었던 걸 보면 어쨌든 그게 저들이 게을리하거나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짓임엔 틀림없는 것 같아. 마틴 루터라는 자가 로마교황청을 향한 95개조 반박문에 원수의 그 말을 첫 번째로 올려놓았던 것도 그런 연유가 아니겠나. 우리 악마들이 그 말의 속뜻을 깨칠 수 없는 것은 하늘에 있는 그 양반이 우리한테 뭔가 수작을 부려 놓고는 자물쇠를 채워 버렸기 때문일 테지만 그게 우리를 우리답게 만드는 것임에는 분명해.



2.

"이번에 토의할 안건은 개근 자에 대한 기념품 지급 건입니다. 부회장이 나와서 안건을 발의한 취지를 말씀해 주시죠."

회장이 정중하게 두 번째 안건을 상정했지만 다들 여전히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부회장은 구태여 설명까지 덧붙일 필요가 있겠냐는 표정이더니 마지못해 앞에 나가 마이크를 잡는다.

"존경하는 기드온선교회 여러분, 귀한 주말이라 공사다망하실 텐데 이렇게 출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출석부 체크 안 하신 분은 꼭 체크 해주시고요. 여러분, 다 아시죠? 올해 들어 우리 선교회가 출석률이 부쩍 떨어진 것 말이에요. 그래서 본 안건은 일 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개근한 분들에게 소정의 기념품을 지급하자는 거죠. 그동안 저희 임원들은 출석률을 올릴 수 있는 방안을 놓고 몇 차례…."

배포된 유인물을 넘기느라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난다. 유인물 분량의 절반은 차지할 출석과 회비납부 현황이 인쇄된 페이지들을 넘기며 각자 자기 이름을 찾고 있을 터이다. 출석 문제는 회의 때마다 거론되는 단골 이슈였다. 올해 2월에는 출석률의 분모를 무엇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현 회장과 전임회장이 서로 대립한 적도 있었다. 현 회장이 출석률의 분모를 회비를 내는 유효회원 수로 바꾸자고 제안했으나 전임회장이 원칙대로 재적 회원 수로 해야 한다며 반대함으로써 무위로 끝났다. 담임목사가 교회 각 기관의 출석률에 관심을 표명한 직후였다. 출석 문제가 소소해 보여도 이들로 하여금 이런 것에 집착케 하는 것은 우리의 핵심 전략이기도 하다. 웜우드. 네가 성공적인 악마가 되려면 다음의 내 말을 명심해라. 저들로 하여금 원수가 내린 지상 대명령과 같은 영적 의무를 내팽개치게 만드는 최고의 방법은 공동체 내부의 자질구레한 문제들에 관심을 쏟아붓게 함으로써 저들의 영적 에너지를 깡그리 고갈시켜버리는 것이라는 걸. 스크루테이프는 편지로 종종 중요한 사역 지침을 내리곤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는 단순한 삼촌 이상의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몇 달 전부터 추진해온 이 프로젝트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는 오늘 드디어 마침표를 찍게 되겠지만 나는 삼촌의 지침에 따라 꽤 오래전부터 저들의 발을 교회 안에 꽁꽁 묶어두는 데 주력해 왔고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 셈이다. 지금 저들끼리 모여 저런 짓거리에 몰두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선교나 전도는 뒷전이고 기껏 경건회다 월례회다 하며 그럴싸한 이름으로 모이긴 하지만 저렇게 죽치고 앉아 회의하는 걸 무슨 대단한 일인 양 여기고 있지 않은가. 저들의 심벌마크인 기드온의 횃불은 항아리 속에서 꺼진 지가 오래였고, 이 선교회가 출범할 때 내건 캐치프레이즈인 '교회, 세상 속으로' 또한 저들은 까마득하게 잊어먹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루시퍼님의 교시록 중의 하나인 '교회, 또 하나의 세상살이' 편에 쓰인 말씀을 따라 충실하게 진행되어 온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실 기드온선교회는 여러모로 이 교회의 중추에 해당하는 조직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미래의 장로 후보인 안수집사들로만 구성된 조직일 뿐만 아니라 교회 내의 위계 상으로도 당회의 직속 기관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더구나 당회장인 담임목사가 직접 관장하는 형태로 운영되다 보니 기드온을 담임목사의 친위부대인 양 여기는 사람도 많았다.

"맞아요. 뭐니 뭐니 해도 출석이 가장 중요해요. 사람들이 모여야 선교건 뭐건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출석하지 않으면 회비도 거둘 수 없고 말이에요. 그래서 출석 잘하는 분들에게 계속 잘하라는 격려의 뜻으로 기념품을 주자는 거죠. 그러면 출석이 부진한 사람들도 좀 더 분발하지 않겠어요?"

회계 맡은 자가 나서서 부회장의 말을 거든다. 출석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마다 잔뜩 악센트를 넣지만 아무도 귀담아듣는 것 같진 않다. 회계의 발언이 끝나자 회장이 다시 마이크를 잡는다. 그의 실크 와이셔츠 소맷부리에 달린 커프스버튼이 반짝인다. 소매 깃에는 그의 영문 이름 Young Tak Jo, 가 새겨져 있다.

"안건의 제안 취지에 대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잘해보자는 거니까 별다른 의견이 없을 줄로 압니다…."

지금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장 좋은 때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은가. 때로는 결단이 필요한 법. 회장은 별다른 의견이 없을 줄로 압니다, 는 말 다음에 받기를 동의하십니까? 라는 의례적인 문장을 입 속에서 준비하고 있을 터. 나는 재빨리 움직인다. 받기를 동의하십니까? 라는 말을 그의 입 안으로 밀어 넣는 대신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를 슬쩍 끼워 넣는다. 이런 걸 두고 소위 악마의 편집이라던가. 맨 앞에 앉은 교감 출신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뭔가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이다. 내가 짠 각본대로 잘 될지 어째 조마조마해진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안다. 그가 올해 교감으로 퇴직한 것이야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유독 복잡하게, 라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인 줄은 나밖에 모른다. 석 달 전 동대문시장의 한 양말 가게에서 복잡하게, 라는 말을 대못을 꽝꽝 치다시피 해서 그의 머릿속에 박아 놓았다. 또한 그가 요즈음 해어진 양말을 신고 다니며 더욱이 지금은 양말 뒤꿈치에 구멍이 뚫려 있다는 것도 나만이 아는 사실이다.



3.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다행히 회장이 대본대로 입술을 움직여 준다. 나는 앞자리에 앉은 교감 출신의 귓바퀴에 달라붙어 청각의 감도가 좋아지도록 몇 차례 흔들어준다. 혹시라도 제대로 듣지 못해 지나칠까 봐 염려해서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번쩍하며 안경테 너머로 교감 출신이 눈을 치켜뜬다.

"잠깐!"

스프링처럼 교감 출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다.

"회장과 임원도 포함하는 거요?"

느닷없는 질문에 회장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네, 그렇죠, 포함돼야죠."

끼었던 팔짱을 풀며 교감 출신이 또 묻는다.

"회장이나 임원들은 당연히 출석해야 하는 사람들 아뇨?"

그의 말투에 삐딱한 억양이 묻어있다. 아, 이젠 한숨 돌려도 될 상 싶다. 비록 시나리오의 첫 대목에 불과하긴 하지만 회의 흐름을 바꿀 물꼬가 트였으니 말이다. 회장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스쳐간다. 그로서는 뜻밖일 게다. 지금까지의 월례회에서 안건들 대부분이 별다른 문제 없이 순조롭게 통과되었듯이 이번에도 으레 쉽게 넘어갈 줄 알았을 테니. 이제 다른 작자들도 졸음기가 달아났는지 흐트러진 자세를 슬슬 추스르고 있다. 옳거니….

드디어 내가 바쁘게 뛰어야 하는 시간이 왔다. 언쟁은 무릇 반론과 재반론의 반복에서 비롯되는 법, 회장으로 하여금 상대방의 의견을 받아들일 생각일랑 엄두조차 못 내게 만들어놓아야 한다. 회장의 수정체에 교감 출신의 꾀죄죄한 곱슬머리와 콧등에 내려앉은 싸구려 안경테, 또 색바랜 잠바에 후줄근한 바지 등을 두루두루 비춰준다. 저것 좀 봐. 생긴 꼴에 해 입은 것하고는…. 나는 다시 회장의 대뇌피질로 빠르게 비집고 들어간다. 기억 중추의 트랙을 순식간에 훑어서는 그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줄 키워드 두 개를 찾아낸다. 하나는 새벽 제단의 수호자, 또 하나는 만년 장로 후보. 이런 경우 머릿속에 전개될 문장의 완성은 당사자의 몫이다. 맞아, 저 친구는 새벽기도에도 나오지 않잖아. 게다가 먹는 걸 그리 밝히면서도 여태 밥 한 끼 사는 꼴을 본 적이 없어. 장로가 되고 싶어 목을 매다시피 안달하는 주제에 말이야. 그러니까 허구한 날 만년 장로 후보라는 소리를 듣지.

"이것 봐요. 우리는 지금…"

회장의 어투에는 시작부터 상대를 깔아뭉개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회장과 임원을 넣고 빼는 문제가 아니라 개근 자에게 기념품을 지급할지 말지를 토의하고 있는 거요…."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말을 잇는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얼씨구, 분위기를 화끈하게 달구려고 아예 작정한 모양이군. 나는 또 움직인다. 이번에는 교감의 차례. 안구의 초점이 회장의 와이셔츠 소매에서 번쩍이는 에메랄드빛 커프스버튼을 겨냥하도록 조준점을 맞춰준다. 동시에 오늘 아침 집을 나설 때 자신이 신고 온 양말의 구멍도 떠올릴 수 있도록 그의 머릿속에 조명등을 환히 켜준다. 그리곤 그의 움츠러든 존재감을 까부르는 짤막한 멘트 하나를 혀끝에 슬쩍 발라준다. 짜식, 저 말하는 것 좀 봐. 잘난 체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4.

제군들, 잘 들어. 저들 인간의 존재감 양쪽 끝자락에는….

이건 스크루테이프가 아니고 후르후르의 목소리다.

…상반된 두 종류의 감정이 자리 잡고 있어요.

수만 명의 악마들이 득실거리는 악마양성학교 초급반에서 후르후르가 강의한 내용이다. 이간질에서부터 분열까지, 라는 제목이었다. 한쪽엔 여차하면 빠져드는 열등감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엔 툭하면 발동되는 우월감이라는 게 있단다. 이런 심리가 작동하는 이유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남과의 비교를 통해서 규정하려는 쟤들의 속물적인 근성 때문인 게지. 한쪽은 잘만 부채질하면 상대를 향한 시기와 질투심을 뜨거운 불길처럼 타오르게 만들 수가 있고, 다른 한쪽 또한 끈질기게 부추기노라면 상대를 얕보고 업신여기는 얼음같이 냉랭한 교만에 이르게 할 수 있단 말이야. 우리가 올라타는 곳이 어느 쪽이냐에 따라 하루에 수백 번이라도 오르락내리락 시소를 태워줄 수가 있지. 저런 류의 감정을 우리가 직접 저들 속에 심어 놓은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들의 이간질 사역 시에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길 바란다. 제군들, 이간질이야말로 악마를 악마답게 만드는 자랑스러운 독니요 날 선 발톱 같은 병기일 뿐 아니라 공동체 분열이라는 우리의 과업을 이루기 위해 여러분들이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기본기술이란 점을 명심하거라. 더욱이 공동체의 우두머리들을 상대로 이간질에 성공한다면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우수한 악마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이간질을 제대로 못 해 악마양성학교에 다시 들어와 보충 교육을 받는 멍청한 놈일랑 하나도 없길 바란다. 아직도 이간질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역량인지 실감이 나지 않는 녀석이 있다면 다음의 내 말을 귀담아듣길 바란다. 우리가 아버지의 선악과 사건을 그 양반이 만든 창조 질서를 뒤흔든 대성공작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그 일로 그 양반과 저 인간들의 관계를 이간시키는 쾌거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더냐. 원수가 나중에 이 땅에 내려온 이유도 그때 훼손된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고 말이야. 이간과 분열의 귀재, 후르후르의 강의는 지금 생각해도 감동적이다. 사역을 하다 보면 때론 억울할 때도 있을 거다. 나도 그랬어. 일은 자기들이 벌여 놓고는 책임은 몽땅 우리 탓으로 뒤집어씌우는 생뚱맞은 녀석이 있는가 하면, 우리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도하게 평가하고선 스스로 발동한 자신의 정욕조차도 우리의 사주로 인한 거라고 떼를 쓰는 웃기는 놈도 있으니까.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저들의 1부 경건회 때 담임목사란 자가 설교한 구절이 얼핏 생각난다.



5.

"복잡하게라니? 복잡하게 만든 게 누군데…. 왜 이제 와서 이런 안건을 끄집어내?"

교감 출신의 칼끝은 상대를 향해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다. 말투 또한 반말 투로 거칠어진다. 이제 회의는 언쟁으로 비화하기 직전에 이르렀다.

"지금이 벌써 10월인데, 하려고 했으면 연초에 룰을 만들어 미리 공표했어야지. 그래야 공평하잖나. 그리고 꼭 올해 해야 할 필요도 없잖아? 올해는 공지만 하고 내년부터 시행하면 안 돼?"

"그래, 맞아. 대학 커리큘럼도 그래. 학생들에 대한 평가 기준을 학기 초에 공지하지, 중간에 발표하는 경우는 없어."

때마침 교감 출신을 두둔하는 발언이 나온다. 대학교 교무처에서 일하는 친구다. 그때 난데없이 회의실 뒤쪽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린다.

"그래 맞아! 회장과 임원은 안 돼! 회장과 임원은."

소리 난 쪽으로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린다. 목에 빨간색 스카프를 맨 작자다. 어럽쇼? 이번 시나리오에는 없는 인물이다. 교회에서 나팔 부는 것 말고는 맡은 일이 없는 친구로 1부 경건회 때 색소폰을 연주했었다. 마틴 루터란 작자가 작사 작곡한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라는 곡이었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아무렴, 이 시대의 마귀인 나도 힘써 모략과 권세를 휘둘러야 하고말고.

어느덧 회의실은 나른한 분위기는 오간 데 없고 긴장감으로 꽉 차 있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때요? 회원님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었으니 이 건을 회장단에 일임해 주면 안 되겠습니까?"

궁지에 몰린 회장이 타협안을 내놓자 회의실 분위기가 잠잠해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지금 와서 무슨 소리야? 그럴 것이면 처음부터 그러던지 안건 상정은 왜 했어?"

교감 출신은 자기 생각을 굽힐 생각이 없다.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좋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퇴로가 차단된 회장이 어디 할 테면 한번 해보자는 듯이 말한다.

"그래, 별수 없지. 표결로 갈 수밖에…."

부회장이 회장의 의중을 파악하곤 작심한 듯 말한다.

"쯧쯧…."

어디선가 혀를 차는 소리가 난다.

"표결은 무슨 표결? 내가 이 기드온선교회에 나온 지 20년이 넘었지만 여태 표결로 뭘 결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이 자리 최고의 고령자다.

"그럼 어떻게 해요? 의견이 서로 안 맞는데…."

서기로 보이는 친구가 난처해하며 말한다.

제군들. 후르후르본부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이천여 년 전 원수가 이 땅에 내려와서 서로 사랑하라고 외치고 다닐 때 아버지가 맞불을 놓으려고 우리에게 내린 계명이 뭔지 다들 잘 알고 있지? 서로 이간하고 분열시켜라, 가 아니더냐. 우리의 이간과 분열 사역에 저들이 맞선답시고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한 힘이라고 입으론 떠들어 대지만 선악과 사건 이후 저들은 사랑의 능력을 잃어버린 게 분명해. 사랑도 근육과 같아서 잘 단련하면 키울 수 있다고 뻥치는 녀석들이 아직도 있긴 하지만 말이야. 한 번 더 강조한다. 이간질을 통한 공동체의 분열이야말로 우리의 최상급의 사역이라는 걸. 공동체가 둘로 쪼개지면 우리는 저들이 자랑하는 사랑과 믿음은 물론 순종조차도 깡그리 손아귀에 쥐고 흔들 수가 있단 말이야. 교회분열본부의 최고 수장다운 선언이었다. 이어서 구체적인 실행방안에 대해서도 말했다. 팁을 하나 추가한다면 공동체 분열을 위한 초기 사역의 경우, 표결이라든지 다수결이라든지 하는 수단이 유용할 때가 많다는 점을 명심하여라. 주의할 점은 그 결과가 찬성과 반대 양쪽이 되도록이면 수적으로 비등해야 한다는 거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황을 만들어놓으면 우리가 활동할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많이 생기기 때문이야.

작년 7월에 있었던 장충체육관에서의 행사가 기억난다. 입구에는 연합과 일치-오직 하나님께 영광, 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교단별로 수십 명의 기수가 깃발을 들고 들어왔는데 그렇게 많은 깃발이 펄럭일 줄은 몰랐다. 깃발마다 비슷비슷한 물고기 모양이 새겨져 있지만 문양과 색깔은 각기 조금씩 달랐다. 그중에는 이곳 하늘빛교회에서 본 낯익은 깃발도 있었다. 스크루테이프 삼촌이 유능한 악마인 줄이야 진즉부터 알았지만 후르후르가 얼마나 대단한 악마인지는 그때 알았지. 또 우리 교회분열본부가 영광스러운 붉은 별을 왜 세 개씩이나 받았고 아버지 루시퍼가 왜 그토록 후르후르를 인정해 주는지도.



6.

이제 나머지 친구들의 시간이다. 지금껏 말 한마디 없이 입을 다물고 있던 친구들 말이다. 이들의 얇아진 존재감을 흔들어줄 필요가 있다. 교회 버스 기사에게 날아간다. 입도 뻥긋하지 않으려면 여긴 뭐 하러 왔어?

"그러지 뭐. 표결에 부치자고."

버스 기사가 순순히 입을 뗀다.

맞은편의 육군 대령 출신에게 건너가 그의 입술을 질끈 깨물어준다. 당신도 한마디 해, 퍼뜩.

"좋아, 표결에 부쳐!"

군인답게 단도로 자르듯이 짤막하게 한마디 한다.

이번엔 배관공사 기술자의 차례다. 당신은 왜 가만있어? 멍청하게. 안건이 뭔지 알기는 하는 거야?

"참, 안건 제목이 뭐였더라? 다시 한번 말해 봐."

"아까 '개근 자 포상'이라고 했잖아요."

배관기술자의 질문에 서기가 짜증스레 대답한다.

다음은 부동산 중개업자다. 이럴 때 똑똑한 척 한번 해봐. 계약서 많이 써봤잖아.

"아니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회장과 임원을 포함한, 개근자 포상 여부'라야 맞지."

어이, 꼼꼼하기로 둘째가라면 서운해할 당신. 저 문장에 빠진 거 없어? 잘나가는 보험회사 직원.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올해, 회장과 임원을 포함한 개근자 포상 여부'라고 해야겠지."

이제 당신만 남았어. 성질 급한 당신이 웬일이야? 나대는 꼬락서니들이 맘에 안 들어 오늘은 가만히 있겠다고? 알았어. 그럼 참아, 참으라고.

"아, 진짜 성질나네. 포상은 무슨 놈의 포상? 아까 기념품 지급이라고 했잖아."

세무공무원인 그도 결국 한마디 거들고 만다.

서기가 앞으로 나간다. 열을 받았는지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한다. 그가 화이트보드에 '올해, 회장과 임원을 포함한 개근자에 대한 기념품 지급 여부'라고 쓴다. 프로젝트는 제대로 굴러가고 있다. 고맙게도 버스 기사를 선두로 한 엑스트라들이 기대에 못지않은 역할을 해주었다. 오늘과 같은 나의 사역을 악마의 속삭임이라고들 하지만 사실은 이 일도 고달프고 피곤한 노릇이다. 옛날엔 오늘처럼 이렇게까지 들락날락거릴 필요가 없었다. 사역이 힘들게 된 것은 후르후르본부장이 부임하고 나서부터다. 교회 분열 사역을 일관되게 수행할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며 업무체계를 환자 개인별에서 집단 단위로 바꾼 것이다. 전에는 환자 서넛만 담당하면 되었지만 이젠 혼자서 수십에서 수백 명까지-지금 나의 경우엔 하늘빛교회-를 다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행히 후르후르님이 조카 파이몬을 붙여 주는 바람에 숨통이 조금 트이긴 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악마의 능력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원수의 영과는 달리 동시에 여럿에게 작용할 수가 없는 까닭에 오늘처럼 일일이 하나씩 쫓아다닐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7.

웬만한 녀석들은 한마디씩 떠들도록 만들었는데 오직 한 녀석의 입을 여는 데는 실패했다. 평소에도 말이 없는 친구이긴 하다. 사회복지사인지 뭔지를 하며 나이가 마흔다섯이나 되는 노총각이다. 이름이 배상호인가 그랬다. 이마가 좁고 턱이 튀어나온 게 꼭 네안데르탈인처럼 생겨 먹어서인지 어쩐지 처음부터 꺼림직한 기분이 들었었다. 회의에는 관심을 두지 않기로 작정한 모양으로 일찌감치 뒤쪽 구석에 앉아서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유심히 봤더니 화면에 기도, 라는 폴더명이 떠 있었다. 그래 기도해. 뭐 고작 신실한 배우자를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겠지. 기도하라고. 나는 굵은 주름이 팬 녀석의 앞이마를 발로 한차례 차고는 그의 귓밥을 물고 늘어졌다. 기도도 좋지만 한 말씀은 하고 가야지? 뭔가 반응을 기대했으나 녀석은 태연히 휴대폰 자판만 두들기고 앉았다. 이번엔 뭉툭한 콧잔등을 타고 내려가 코털이 무성한 콧구멍 속을 비집고 들어갔다. 녀석이 재채기를 연거푸 했다. 잠시 기다렸다가 녀석의 목구멍 안으로 들어가 늘어진 목젖 부위를 살살 문질러 주었다. 발성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도와주기 위해서다. 먹고살기 바쁠 텐데 그 먼 데서 여기까지 왔네. 표결엔 찬성하는 거야, 뭐야? 반응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 이번엔 목젖을 뒤로하고 입천장을 가로질러 부러진 앞니 사이를 빠져나와 그의 두툼한 입술에 도달했다. 글쎄, 한마디만 하라니까 그러네. 입술을 벌려보려고 용을 써보지만 꿈쩍없었다. 녀석의 면상을 닥치는 대로 핥고 깨물고 꼬집고 비틀고 찔렀다. 한쪽 눈썹을 움찔했을 뿐 별반 소용이 없었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긴 했어도 이렇게 지독한 놈은 처음이었다.

이젠 투표를 마치고 개표가 진행 중이다. 어차피 녀석의 입을 열기는 글렀다. 녀석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 중에 문득 녀석의 머릿속엔 도대체 뭐가 들어 있을지 궁금해진다. 나는 녀석의 두개골 속으로 침투해서 대뇌를 들여다보기로 결심한다. 막 비행을 시도하려는 순간 불현듯 눈앞의 모든 것이 새하얗게 뒤집히며 누군가가 내 숨통을 틀어쥔다. 불의 혀처럼 갈라진 형체에 소름 끼치는 광채가 번쩍이는 존재다. 칼로 찌르고 불로 지지듯 하는 통증이 나를 마구 할퀴고 쥐어뜯는다. 동시에 몸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가 탱탱한 풍선에 바람 빠지듯 한순간에 폭삭 쪼그라들고 만다. 이어서 시공의 경계를 전혀 가늠할 수 없는 까마득한 암흑의 세계로 빨려 들어간다.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것 같은 소멸의 공포감에 떨던 나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엄청난 힘의 작용으로 네안데르탈인의 몸에서 튕겨 나온다. 한동안 눈을 뜨지 못한 채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비틀거린다.



8.

"십삼 대 십이네요."

서기의 말이다. 투표 결과가 나왔다. 십삼 대 십이. 보나마나 입을 모아 동의와 제청을 합창하던 친구들, 부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은 모두 찬성표를 던졌을 것이고, 반면에 배관기술자를 비롯해 안건 제목을 완성하는 데 공을 세운 친구들과 색소폰은 분명 반대표를 던졌을 터. 아무튼 회장을 지지하는 쪽과 전임회장인 교감 출신을 지지하는 쪽 두 편으로 나누어진 셈이다. 이제 프로젝트는 내가 원하는 바대로 시나리오의 마지막 지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하기야 편 가름하는 짓거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원수의 제자들이 직접 활동하던 이천여 년 전에도 그랬으니까. 그때도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하며 패거리를 지어 다퉜고 심지어는 쟤네들끼리 로마 법정에 고발까지 하고 그랬잖아. 바울과 같은 맹랑한 친구가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외쳐댔지만 말이다. 이건 모두 저들의 교과서에 나와 있는 내용들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도 쟤들의 교과서를 좀 안다. 선택과목이긴 하지만 악마양성학교의 커리큘럼에 성경이 들어가 있단 말이다. 악마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과목이 에베소서였지, 아마.

"찬성이 한 표 더 많으니 본 안건은 통과된 걸로…."

서기가 가결을 막 선포하려는 순간,

"무슨 소리? 출석 인원의 과반수가 안 되는데 무슨 놈의 통과야."

세무공무원이 고함을 친다. 그의 말은 출석 인원수가 스물여섯이니까 십삼이라는 숫자로는 과반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표결 결과를 놓고 보면 기권한 친구가 한 명 있는 셈이다.

"그래 맞아. 회칙에도 과반수로 되어 있어."

보험회사가 세무공무원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아니에요. 회칙 개정의 경우만 과반수 찬성이고 나머지는 다수결에 따르기로 되어 있잖아요."

회계를 맡은 친구가 반박한다.

"회칙은 무슨 회칙. 우리가 언제 그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회칙에 넣었어? 그런 꼴난 회칙 있으면 한번 가져와 봐!"

대학 행정처가 자신만만하게 회계의 주장에 쐐기를 박는다.

"회장, 차라리 안건을 취소하시오. 가결이건 부결이건 그게 뭐가 중요해? 회원들끼리 이렇게 서로 감정을 상하게 만들다니…."

이번엔 최고 고령자의 말이다.

"이미 표결까지 갔는데 어떻게 안건을 취소해요?"

총무가 하소연하듯 말한다.

"처음부터 회의 진행을 원칙대로 했어야지."

"아니, 누가 뭘 원칙대로 안 했다는 거요?"

"거참, 당초 안건을 없던 걸로 하자니깐."

"투표 결과가 나왔는데 그걸 무시할 순 없잖아요?"

저마다 한마디씩 떠들다 보니 회의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고 만다. 아무리 나의 계략대로라고 하지만 이렇게 저치들과 손발이 척척 맞을 줄이야.



9.

"회장의 리더십에 손상이 났어. 이건 예삿일이 아냐. 우리 선교회가 어떤 모임인데. 회장이 사과하시오."

최고 고령자가 회장에게 뼈아픈 한마디를 한다.

"아니, 내가 리더십이 없다고? 어찌 그런 말씀을…. 그리고 내가 왜 사과를 해요?"

회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하지만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무릇 교회의 회의라면 은혜 가운데 진행돼야지, 이게 도대체 무슨 꼬락서니야?"

"그러니까, 계획을 아예 없던 것으로 하자고요."

"그렇게 하려 해도 그것마저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니 어떻게 해요?"

"회의를 지혜롭게 진행해야지. 회장한테 리더십이 없으니 이 모양이 된 거 아니오?"

리더십? 하기야 아버지도 한때 리더십이 흔들린 적이 있었지. 벨제뷔트 일당의 배신으로 한동안 권좌를 빼앗겼다가 천년 전쟁을 통해 루시퍼 성을 탈환하고 배신자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말이야. 물론 지금이야 아버지의 통치체계는 일사불란하다. 한때 아버지와 대등한 반열이라고 까불던 워리놈, 판, 릴리즈 같은 일품 급 천사들도 지금은 충성스럽게 아버지의 발등상 노릇이나 하고 있지 않은가. 벨제뷔트의 세력을 무릎 꿇린 아버지는 자신의 진영을 새로이 꾸렸다. 새로운 실력자들이 수두룩하지만 그중에서도 손을 꼽으라면, 나의 본부장이며 천사 같은 얼굴에 암사슴의 걸음걸이를 가진 이간질의 능수 후르후르님, 천의 얼굴에 일곱 군단의 대병력을 거느린 세상지옥청장 키페르님, 항상 지옥의 법전을 펴들고 다니며 우리의 행동을 감찰하고 재판하는 재판장인 스캡트리님, 초과학적인 4차원의 능력을 발휘하며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검은 악령 샤이퀸트님과 같은 고위급 악마들의 이름이 떠오른다. 벨제뷔트는 어떻게 되었냐고? 답변하기 난처한 질문이다. 뭐라고 해야 하나. 아버지, 루시퍼에게 통합되었다고 말하는 게 좋겠지. 인간들의 표현 방식으로 말하자면 잡아먹혔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그런 식의 표현은 쓰고 싶지 않아. 악마의 인격에 어울리지 않는 화법이니 말이야. 우리 악마들이 얼마나 언어의 품격을 중시하는지 저들은 알 리가 없을 테지. 인간들이 흔히 사용하는 씨팔, 좇같네, 개새끼와 같은 쌍스러운 욕들이 우리에겐 금기라는 사실을 저들은 아마 상상조차 못 할 걸. 만약 누가 그런 품위 없는 말을 사용하다가 그게 지옥의 재판소장인 스캡트리님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 친구에겐 어김없이 악마양성학교 교화반에서 소환증이 날아오게 되어 있다고. 우리 악마는 단지 그런 속된 말들을 인간들이 입술로 내뱉도록 부추기는 역할을 할 따름이지.



10.

"탕!"

누군가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나 보다. 어럽쇼? 이번에도 색소폰이다.

"이제 그만들 해요. 나잇값을 해야지. 에이 씨팔, 이게 도대체 무슨 짓들이야?"

자리에서 일어난 색소폰이 회의실 문을 거칠게 열고 나가 버린다. 허 참, 쟤들 중엔 꼭 저렇게 우리의 금기사항마저 아무렇지 않게 깔아뭉개는 녀석들이 있다니깐.

회의는 이제 파국을 넘어 교착 상태로 접어들고 있다. 안건을 찬성한 쪽이건 반대한 쪽이건 양쪽 모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란 말이다. 너도나도 회의가 이런 지경에 이른 것에 대해 당혹해하는 눈치지만 지금은 어느 한쪽이 주장을 철회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수용하기엔 너무 깊숙이 들어와 버렸다. 누군가 나서서 마침표를 찍어주기를 바라겠지만 그만한 리더십을 발휘할 만한 위인은 없는 것 같다. 이만하면 성공이다.

이젠 본격적으로 다음 프로젝트를 위한 채비를 서둘러야겠다. 사실 이번 프로젝트는 서막에 해당할 뿐이고 다음 프로젝트가 메인 프로젝트이다. 프로젝트 명은 '그런 건 알려고 하지 말고'. 후르후르님이 직접 붙인 이름이다. 규모와 기간 측면에서 이번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훨씬 크고 장기적이긴 해도 전체 모습은 이번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말이다. 서로를 거부하는 비등한 세력의 두 무리가 편을 나눠 싸우게 될 테고 이 교회의 최고 실력자 두 사람의 대립과 갈등으로부터 사단이 생기는 것도 이번과 닮았다. 오늘 막을 내리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는 본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한 예비 단계이자 파일럿 모형의 형태로 추진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면면을 미리 파악해서 앞으로의 분쟁에 앞장설 숙주들을 양성하고자 하는 목적도 컸다. 특히 오늘의 주인공인 회장과 교감이 양 진영의 집행부 리더가 되어 싸움의 전면에 나서서 맞붙는 장면을 상상하노라면 나로서는 어찌 신나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동안 조카 파이몬과 함께 뿌려놓은 씨앗들이 이곳저곳에서 싹트고 있었다. 교인들은 누군가를 만나면 먼저 그가 어느 편인지부터 눈치를 살폈고, 삼삼오오 편을 지어 교회 건물 구석구석을 찾아서 모였다. 한쪽에선 담임목사의 자질과 설교에 관해 수군거리는가 하면 다른 저쪽에선 선임 장로의 독선과 재정 의혹에 대해 쑥덕거렸다.

3층 회의실 출입문이 열린다. 하늘빛교회 사무국 직원이다.

"식당에서 저녁밥 먹으러 오라는데요."

직원에 이어 뒤따라온 양반이 한마디 덧붙인다.

"그래, 조집사, 밥은 먹고 해야지."

이 교회에서 선임 장로로 불리는 자다.



11.

원수의 영을 맞닥뜨린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항간에 쉬쉬하며 떠도는 소문이야 무성했어도 자신이 원수의 영에 된통 당했다는 사실을 대놓고 발설하는 악마는 없었다. 스크루테이프도 자신이 겪은 체험담을 구체적으로 얘기한 적은 없었다. 하기야 인간들도 자신이 수치스럽다고 생각하는 경험은 결코 입 밖에 내는 일이 없지 않은가. 후르후르 또한 그랬다. 그의 수많은 강의 가운데서도 이 부분에 관해선 언급한 바가 없었다. 예를 들어, 원수의 영을 마주치지 않는 비결이라든지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렸을 때 대처하는 요령과 같은 내용들 말이다.

원수의 영 때문에 혼쭐이 나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오후였다. 오늘의 성과는 우연도 아니고 단번에 된 것도 아니다. 몇 개월 전부터 내 역량을 다해 계획하고 추진해온 결과다. 교육감의 집무실에 침투해 들어가 교감과 주고받는 이야기를 엿듣기도 하고 교감 부부를 따라 동대문시장에도 갔었다. 양말 가게 주인을 엑스트라 숙주로 삼았는데 의외로 악역을 잘해 주었다.

주말의 오후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의 꼬리를 서서히 거둬들이고 있다. 구르르응. 또 비행기 소리가 난다. 겉으론 유유히 떠다니는 것처럼 보여도 거대한 몸통 속의 엔진은 필요한 동력을 얻기 위해 기름을 게걸스럽게 빨아먹고 있을 터. 나도 시장기가 돈다. 이곳 회의실을 뜰 때가 온 것 같다. 이제부턴 저들이 여기서 무슨 짓을 하건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이곳에서 내가 계획한 건 다 이루었으니. 이제 남은 것이라곤 오늘 저들에게 생긴 상처가 쉽게 아물지 못하게 하는 일뿐이다. 그러려면 상처 부위가 아리고 쓰리도록 계속 문질러줄 필요가 있다. 딴생각일랑 머릿속에 얼씬도 못 하게 해놓고 오로지 낮에 있었던 일만 줄창 떠올려줘야 한다는 말이다. 자신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굳게 믿게끔 하고 반면에 상대를 향한 원망과 증오심은 왕창 북돋워 줄 필요도 있다. 밤이 늦도록 침대에서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던 회장으로 하여금 전화기를 들게만 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대성공일 텐데.



에필로그 1.

어라, 벌써 자정이 넘었네. 벌써 몇 시간 동안 똑같은 생각을 되풀이하고 있다. 도대체 이게 뭐람?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네. 회의가 왜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흘러갔는지 말이야. 이제껏 살아오면서 이런 적은 없었다. 그 많은 회의들, 부서업무추진회의, 임원티타임, 전사운영회의, 비상경영회의, 품질최고회의, 식스시그마챔피언대회…. 삼십여 년이 넘는 직장 생활에서 별의별 회의에 다 관여해 봤어도 오늘 같은 경우는 처음이야. 결국 3부 기도회는 시작도 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잖아. 참담한 기분이다. 리더십이 없다는 말까지 듣다니. 조집사, 내년 봄엔 장로가 돼야지. 선임장로의 말이 떠오른다. 그래, 다섯 달 뒤면 장로를 뽑는 공동의회가 있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어. 꼭 마귀에 홀린 기분이라니깐. 매끄럽게 진행되던 회의 분위기가 언제부턴가 꼬이기 시작했어. 그래 맞아. 전임회장 그 녀석이 말문을 연 뒤부터 그랬어. 그런데 내 입에서 그 말은 왜 튀어나온 거야? 복잡하게 생각지 말고, 라는 그 말 말이야. 그 친구가 복잡해진 것도 그때부터잖아. 느닷없이 회장과 임원도 기념품 지급 대상에 포함되느냐고 물었고, 그렇다고 했더니 회장과 임원은 당연히 출석해야 하는 사람인데 왜 개근기념품을 주냐고 따졌지. 그게 그렇게 꼬치꼬치 따질 사안이야? 그따위를 치사하게 물고 늘어지다니, 전임회장이라는 작자가 말이야. 기념품 그까짓 게 몇 푼이나 된다고. 하기야 몇 달 전엔 출석률 계산 방식을 갖고도 원칙이 어쩌구저쩌구하며 떠들었던 친구니깐. 그런데 참, 기념품 품목이 뭐고 가격이 얼마인지는 왜 밝히지 않았지? 이러다간 꼬박 밤샐지도 모르겠네. 새벽기도는 어떡하나? 나가야지. 그럼, 그래야지. 나가야 하고말고. 그런데 오세창, 이 녀석은 편히 자빠져 자고 있을 거 아냐. 아,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지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충전 중인 휴대폰을 연다. 이건 뭐야? 기드온 카톡에 배상호란 친구가 올린 글이 올라와 있다. 어제 오후 다섯 시에 발송된 기도문이다.



에필로그 2.

우리를 스올의 깊은 곳에 내리기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기도온선교회 카톡에 올라와 있는 기도문의 첫 구절이다. 우리로 하여금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싸우지 않게 하시고, 어둠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을 대적하여….

아내 방은 불이 꺼진 지 오래다. 올해 초 중학교 교감으로 명예퇴직한 뒤로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왜 다들 나를 보고 복잡한 사람이라는지 모르겠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처음 그 말을 들은 것은 교육감 방에서였지.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생각하시죠. 교장 승진 추천 명단에 내 이름을 올릴 수 없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한 후 교육감이 마지막에 덧붙인 말이었다. 사실 복잡한 쪽은 교육감이었다. 명퇴, 하라는 말을 그토록 이리저리 에둘러 말하지 않았나 말이다. 그것도 한 시간 동안이나. 오교감님,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생각하시죠, 라는 그 말 때문에 오세창이라는 내 이름이 왜 승진 추천 명단에 올라갈 수 없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나는 오히려 복잡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마음 또한 편치 않았다.

석 달 전 아내와 함께 동대문시장에 갔을 때도 그랬다. 동대문시장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창고 대 방출, 이라는 광고문이 쓰인 풍선 인형이 나풀거리고 매대 위엔 이런저런 색깔의 양말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가게에서였다. 한참 동안 골랐지만 마땅한 게 없어서 망설이는 데 주인이란 작자가 다가와 불쑥 말을 던졌다. 여태 복잡하게 살아오신 모양인데 지금부턴 좀 편하게 사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정말 꼭지가 도는 기분이었다. 그는 이를테면 이런 핀잔을 준 셈이었다. 여보슈, 손님 양반. 겨우 양말 한 켤레를 사면서 시시콜콜 따지고 자시고 할 게 뭐 있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퍼뜩 아무거나 하나 집어 가시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내 인생에서 가장 치명적이었던 순간을 소환할 수밖에 없는 그 말을 뜻밖에도 동대문 저잣거리에서 듣게 될 줄이야.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물건을 사고 안 사고도 내가 정할 일이거니와 새파랗게 젊은 친구가 어따 감히 그따위 잔소리를 해? 평생을 후학을 가르치는 일로 살아온 내게 말이야. 아니 나더러 복잡하게 살아왔다고? 그 말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말이었다. 평소 학생들에게 세상 복잡하게 살지 말아라, 제발 잔머리 굴리지 말고 살아라, 라는 말을 수없이 해왔고 나 역시 그렇게 살아왔다고 믿었는데 그것을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말을 그렇게 함부로 지껄이다니 말이다. 그렇다고 지금껏 교육자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온 사람이 시장통 한복판에서 대거리질을 할 수도 없는 노릇.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분을 삭이는데 정작 비비 꼬인 심사에 불을 지른 것은 옆의 아내였다. 그러게 말이에요, 저이가 양말 하나 갖고도 저리 복잡하게 까탈을 부린다니깐요. 집을 나설 때부터 아내가 가자는 곳이 백화점이 아니어서 은근히 못마땅했던 나는 가게 주인을 제쳐놓고 아내에게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고, 마침내 지나가는 젊은 남녀들이 힐끗거리는 큰길에서 삿대질을 해가며 아내와 대판 싸웠다. 그 일로 우리는 별거와 다름없는 분방을 하기에까지 이르렀고 지금도 서로 데면데면한 사이다. 오늘 아침에 구멍 난 양말을 신고 교회에 갈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오늘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라는 그 말 때문이었다. 졸고 있던 내가 눈을 뜬 것도 그 말 때문이 아닌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심사가 틀어졌다. 머리가 갑자기 복잡하게 돌아갔고 왠지 사사건건 따지며 물고 늘어지고 싶어졌다. 무슨 영문인지 그때부터 회장의 실크 와이셔츠가 시시때때로 눈에 어른거렸다. 커프스버튼과 소매 깃에 새겨진 영자 이름도 함께. 그런데 그럴 적마다 다림질을 하지 않아 꼬질꼬질한 내 바지와 광택을 잃은 지 오래된 낡은 구두가 내 시야에 들어오는 건 도대체 무슨 일이며, 구두 속에 신은 양말의 뒤꿈치 구멍까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또 뭐람. 사실 나도 처음부터 회장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마음먹었던 건 아니지 않은가. 회장단에 일임해 주면 안 되겠냐고 했을 때 그도 자기 체면을 최대한 살리면서 안건을 유야무야로 얼버무릴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생뚱맞게도 지지난 주 교회 앞 샤브샤브식당에서 회장과 주고받은 말이 불현듯 생각났다. 우리 어머니는 남자는 무릇 먹는 걸 잘 먹어야 한다는 말을 평소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했더니, 아냐, 우리 아버지는 남자는 모름지기 입는 걸 잘 입어야 한다고 했어, 라고 회장이 맞받아쳤던 건 말이다.

내년 봄엔 어떡하든 장로가 되어야 할 텐데. 이게 벌써 몇 년째야? 매년 후보로만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교장 승진을 못 한 것만 해도 속상한데 말이야. 아닌 밤중에 전화벨이 울린다. 휴대폰 액정에 회장의 이름, 조영탁이 떠 있다.

"여보세요."

시치미를 떼고 전화를 받는다.

"야아, 오세창. 너 그럴 줄 몰랐어."

다짜고짜 반말이 휴대폰 저편에서 들려온다.

"…."

"양말 하나 주겠다는데 그렇게 난리를 쳐?"

"양말?"

"그래, 새끼야, 양말이다! 3천 원짜리 양말. 한 켤레 3천 원."

"…."

"너 임마, 앞으로…."

갑자기 전화가 끊어진다. 멍해진 머릿속에 나더러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했던 사람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교육감, 양말 가게 주인, 아내, 조영탁, 또….



에필로그 3.

후르후르님에게 보고해야 할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다. 스크루테이프 삼촌에게는 보고를 안 하느냐고? 거기에 대해서는 설명을 좀 필요로 한다. 마지막 편지인 서른한 번째 편지에서 삼촌은 더 이상 예전에 내가 알던 삼촌이 아니었다. 내 환자, 피터가 갑자기 원수의 나라로 떠나버린 것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비난과 책망을 늘어놓았고 악담을 퍼붓기도 했다. 다 잡은 영혼 하나를 허무하게 놓쳐버렸다고, 모든 것이 허사가 되어 버렸다며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진다는 말도 했다. 그까지는 좋았다. 결과가 나 스스로 생각해도 기대에 못 미친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내가 삼촌에게 결정적으로 등을 돌리게 된 것은 그의 질책 때문이라기보다는 서른한 번째 편지의 마지막 인사말 때문이었다. 너를 아끼는 삼촌, 이라던 편지 말미가 여느 때와는 달랐다. 너를 더더욱 게걸스럽게 탐내며 아끼는 삼촌, 이라니? 이 말 한마디로 삼촌은 내게 오랫동안 감춰온 자신의 독니를 드러내고 말았다. 오른쪽으로 마구 휘갈긴 사인, Screwtape, 의 필체에도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 그의 식욕이 묻어있었다. 나는 소름이 끼쳤다. 나를 먹이로 여기다니. 하지만 앉아서 당할 수는 없었다. 탄원서를 냈다. 사실 그동안 나로서는 내 환자에게 최선을 다했고 또 삼촌의 지침에도 더할 나위 없도록 충실했다. 내가 관리하던 환자의 천국행이 문제가 된다면 삼촌 또한 함께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사안이 아닌가? 탄원서라 해본들 삼촌이 내게 보낸 편지가 대부분이었고 그것을 몽땅 재판소장인 스캡트리님께 보낸 것이다. 삼촌은 악마로서 의심받을 만한 사상을 더러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다섯 번째 편지에서 언급된 전쟁에 관한 견해가 그랬다. 유럽대륙에서 두 번째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내가 기뻐서 미치겠어요, 라고 했더니 삼촌은 나를 진짜 미친놈으로 취급했다. 전쟁이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일만은 아니라는 등 이상한 궤변을 늘어놓기도 하고 전쟁에서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말라는 수상쩍은 말을 하기도 했다. 내 생각은 달랐다. 전쟁이야말로 인간들로 하여금 너는 정녕 죽으리라고 한 그 양반의 잔인한 저주를 사무치도록 체험케 해서 그의 정체에 대해 의심의 불을 댕기게끔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우리가 추구하는 분열 사역의 최고봉 또한 바로 전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탄원의 결과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다. 당시 인간들 세계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큰 전쟁이 모두 스캡트리님의 작품인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 탄원서에서 서른한 번째 편지는 뺐다. 피터 건이 아무래도 나한테 유리할 것 같지 않은 꺼림칙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정말 알 수 없는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삼촌의 편지가 몽땅 책으로 발간된 것이다. 그 편지 뭉치가 어떤 은밀한 통로를 통해 루이스라는 판타지 소설 작가에게 전달되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는 수수께끼다.

예상대로 재판소장인 스캡트리님은 노발대발했다. 하지만 그가 공식적으로 문제 삼은 것은 내가 생각한 것처럼 전쟁에 대한 견해차라든가 하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니었다. 뜻밖에도 편지마다 삼촌이 서두에 쓴 '사랑하는 웜우드에게' 가 문제였다. 사랑이라는 말, 그것은 저들 인간들에게 에덴동산의 선악과가 그랬듯이 우리 세계에선 절대적인 금단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스크루테이프, 그가 지금 어디에 있냐고? 그건 답변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아버지와의 전투에서 패한 벨제뷔트가 어디로 사라졌느냐고 묻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악마재판소에서 형사재판의 결과에 따라 합법적으로 삼촌과 더불어 연합과 일치-벨제뷔트 사건 이후 아버지가 정한 규칙이었다-를 이루었을 뿐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다만 나 또한 삼촌을 닮아 게걸스러운 데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는 정도는 덧붙일 수 있겠다. 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말이다.

이젠 정말 집으로 가봐야겠다. 조카 파이몬한테 편지가 와 있을지도 모른다. 파이몬한테 답장을 쓸 때 나도 망설일 것 같다. 사랑하는, 이라는 말이 우리 세계에서 금단의 언어라면 탐스러운 파이몬에게, 라고 시장기를 솔직히 고백하는 말로 시작해야 할지.



-끝-
제20회 기독신춘문예 당선작 발표        |  2023.01.10 16:41
신인답지 않은 능란한 솜씨... 창조적 의미 전달하는 생명력 담길    소설 심사평    |  2023.01.12 08:44
"눈먼 눈으로 세상 비추는 시 쓰고 싶다"     시 당선소감    |  2023.01.12 08:44
신춘문예 시당선작/ 눈먼 자의 기도 외 1편     시 당선작 글: 우현준    |  2023.01.12 08:44
빛과 소리에 관련한 상상, 극적으로 표상해 내     시 심사평    |  2023.01.12 08:44
소설 쓰기, 의무감으로 무겁게 다가오는 계기     소설 당선자 강현규 씨 당선소감    |  2023.01.11 10:00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