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하는 아들(호 11:1~4)

내 사랑하는 아들(호 11:1~4)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6

강성열 교수
2021년 09월 15일(수) 17:23
호세아 11장 1~4절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보면서, 아들인 이스라엘의 반역이 얼마나 배은망덕한 것인가를 고발하는 유명한 본문이다. 호세아는 그러한 고발의 근거로 어린 아이와도 같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내용을 가진 1~4절은 하나님의 사랑과 이스라엘의 배신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1절); 이스라엘의 배신(2절); 하나님의 사랑(3a절); 이스라엘의 배신(3b절); 하나님의 사랑(4절).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함에 있어서 그 죄악의 구체적인 실상을 낱낱이 지적하는 방법을 쓰기도 하지만, 때로는 비유적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고발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를 부부 관계로 보는 결혼 은유이고(1~3장),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를 부모~자녀(더 정확하게는 아버지~아들) 관계로 보는 11장 1~4절의 자녀 은유이다. 호세아는 특히 1절에서 이스라엘을 "내 아들"이라고 칭하면서, 하나님이 어린 아이와도 같은 이스라엘을 어떻게 자신의 자녀로 선택하시고(1절) 계속해서 양육하셨는가를(3절)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보고 이스라엘을 그의 자녀(아들)로 보는 은유는 꼭 호세아서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신명기(14:1; 32:6), 이사야(1:2; 43:6; 63:16; 64:8), 예레미야(3:4, 19, 22; 4:22; 31:9, 20), 말라기(1:6; 2:10) 등도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로 본다. 그러면서도 이들 본문에 나오는 부모~자녀 관계는 호세아 11:1~4에서처럼 출애굽 해방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다. 그냥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부모~자녀 관계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출애굽기 4:22~23은 다르다. 이 본문은 호세아 본문과 똑같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녀(아들)로 인정된 것이 출애굽 사건에 의해서였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것은 호세아가 출애굽 본문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기원을 출애굽 사건에서 찾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러내셨을 때가 1절에서 어린 아이였을 때로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며, 이스라엘의 광야 유랑 시대를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가 시작된 이상적인 시기로 보는 2:14~15과도 거의 일치한다.

1절이 이렇듯이 출애굽 사건과 광야 유랑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2절은 가나안 정착 이후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점에서 2절은 1절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은 어린 아이 시절의 이스라엘에게 부모와도 같은 사랑을 베풀어, 그들을 종살이하던 이집트로부터 불러내시고 언약 관계를 통하여 그들의 역사에 계속해서 관여하셨다(1절).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에게는 아버지와도 같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상응하는 행동, 곧 자녀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행동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효과적으로 응답하지 못하고 도리어 반역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2절).

호세아가 보기에 이스라엘의 반역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그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거부했다는 데에 있다. 하나님이 사사들이나 예언자들을 비롯한 여러 일꾼들을 통하여 그들을 부르면 부를수록 그들이 점점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갔다는 사실이 그 점을 잘 보여 준다(2a절). 이스라엘의 반역은 두 번째로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율법이 금하고 있는 우상 숭배의 죄악에 빠졌다는 데에 있다(2b절). 그들은 언약 규정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 사항, 곧 하나님 이외의 다른 어떠한 신도 섬겨서는 안 된다는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출 20:3)조차도 지키지 못한 채로, 계속해서 바알들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아로 새긴 신상들에게 분향했던 것이다.

이렇듯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의 배신은 전적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었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녀 양육의 경험이 있던 호세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반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어린 아이에게 걸음마를 가르치고 그의 팔로 안아 주시는 인자한 부모와도 같이, 이스라엘에게 끝까지 사랑과 관심을 베풀어 주셨다고 봄으로써, 이스라엘의 탈선 원인이 결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힌다(3절).

실제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신 후에 그들을 광야에서 안전하게 인도하셨으며(민 9:18) 그들의 고통을 친절하게 고쳐 주셨다(출 15: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고치시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부모와도 같은 분임을 도무지 깨닫지 못한 까닭에, 그가 역사의 순간순간을 통하여 자기들을 안전하게 인도하시고 자기들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구해주시고 고쳐 주셨음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호세아는 1~3절에서 계속해서 자녀 은유를 사용하다가 4a절에서 멍에를 맨 짐승의 은유로 잠시 옮겨간다. 그리고 4b절에서 다시금 자녀 은유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4a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멍에를 맨 짐승과도 같은 이스라엘을 마치 어린 아이에게 걸음마를 가르치고 그를 가슴에 품어 키운 것과 똑같이 사람의 줄 또는 사랑의 줄로 인도하심으로써 그들을 인간적으로 대하신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마치 자비로운 주인이 짐승의 멍에를 가볍게 해 주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신다. 하나님은 또한 스스로의 힘으로 음식물을 먹지 못하는 어린 아이와도 같은 이스라엘을 위해 자신이 직접 몸을 굽혀 그에게 음식물을 먹이신다(4b절). 이것은 아마도 이스라엘의 광야 유랑 기간 동안에 하나님이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실제로 먹이신 일을 가리킬 것이다(출 16:4~35; 민 11:4~34; 신 8:3, 16).

강성열 교수 / 호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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