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살아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3~27a)

반드시 살아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3~27a)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3

강성열 교수
2021년 09월 02일(목) 17:14
시문체로 되어 있는 욥기의 본론 부분(3:1~42:6)은 전반부에서 욥과 그의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세 개의 순환 논쟁(3~14장; 15~21장; 22~31장)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논쟁의 각 바퀴에서 욥은 엘리바스와 빌닷 및 소발의 말에 순서대로 응답하는 자로 나타난다. 세 개의 순환 논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말하는 자들 사이의 적대감은 점차 늘어나며, 그들 사이의 견해 차이는 점점 굳어진다. 친구들의 말은 욥이 자기들의 가르침에 반발하고 있음을 그들이 깨닫는 중에 점점 짧아지고, 그럼으로써 그들 사이의 대화는 마침내 중단되고 만다. 오늘의 본문인 욥기 19장은 두 번째 순환 논쟁에 속한 것으로, 빌닷의 두 번째 말에 대한 욥의 답변을 담고 있다. 특히 23절 이하는 부활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는 본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3~24절: 욥이 23절에서 언급하는 "오…했더라면"이라는 표현은 욥기에 자주 나타나는 양식이다. 너무도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이 연속되다 보니, 될 법하지 않은 미래를 가정하여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아주 간절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한 표현 방식은 그의 무죄 주장이 죽음 이후에도 누구나 계속해서 볼 수 있도록 항구적으로 기록되기를 바라는 희망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의 이 말은 자신의 명예가 회복되기 전에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가 사로잡혀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에 자신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로 고통과 좌절 속에 빠져 있기만 한다면, 자신의 무죄함이 자신의 죽음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에서 금방 사라지고 말 것이요, 자신의 운명이 위선자의 비극적인 결말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고 말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을 것이다. 이에 그는 자신의 억울한 상황(=무죄 상황)과 하나님을 향한 항변이 영원토록 책이나 돌에 낱낱이 기록됨으로써, 언젠가는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거나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속내를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25절: 자신의 억울함이 기록으로 남겨져 모든 사람에게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욥은 갑자기 분위기를 바꾸어 25절에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강한 확신을 표현한다. 이것은 마치 시편에 있는 탄원의 노래에서 고통과 절망과 슬픔 등의 어두운 현실을 탄식의 언어로 진술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고백 또는 응답의 확신으로 돌아서는 것과도 비슷하다. 23~24절이 현실 세계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을 간절히 소원하는 내용을 탄식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면, 25절은 하나님의 응답과 구원을 매우 강한 확신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갑자기 바뀐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는 25절은 자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비추어 해석되는 유명한 본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단은 이 구절의 의미를 먼저 욥의 의도에 비추어 해석할 필요가 있다. 달리 말해서 이 구절이 전후 문맥에서 어떠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느냐 하는 것에 일차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얘기다. 욥은, 설령 자신이 죽는다 할지라도, 자신의 친족 중에 있는 대속자(redeemer, 히브리어 '고엘')가 살아남아서 장차 자신의 정당함을 입증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굳게 붙든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대속자는 욥을 위한 증인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그의 입장을 대변하고, 또 그를 비난하는 자들 앞에서 그의 무죄함을 선포할 자를 일컫는다. 이 '고엘'은 욥의 주장이 반드시 청취될 것임을 보증하고, 욥이 법정에 있건 없건 관계없이 그의 주장을 변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지만 말이다.

'고엘'의 대속 활동에 대한 이러한 기대를 통하여 욥은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넘어서서 한층 밝은 미래의 빛을 얼핏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욥의 이러한 기대감과 발견은 멀리 볼 때 그리스도의 중재자 내지는 구속자 역할에 관해 말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이 본문이 처음부터 직접적으로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욥을 위한 대속자의 활동은 훨씬 후에 인류의 대속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직과 연결될 수도 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구약 본문은 때때로 이스라엘을 압제와 속박의 땅 이집트에서 건져주신 야웨 하나님을 '고엘'('구속자')로 일컫고 있기 때문이다(사 41:14; 43:14; 44:6, 24; 48:17; 49:7, 26; 54:5; 60:16).

26~27a절: 욥은 자신이 극심한 질병과 고통으로 인하여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이 점은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에 힘입어 자기 눈으로 하나님을 직접 보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세 번에 걸쳐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확인된다: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26~27a절). 욥의 이 말은, 죽음에 직면한 그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 있는 몸으로 하나님을 직접 보리라는 확신을 표현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욥의 죽음 이전에 기적적으로 개입하여 그를 이전 상태로 회복시켜주시리라는 확신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실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욥은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낯선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아는 사람으로서 보게 될 것이다. 실제로 욥은 나중에 폭풍우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그의 답변을 들으며,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라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기에 이른다.

강성열 교수 / 호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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