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두 여성의 이야기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두 여성의 이야기

[ 최은의 영화보기 ] ‘호구’라 불리는 그들: 세기말의 사랑(2023)

최은 영화평론가
2024년 04월 25일(목) 10:00
영화 <세기말의 사랑> 스틸컷.
'정직테크'의 경리과장 김영미(이유영)는 외모가 비호감이라는 이유로 직장동료들 사이에서 '세기말'이라고 불린다. 노골적인 혐오 시선 때문에 영미는 직원식당을 이용하는 것조차도 불편한데, 혼자 밥을 먹는 그녀 앞에 한 남자가 다가온다. 다정한 말을 건네며 영미의 식판에 소시지를 나눠 담아주는 남자는 배송기사 구도영(노재원)이었다. 이후 영미는 구도영이 빼돌린 미수금을 도영 본인도 모르게 채워 넣느라 밤잠을 못 자고 부업을 한다.

새 밀레니엄을 앞둔 1999년 12월 말일, 모시고 살던 큰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영미가 완전히 혼자가 되었을 때, 도영은 회사 사람들 중 유일하게 장례식장에 나타났다. 떠돌던 소문대로라면 몇 시간 후 지구가 멸망할지 모른다는 공포로 불안하던 영미는 도영에게 그날 밤 함께 있어달라고 말한다.

흑백이던 영상이 컬러로 바뀌면 새천년이 시작되고도 9개월이나 지나 있다. 하지만 세상의 종말은 오지 않았고 영미의 일상만 끝장이 났을 뿐이다. 영미는 횡령방조죄로 수감되었다가 막 출소했는데, 몸이 불편한 도영의 아내 조유진(임선우)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영미는 졸지에 까칠한 장애인 연적과 동거하며 그녀의 손발이 되어주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장편 데뷔작 '69세'로 나이든 여성의 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을 다루어 호평을 받았던 임선애 감독은 두 젊은 여성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영미는 화낼 줄도 모르고 대책 없이 착하기만 해서, 유진은 복지센터 봉사자들에게 기피대상 1호일 만큼 입이 거칠고 까다로워서, 둘은 좀처럼 공감하기 힘든 사람들이다. 특히 유진은 영미에게 돈을 갚아야 할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영미를 몸종처럼 부리고, 박봉의 배송기사 남편의 카드빚에 아랑곳하지 않고 명품 구두를 사들인다. 게다가 도움 받는 처지에도 어쩜 그리 당당한지, 휴대폰에 '호구1', '호구2'라고 입력해 둔 남자들을 수시로 불러낸다. 다만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호구1, 2는 그 남자들이 아니라 유진이며, 영미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짝사랑하는 남자가 유부남인 줄도 모르고 그의 횡령액을 대신 갚아주고, 아들에게 버림받은 큰어머니 병수발을 하며 치료비를 대고, 그 아들인 사촌오빠에게 빌려둔 돈조차 받지 못하고 집에서도 쫓겨난 영미는 국가대표 호구라 불러도 모자랄 지경이다. 유진의 경우는 조금 더 입체적이다. 남편인 도영을 포함해서 유진을 돕는 사람들의 진심은 유진의 돈이나 신용카드, 장애인 혜택, 명품 신발과 같은 현실적인 조건들 때문에 종종 의심스럽다. 유진도 그 점을 모르지 않다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명령하고 요구하고 험한 말을 해도 유진은 이들과의 관계에서 어쩔 수 없는 약자이며 '을'이다. 예컨대 '호구2'인 오준(문동혁)이 유진의 명품을 죄다 짝퉁으로 바꿔놓고 진품을 제 여자친구에게 상납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유진은 모른체할 수밖에 없다. 오준이 더 이상 그의 집에 오지 않을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유진은 '이상한 여자'인 영미를 한눈에 알아보았고, 영미 또한 유진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난 왜 도영이를 구하고 싶었을까? 나도 날 못 구하는 주제에."라고 읊조린 유진의 말을 영미가 되풀이한다. "나도 날 못 구하는 주제에."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여자, 편견과 혐오의 일상에 노출된, 쓸데없이 다정한 한 남자를 사랑하는 닮은 꼴 두 여자가 만났다. 하여 바보 같아 보이는 '세기말(영미)의 사랑'은 유진의 사랑이기도 하다. 한 사람은 머물 집이 없고 한 사람은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 둘이 함께 살면서 서로를 돌보면 되지 않을까? 호구 닮은 약자들에게는 우정과 연대가 정답인가?

임선애 감독의 '세기말의 사랑'이 집도 가족도 없는 영미에게 불쌍한 유진을 돌보며 살라고 등 떠밀지 않은 것은 사려 깊고 고마운 일이다. 개인이 서로를 돌보고 짐을 나누어지는 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에게 돌봄 노동을 제공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외롭고 소외당한 사람들이 주인공인 이전의 영화들이 자주 그랬듯이, 대안가족이라는 익숙한 결론에 안착하는 대신 영화는 공적 돌봄과 복지제도의 무용을 주장하거나 냉소하지 않으면서도 모두가 성장하고 성숙하는 현명한 길을 찾아간다. 도움을 받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고자 스스로 애썼던 유진과 같이, 영미가 받을 몫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목소리를 갖는 일이 곧 성장이고 도전이었다.

영미와 유진은 늘 놀이공원 대관람차를 타고 싶었지만, 영미는 고소공포증 때문에, 유진은 몸이 자유롭지 않아서 꿈을 이룰 수 없었다. 미용대회가 있던 날 영미가 유진의 휠체어에 환한 전구를 달아준 것은 그러므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하늘 높이 올라 빙글빙글 돌며 세상을 내려다볼 수는 없지만, 땅을 굴러다닐망정 구를 때마다 반짝이는 바퀴의 성실한 빛을 보며 아름다움과 존엄을 지켜가는 일이란, 세기말과 같은 불안을 일상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호구들에게 영화가 선물하는 위로이고 비법이다.

최은 영화평론가 /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부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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