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독립선언서를 국내로 유입한 김마리아

2.8독립선언서를 국내로 유입한 김마리아

[ 선교여성과 교회 ] 김마리아 리더십 소고 ③

최상도 교수
2021년 04월 15일(목) 09:00
김마리아가 1917년(대정 6년) 일본 동경의 여자학원 고등과를 진학한 자료. / 한국기독공보DB
김마리아의 독립운동은 그녀가 동경여자학원 영문과 졸업을 한 달 앞두고 개최된 2.8독립선언대회에 참여하고 그 독립선언서를 국내로 비밀리에 가져오는 것으로 본격화됐다. 일본 유학중에도 한복 입기를 고집한 그녀는 2.8독립선언서의 국내로의 유입을 자청해 귀국할 때 기모노를 입고 그 안에 독립선언서를 숨겼다.

무사히 부산에 귀국한 김마리아는 기차로 광주로 이동하던 중 상해 신한청년단을 대표해서 온 큰 고모부 서병호와 셋째 고모 김순애를 대구에서 만나 동경 2.8독립선언 소식과 독립선언문을 전달하였고, 언니와 막내고모 김필례가 살고 있는 광주에서 회합을 갖고 독립운동을 모의했다.

이후 김마리아는 전국을 누비며 교육계, 종교계, 여성계 지도자들과 회합을 갖고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1919년 3월 1일, 황해도 재령 신천 등지에서 활동 중이던 김마리아는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돌아와 정동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여성지도자들을 만났다. 이때 마리아는 항일부녀단체 조직의 필요성을 주장해 이들과 함께 조직과 확대 방안을 모색했다.

3월 5일, 남대문역에서 다시 만세시위가 대대적으로 일어났는데 여학교 학생들도 참석, 다수가 일경에 체포됐다. 김마리아는 3월 6일 정신여학교 교무실에서 만세시위 주모자로 체포돼 서대문 감옥에 투옥됐다. 감옥에서도 함께 수감된 여성지도자들과 함께 독립을 위한 소통을 이어나갔다. 일경의 가혹한 고문으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상처를 입고, 예심종결 결정으로 감옥을 나온 마리아는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정신여학교 교사로 봉직하면서도 항일여성운동 활성화를 모색했다. 마침내 1919년 10월 19일 여성계 대표 18명이 모여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발족하고 초대 회장에 선출됐다. 부인회 취지서는 김마리아가 작성했다. 애국부인회는 발족 후 한 달여 만에 회원이 2000여 명을 돌파했고, 전국 지역지부와 하와이, 간도 등 해외지부까지 설치됐다. 애국부인회는 비밀리에 모은 군자금 2000원과 활동 취지문을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에게 송부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여성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애국부인회는 동지의 밀고로 일경에 발각됐고 핵심 간부가 모두 체포 연행돼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혹독한 고문으로 발병해 사경을 헤매던 중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병세가 악화돼 서울로 급히 상경하여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대구와 서울을 오가며 재판을 받았고, 마침내 3년형 판결을 받았다. 이미 몸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국내에서 활동이 불가했기에 중국망명을 결심하고 1921년 7월 21일 중국 웨이하이웨이에 도착하므로 망명길에 올랐다.

다시 상해로 이동해 그곳에서 동지와 친척들의 극심한 간호로 몸을 회복한 마리아는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몸의 회복과 안정을 위해 안창호 등이 결혼을 권유하고 주선했을 때 마리아는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고 반려했다. 오로지 독립운동에만 힘을 쏟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그녀는 여성 최초로 임시정부 황해도 대의원에 선출됐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대표로 125개 독립단체가 모두 모인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해 개막연설을 하는 등 상해에서도 여성독립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독립운동과 함께 그녀는 실력양성을 위해 끊임없이 배움을 이어나갔다. 그녀에게 실력양성이 곧 독립운동이었다. 이후 미국으로 간 마리아는 재미 한국학생연맹의 부회장으로 선임돼 귀국 때까지 사업을 주관했으며, 1928년 미국 뉴욕에서 여성항일단체 '근화회'를 조직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

형 집행 종료로 1932년에 귀국한 김마리아는 원산의 마르다윌슨 여자신학교에 교수로 부임해 후학 양성에 집중했으며, 이듬해 장로교여전도회 총회에서 7대 회장을 선출된 후 10대까지 4대에 걸쳐 회장을 맡아 여전도회를 크게 발전시켰다. 1938년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회장 김마리아를 중심으로 여전도회는 끝까지 반대했다. 이후 신사참배 반대의 의지로 여전도회 대회를 유회, 산회시키고 실행위원만 소집해 안건을 처리하는 등 여전도회 차원의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회피했다. 사역하던 마르다윌슨 여자신학교도 신사참배를 거부하므로 폐교되고 말았다.

여전도회와 여자신학교의 신사참배 거부의 중심에는 늘 김마리아가 있었다. 학교가 폐교되던 해 12월 7일, 원산의 자택에서 졸도해 중태에 빠진 그녀는 평양 기독병원에 입원했으나, 이듬해 3월 13일 향년 53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해 대동강에 뿌려졌다. 그녀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활동을 기려 1962년 3월 1일 정부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마리아는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체포돼 심문 받을 때, "나는 일본의 연호를 모르는 사람이라", "조선 사람으로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남자가 활동하는데 여자가 못 할 이유가 있소?"라고 항변했으며,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고 한평생 독립을 위해 헌신한 여성지도자였다. 1923년 도산 안창호는 "그 같은 여성동지가 10명만 있었다면 대한민국은 독립됐을 것이다"고 그녀를 평했다.



최상도 교수 / 호남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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