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첫 순교선교사 헨리 데이비스

부산의 첫 순교선교사 헨리 데이비스

[ 선교여성과교회 ] 경남지역 여전도회 1

탁지일 교수
2024년 03월 07일(목) 16:52
본 연재는 2022년 12월부터 전남지역 여전도회사를 50여 차례 다뤘다. 이제 탁지일 교수(부산장신대)가 집필한 '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100년사'를 통해 경남지역 여전도회사를 살펴본다. <편집자 주>

호주교회가 조선에 파송한 첫 여성선교사는, 부산의 첫 순교선교사 헨리 데이비스의 누이 매리 데이비스였다. 이후 헨리 데이비스의 순교에 도전받은 호주교회는 다섯 명의 후속 선교사를 다시 조선으로 파송해 본격적인 부산경남지역 선교를 시작하게 된다. 이들 첫 선교사들 중 네 명이 여성이었으며, 이는 호주교회가 여성을 위한 여성의 선교를 진행하게 되는 조건을 형성한다.

# 부산의 첫 순교선교사 헨리 데이비스

부산경남지역의 초기 복음화는 호주선교사들의 헌신과 조선사역자들의 협력으로 이뤄졌다. 그 시작은 선교사 헨리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 1856-1890, 덕배시)로부터 시작됐다. 1889년 10월 2일 그의 누이 매리 데이비스와 함께 부산에 도착한 그는, 서울에 머물다가 1890년 4월 4일 부산을 다시 찾았고, 다음날인 4월 5일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하지만 이는 선교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다.

조선선교의 소망을 품은 데이비스는 1889년 8월 28일 치난호(SS Tsinan) 편으로 호주 시드니를 출발해, 9월 21일 홍콩에 도착한다. 그리고 9월 27일 토코마루호(Tokomaru) 편으로 상해를 출발해 9월 30일 나가사키에 도착했고, 10월 1일 츠루가 마루호(Tsurugamaru) 편으로 나가사키를 떠나 10월 2일 이른 아침에 마침내 조선의 관문 부산에 도착한 후, 그날 오후 4시경 서울을 향해 출발해 10월 5일 서울에 도착한다. 약 6주 정도가 소요된 여정이었다.

데이비스는 조선선교에 대해 염려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최근에 조선에 왔고, 연합사역에 대한 경험도 미미했기 때문이었다. 동료 선교사들은 교육자로서의 경험이 풍부한 데이비스가 서울에 남아 지도적인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했지만, 데이비스는 1890년 3월 14일 부산선교를 위해 출발한다. 서울에 있는 동안 데이비스는 언더우드의 도움을 받아 서울과 인근 지역을 탐방하며 본격적인 조선선교를 준비한다.

이미 조선선교를 위해 헌신하기로 작정한 데이비스였지만, 연약한 자신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1889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 쓴 일기에는 한국어 친필로 "쥬야 나를 불샹이 넉여 나를 도아주쇼서 밋사오니 나의 밋음이 독실치 못함을 도와주쇼서"라고 기록하고 있다. 주님의 도움심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사역임을 데이비스는 깊이 느끼고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3월 14일 오후 1시 반경 서울을 출발한 데이비스는, 3주 뒤인 4월 4일 그의 첫 조선 기착지인 부산에 다시 도착하기까지, 매일 평균 20여 킬로미터 이상을 도보로 이동한다. 데이비스는 3월 25일자 일기에서 "아마도 영국인들 중에 이렇게 도보여행을 많이 한 사람은 내가 처음일 것이다"라고 적고 있어, 그의 도보여행이 평범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데이비스는 수원, 직산, 천안, 공주, 은진, 전주, 하동, 사천을 거쳐 부산을 향해 이동했다. 일기에는 날이 흐리고 비가 자주 내린 것으로 나타나있다. 데이비스의 일기는 1890년 3월 31일 사천에서 끝난다. 사천에서는 지방 관리들과의 마찰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데이비스는 도보여행 동안, 만나는 사람들에게 약을 제공해 치료를 도왔으며, 설교도 했고, 마가복음과 요리문답서 등을 열심히 판매하며 읽기를 권했다. 3월 30일에 기록한 "복된 주일이다. 혼자 산언덕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쉬면서 마가복음을 읽고 기도하며 묵상했다. 내가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서 있는지 두려운 마음이다"라는 내용을 통해 부산을 향해 걷고 있던 데이비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탁지일 교수 / 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 100년사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