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에 의연했던 여전도회

신사참배에 의연했던 여전도회

[ 선교여성과 교회 ] 전남 지역 여전도회 46

한국기독공보
2023년 12월 14일(목) 17:24
1930년대 일제의 군국주의 광란 속에서도 한국 기독교는 꾸준한 성장과 눈부신 전도로 선교사의 이정표를 기록했다. 하지만 1938년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함으로 신앙의 정체성에 일대 시험에 빠져들었다. 목사들이 줄을 지어 신사에 참배하고 일본에 대한 충성을 맹세할 때 여전도회의 지도자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한영신, 김마리아, 김필례 등 독립정신이 투철했던 믿음의 여장부들이 이끌던 당시 여전도회는 총회와는 정반대로 신사참배 거부라는 길을 선택했다. 우선 이들은 1937년에 맞게 된 창립 10주년 기념행사를 다음 해로 미뤄 버렸다. 국민의례를 강요당하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대회 소집 대신 실행위원회를 소집, 다음해 사업과 예산을 확정하고 위기를 모면했다.

창립 10주년 기념예배는 다음해 1938년에 드려졌으나, 1939년 총회와 함께 무사히 지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가열됨에 따라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졌고, 1940년 대회가 유회됐다. 이때는 신사참배를 반대한 기독교 학교들이 대부분 폐교됐고, 선교사들은 속속 귀국길에 올랐다.

태평양전쟁의 암운은 차츰 깊어만 갔다. 1940년에 들어 연합대회는 유회되고 실행위원회가 소집돼 모든 안건을 처리했다. 대회 대표로 김선경을 선출해 장로교 총회에 사업 보고를 하게 됐다. 김선경은 우선 대회가 유회된 것을 보고하고 그해 사업안과 예산도 보고했다. 장로교 총회는 일경의 감시를 받고 있었으며, 신사참배를 드린 후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1940년에 보고된 연합회의 모습이 보고서에 나타난다. △값비싼 숙박료 △배급으로 인해 식량구입 곤란 △기차 할인권 5할이 불가능 △전도사업비 부족 △교역자 사례비가 늘어남으로 적자 결산이었다. △총수입 : 2722원 70전 △총지출: 3780원 70전

전쟁 준비로 한국 백성의 모든 것을 공출당했던 일제 말기, 여전도회는 적자 예산을 면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이역 땅에서 고통받는 동포들을 위한 전도사업을 멈출 수는 없었다. 김순 호, 윤정희, 유안심 선교사들은 적자 예산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이민자 동포들을 위해 혼신을 다 바쳐 선교하고 있었다.

가중되는 역경 속에서도 1년 여전도회는 운영난을 타개하고 새로운 대책을 모색하기 위해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대회를 개최했다. 예상대로 일경은 국민의례 거행과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이에 회장단은 긴급 실행위원회를 소집하고 대책을 숙의했다.

마침내 실행위원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연합대회를 해산시키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이순남 회장이 불참한 가운데, 부회장 김마리아는 회원 앞에 나가 실행위원회의 결정을 알리고 산회를 선포했다. 그리고는 증경회장 한영신에게 마지막 기도를 부탁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우리에게 범죄와 불신앙을 강요하는 저 조선형사들에게 벌을 나리사 저들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한영신의 기도와 함께 회원 전원이 통곡하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한 경관들은 해산을 명하고 김마리아를 체포하려 했다. 그러나 김마리아는 이미 몸을 숨긴 뒤였다. 대회가 유회된 후에도 일경은 여전도대회와 지방 전도회들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김마리아, 한영신, 신의경 등 여전도회 지도자들은 3·1운동의 혁혁한 여성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감시는 더욱 강화됐다. 장로교 여성들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지방에서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경남 마산의 최덕지 전도사 외에도 많은 장로교 여성들이 신사참배 거부운동에 참여했다.

'죽으면 죽으리라'의 저자 안이숙,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어 감옥 안에서 민족의 독립과 신앙의 관례를 터득한 여성독립운동가 김두석, 전남회원인 조아라, 최덕지와 함께 구속됐던 경남의 조수옥, 염애나 등 수많은 장로교 여성들이 신사참배를 신앙과 민족운동에 결부시켜 항거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여전도회는 황군 위문금을 내고 황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일에 동원되는 등 부일협력의 행태를 피하지 못했다. 1943년, 장로회 총회가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변질되자 이 해를 마지막으로 지하로 숨어버린다.

1928년 식민지 통치하에서 태어나 1943년 식민통치의 탄압으로 지하로 잠적되기까지 15년 동안 여전도연합대회는 식민지 억압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중국 산동성의 무지하고 가난하고 억압받던 민중여성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하며, 고난에 찬 동양 여성들과 연대를 나눴다.

또한 식민지의 온갖 고난과 멍에를 짊어진 채 제 땅을 빼앗기고 떠밀려간 가난하고 참담한 이민동포들을 위해 따뜻한 위로와 삶의 용기를 북돋우며 독립의 희망을 기독교 복음을 통해 나눴다. 안으로는 장로교단의 독선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신학 풍토와 교회제도에 항거하며 혁신의 길을 모색했고, 밖으로는 일제의 침략적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했다.

일제 치하에서 여성 지도자들은 군수체제에 필요한 금 및 금제품을 모으는 일, 황군 환송영, 황군 원호 강화 및 국방비 헌납 등에 동원됐다. 조선임전보국단은 1942년 이들 부일 진영을 망라하여 조선 임전보국대 부인대를 발족시켰다.

뿐만 아니라 학도병 강제동원령(1943년 10월 20일)이 내려지자 지도급 인사들은 학병 독려를 위한 제반 활동에 나서게 됐다. 이에 동원된 여성 지도자들은 호별방문 또는 권설대로 파견됐다. 1943년 11월 15일 조선교화 단체연합회의 권설대 출발 명단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문인들이 총망라되었다. 감사한 것은 소위 기독교인으로 신여성 리더들 가운데 김필례와 현덕신, 박화성 같은 전라남도의 여성 지도자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전남 여성운동의 대모들이 친일 전선에 나서지 않고 명예를 지킨 모습이 당당하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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