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 참배와 전쟁

신사 참배와 전쟁

[ 선교여성과 교회 ] 전남 지역 여전도회 45

한국기독공보
2023년 12월 07일(목) 16:55
일본 제국의 신사참배 강요는 1937년부터 노골화됐다. 1910년 항일 병탄 이후 최고의 긴장과 결단의 시각이 교회 앞에 요구되는 시기였다. 1938년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의결하니 지방 노회들도 비켜갈 수 없었다.

남장로회의 홀턴(Darby Fulton) 선교부 총무는 아버지가 일찍이 일본 선교사로 근무했었기에 일본인들의 정서를 꿰뚫고 있었다. 그는 1937년 2월 한국을 방문해 신사참배에 대한 적극적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교단적 영향으로 1937년 말, 남장로회 산하 이일학교와 수피아 등 미션 스쿨들이 자진 폐교함으로 신앙의 정절을 지키려 했다.

1938년 2월 미나미 조선총독은 특히 장로교회에 대해 강압적 시정 방침을 세우고 서서히 신사참배 강요로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우선 장로교회 중 지역적으로 교세가 막강한 평양과 평북노회를 시작으로 교회를 집중 공략했다.

때마침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1938년 9월, 평양 서문밖예배당에서 개최됐다. 총회 개최에 앞서 각지 경찰서장은 노회 대표들에게 다음 3개 조건 중 하나를 택하게 했고 불응하는 사람은 검속· 투옥해 총회 장소에 나갈 수 없게 했다. 그 세 가지는 ① 총회에 참석해 신사참배 찬성에 동의(同議) 할 것 ②신사 문제가 상정되면 침묵을 지킬 것 ③위의 두 조항을 실행할 의사가 없으면 총대를 사퇴하고 출석하지 말 것 등이었다.

일제는 교역자 중 변절자를 내세워 유혹과 협박을 하게 했다. 그 결과 1938년 2월 9일 전국 노회 중 평북노회가 가장 먼저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고 국가 의식임을 인정한다'는 결의를 하게 됐다. 이를 시작으로 전국 각 노회들이 잇따라 같은 전철을 밟았다.

9월엔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앞장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호남지방도 예외가 아니었다. 1938년 춘기 노회 때 가을 총회를 기다릴 것도 없이 각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했다. 4월에는 제주노회가, 이어서 순천노회, 전남노회가 각기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그 와중에 순천노회에선 신사참배를 의결하고 돌아오니 애양원의 문둥이들이 담임 목사인 김응규를 내쫓았다.

그는 이후 제주 한림으로 옮겨가 아예 일본식으로 창씨 개명도 하고 목회했다. 김응규 후임으로 애양원을 맡게 된 이가 손양원 전도사다. 총회가 끝난 후 마음으로 승복하지 않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개인 혹은 집단으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여기에 선교사들의 움직임도 있어 정신적 유대는 들불처럼 번져갔다.

남장로회 선교부에서는 9월 28일 광주에서 임시회의를 소집하고 신사참배에 찬동한 노회와 총회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숙의했다. 그 결과 선교사들은 각 소속 노회로부터 탈퇴하고 개인전도 사업에만 전력하기로 했다.

다만 1938년 경부터는 선교사들의 순회 전도 사역마저 허락되지 못했다. 이때가 소위 1937년 일본이 루거우차오사건을 바탕으로 중국을 침략하면서 중일 전쟁이 시작됐고 미국의 대(對)일본 금수조치에 맞서 인도차이나 지역으로 전선을 확대했던 때였다. 미국과의 미일 통상 조약은 파기된 1939년 이래 양국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고 그 결과 일본이 진주만 폭격을 감행한 1941년, 전쟁 개시 2년 전의 일이다.

전주지부의 반리라(lena Fontaine)와 광주의 유화례 선교사가 전주 인근의 불신자 가정을 방문하기 위해 순회방문을 나서기도 했다. 이들은 이미 경찰로부터 선교사를 가정이나 교회로 들이지 말고 이들과 대면하지 말라는 일본 경찰로부터의 유무형의 압력을 받았다. 심지어는 이들이 시골에 나가 머무를 여인숙 방 하나 잡기가 어려워졌다. 선교사를 유숙시키면 범법자로 간주했기 때문에 여관주인들이 거절한 탓이다. 심지어는 개교회 지도자들로 하여금 선교사들에게 자신의 교회를 방문하지 말아 달라는 편지를 보내도록 만들었다. 보통 선교사 한 사람당 40여 교회를 순회하며 돌보던 시절이지만 교회 지도자들이나 교인들로부터 이런 방문거절 편지를 받아야 했던 선교사들의 마음은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편지가 선교사들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이들 교회 지도자들이 저간의 형편을 알리면서 경찰의 압력으로 편지를 보내게 됐다는 사죄의 편지를 먼저 받아보는 기이한 일조차 벌어지기도 했다. 이 무렵 대부분의 목사와 교회들이 마지못해 신사참배를 받아들였다.

금정교회의 이경필, 양림교회의 김창국, 목포 양동교회의 박연세, 전주 서문교회의 김세열 목사 등이 창씨개명과 신사참배에 참여했다. 신사참배에 동조한 교회들은 일본 경찰의 지침에 동조하고 복종한 대가로 경찰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예배를 드렸고 목사들은 악취 나는 감방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됐다. 그야말로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의연하고 장부다운 믿음의 결기를 보여주지 못한 졸작들이었다.

1941년 12월 7일 미국은 일본 제국에 경제제재와 석유 금수 조치를 취하고 이에 반발한 일본 전함이 진주만을 공격함으로 미일간 전쟁 상태에 돌입하고 모든 선교사들은 자진 출국 형식으로 한국을 떠나게 된다. 한국에 와 있던 선교사들이 추방당하고 자리를 비우자 선교부 재산에 대한 일본 당국의 야심이 드러났다.

유화례(Florence Root)와 도마리아(Mary Dodson), 타마 자(John V. Talmage) 부부가 선교부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잔류를 결정했으나 12월 8일부터 1942년 6월 1일까지 121일간에 걸쳐 광주에서 연금 상태가 됐다. 이들은 일본 정부의 추방 결정으로 6월 16일 고베를 거쳐 사이공, 마프토(모잠비크)를 거쳐 8월 25일 스웨덴 국적선 그립스홀름 호로 뉴욕에 도착한다.

미국과 적대적 상태로 뒤바뀐 일본은 그동안 선교사들 때문에 한국인들에 대해, 특히 기독교 교인들과 교회에 대한 압박을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들을 보호하던 보호막이 사라진 셈이다. 더러는 선교사들과 가까이 지냈던 이들을 잡아다 미국의 앞잡이라는 명목으로 취조하고 구금시켰다. 광주에서는 최흥종 목사와 여성 지도자인 김필례, 조아라 등 선교부와 각별한 관계 를 유지하고 있던 이들이 가혹한 구금 생활을 견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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