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평 부인의 십자가 승리

창평 부인의 십자가 승리

[ 선교여성과 교회 ] 전남 지역 여전도회 44

최샘찬 기자 chan@pckworld.com
2023년 11월 30일(목) 16:27
ⓒunsplash.
창평 부인은 상류층에 속한 부유한 집안의 젊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해 마음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영적인 갈증을 해소시키기 전 이른 나이에 출가함으로 집을 떠나게 됐다.

상대 집안은 호남에서도 부유한 명문가의 아들이었다. 남편의 형은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신으로 남부럽지 않게 사는 집안이었다. 순전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녀만큼 편하고 안정된 삶의 조건을 지닌 사람도 없을 것이다.

새 가정에서 그녀는 주어진 가사와 사회적 의무를 수행했다. 그러다 보니 결혼하기 전 흥미롭게 여겼던 영적인 과제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게다가 아이를 낳아 살림하는 일로 좀처럼 여유를 가질 형편이 안 됐다. 하지만 언제나 그의 영혼 속에는 그리스도를 알고 또 믿고 싶어 하는 열망이 불타오르며 죽지 않았다.

몇년 후 그녀는 인근에 있는 광주의 이일성경학교 보통과목을 청강했다. 한 학기만 등록한다는 조건 하에 이뤄진 마지못한 허락이었다지만 이일성경학교는 그녀에게 새로운 세계로의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성경을 접하고 서서평 선교사와의 교제를 통해 비로소 오랫동안 갈망하던 하나님과의 비밀한 영성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이일학교에서 보낸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자신의 영적인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얻었다. 몇 주간의 강의가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치기로 결단 했다. 이일학교에서 보냈던 한 학기가 그의 인생 여정 가운데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창평으로 돌아온 그녀의 앞에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자신이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발표했을 때 남편과 시댁 식구들은 놀라움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모든 가족이 미신과 오랜 유교적 가풍에 깊이 빠져 있어 기독교에 매우 적대적이었다.

그녀가 가족 앞에 단호히 천명한 입장은 세 가지였다. 첫째, 제사에 참여하지 않겠다. 둘째, 우상 숭배와 단절하겠다. 셋째, 교회 예배에 출석하겠다.

분노한 남편과 남편을 뒤에서 부채질하여 며느리를 옥죄는 시어머니의 입장도 강경으로 치달았다. 남편이 내린 결단은 그녀의 결심만큼이나 단호했다. "조상과 가족들에게 지금까지 지켜온 제사와 가족으로서의 의무를 계속하라. 그렇지 않으면 네 생명을 보장하지 못한다."

그녀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했다. 남편이 자신을 향해 박해를 가할 경우 시댁 어느 누구도 자신을 편들어 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주님께 자신의 운명을 맡기기로 작정한 그녀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녀는 내심 기도하며 다짐했다. "당신이 비록 내 육신은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내 영혼은 하나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내 영혼은 온전히 살아계신 주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강압적인 남편의 지시를 아예 무시하고 주일 예배와 성경공부에 전념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남편의 구타와 학대에 시달렸다. 이것은 앞으로 4년간 지속됐다.

남편의 핍박에 대한 그녀의 대응은 철저히 수동적이었다. 그녀는 단 한마디 불평도 말하지 않고 인내로 감수했다. 한편으로 남편에게 맞아 부어오른 몸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교회에서는 아무런 부끄럼 없이 지성으로 봉사를 다했다.

주일 낮의 감사와 찬양 뒤에는 곤욕과 모멸이 반복되는 고난의 시간이었다. 또 제사 지내는 날은 아주 특별한 고통을 맛보는 날로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대 수난의 연속이었다. 그는 교회 봉사를 위해 필요한 헌금과 사역을 위해 자신이 지닌 패물들을 하나씩 내다 팔아 주님께 바쳤다.

1934년 전남조력회가 광주에서 모였을 때 그녀는 자신이 섬기는 창평교회 대표로 참석했다. 지교회 부인조력회의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강단에 올라선 그녀의 얼굴은 세련되고 우아하긴 했으나, 변색된 피부와 퉁퉁 부은 한쪽 눈부위가 그녀의 시련의 정도를 충분히 알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하나님과 약속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지불하고 있는 엄청난 시련의 대가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음의 말로 보고를 마쳤다. "우리 교회 조력회는 심히 미약합니다. 지난해 우리 주님을 위해 마땅히 했어야 할 일들을 다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습니다."

4년의 악몽 같은 시간이 지난 1935년, 승리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래 동서가 예수를 믿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남편은 이에 대해 조금도 반대의 뜻을 표하지 않았다. 이것은 가정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동서가 예수를 믿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그녀가 보여준 꿋꿋한 신앙 투쟁이었다. 인간적으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핍박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굽힘 없이 지켜나가는 그녀의 모습이 동서에게 진정성 있게 깊은 감동으로 작용한 것이다.


최샘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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