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수동 유추동의 기적

청수동 유추동의 기적

[ 선교여성과 교회 ] 전남 지역 여전도회 43

한국기독공보
2023년 11월 23일(목) 09:43
유추동은 보성 청수동에 사는 젊은 과부다. 그녀가 형부의 집에서 기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친정의 형편이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그녀가 사는 마을은 문화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던 두메산골이었다.

1921년 이 마을에 부위렴 선교사가 이끄는 천막 전도대가 집회를 열었다. 마을 한복판에 텐트를 치고 악대를 앞세운 전도집회가 처음 열렸다. 마을 사람들은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또한 광주에서 온 전도 단원들은 예수님의 일대기를 담은 환등을 비춰 주었다.

추동은 전도 집회에 대해 전해 듣고 참석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날 집회에서 많은 무리들이 큰 관심을 갖기는 했지만 전도의 성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겨우 할머니 한 분이 결신했다.

집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도부인인 최 부인이 추동을 찾아왔다. 집회 후에 결신자를 얻기 위해 방문한 것이다. 최 부인은 자신이 전도부인이란 사실을 내심 숨기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추동의 관심을 이끌었고 신뢰관계를 구축했다.

시골 동네 사람들 눈에는 서울이나 광주에서 벌어지는 소식만으로도 황홀했다. 두 사람 간의 관계가 무르익을 무렵 최 부인이 추동에게 예수에 대해 말해 주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천당에 갈 수 있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최 부인의 얘기는 신기하게만 들렸다. 추동이 전도부인의 이야기에 긍정적으로 반응하자 노골적으로 복음을 제시했다. 마침내 추동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됐다.

주님을 소개받은 후 추동은 마을에서 첫 신자로 알려진 이웃 할머니와 6km 떨어진 교회까지 가서 예배를 드렸다. 추동의 이름은 '가라골 여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가라골에서 온 여자란 의미다. 그런데 추동이 자신의 본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경찰이 조사 목적으로 마을을 방문했을 때였다.

경찰이 "당신이 유추동이요?"하고 물었다. 추동은 "아니요. 제 이름은 가라골 여인이요." 조사를 간단히 마치고 돌아갔던 경찰이 며칠 후 다시 왔다. 경찰은 몹시 화를 내면서 검을 빼 들더니 "당신 내게 왜 거짓말을 했소. 당신 이름이 유추동이요. 그것은 호적에 기재된 당신의 이름이란 말이요"라고 소리를 쳤다.

"저는 단지 불학무식한 여인입니다. 호적에 기재된 이름이 무엇인지 정말 모르고 있었어요. 제 이름이 유추동이란 말도 처음 듣습니다"하며 사정했다. 경찰 주위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호기심 가득한 마을 사람들로 붐볐다. 특히 경찰이 검으로 추동을 위협하는 광경을 목격한 남자들은 "우리 마을에서 예수쟁이는 결코 용납할 수 없어. 저 여자를 죽여도 좋소"라고 소리쳤다.

한편 사람들은 신앙을 버리라고 압력을 가했다. 추동은 "오늘 나는 세상 사람들이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소. 나는 이제 예수님만을 더 굳게 믿을 거요"하며 응수했다.

어느 날 경찰은 추동을 십리나 떨어진 지서로 데리고 가서 여러 시간을 추위에 떨게 해 놓고 심문했다. 그 역시 마을 사람들과 한통속이었다. 호적에 기재된 이름과 예수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추동은 세 차례나 지서에 불려 가 곤욕을 겪었지만 꿋꿋이 신앙을 지켜냈다.

추동이 이유 없이 경찰서에 끌려다니고 마을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당할 때 그녀의 형부는 추동을 집에서 쫓아 버렸다. 결국 갈 곳이 없어진 추동은 예수 믿는 할머니를 찾아갔다. 할머니는 그녀에게 방 한 칸을 내주며 같이 살자고 위로했다.

추동이 할머니의 집에 거주한다는 것을 알게 된 동네의 남자들은 어느 날 저녁 급습해 왔다. 그들은 추동의 방을 향해 돌멩이를 던져 댔다. 그 결과 추동의 방문은 갈기갈기 찢겨 부서지고 말았다. 그후 거의 1년간 추동은 이 집 저 집으로 은신처를 옮겨가며 고단한 잠을 자야 했다.

이 무렵 추동을 곤경에서 구해 준 사람은 타마자(John Talmage) 선교사의 박 조사였다. 이 마을을 방문한 그는 추동에게 가해진 형편을 전해 듣고 이를 서서평(Elise J. Shepping) 선교사에게 알린 후 도움을 청했다. 서서평은 추동을 광주로 불러 그녀를 이일성경학교에 입학시켰다.

글이라고는 배워본 적이 없는 까막눈이었던 그녀가 한글을 익히는 등 기초공부에 전념했다. 추동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서서평의 인내심은 무려 2년이나 지속됐다. 2년이 지난 다음에라야 초등학교 수준을 어느 정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후 성경과에 진학해 3년간을 더 공부했다. 물론 먹고 잠자는 비용은 학교가 부담했으므로 이 기간 동안 추동은 마음껏 성경을 읽고 주일이면 근교에 나가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확장 주일학교 교사 노릇도 했다.

1927년 이일학교를 졸업한 추동은 보성 지방과 그 인근 지역에서 전도부인으로 일했다. 그녀는 주로 미전도 마을을 찾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복음이 아직 전해지지 않은 마을은 수백 개나 되었다. 추동은 자신의 옛 시절을 생각하며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발길을 바삐 움직였다.

전도부인으로 나선지 5년이 지나 그녀는 십여 마을에 예배처소를 만들 수 있었다. 추동이 선교사를 모시고 예배처소를 다닐 때마다 선교사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 기도 처소에서 다음 기도 처소까지의 거리가 보통 20리 길이었고 지리산 자락의 험난한 산길을 지나야 했다.

선교사는 추동의 열성적인 사역을 생각하며 경탄을 금치 못했다. "내가 방문하기조차 어려운 이 길을 추동은 도대체 얼마나 자주 다녔단 말인가?" 추동은 청수동 할머니와 살던 옛 집으로 되돌아갔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녀에게 이 집을 선물로 주었기 때문이다.

추동은 이곳을 거주지로 삼고 전도활동을 전개했다. 마을의 촌장은 과거 추동을 박해하던 장본인이었다. 그는 이전처럼 드러내 놓고 행동하지는 않았으나 암암리에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다. 하지만 추동은 이 마을에서도 열심히 전도하여 예배처소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기도회는 그녀의 허름한 집에서 열렸다. 부인들과 아이들뿐 아니라 두세 사람의 성인 남자들도 참석하는 모임으로 발전했다. 그녀는 주일과 수요일 밤 정기적으로 예배를 인도했다. 전도부인으로 일하면서 그가 선교부로부터 받은 사례는 매달 6달러 25센트였다. 그녀가 청수동 모임을 인도하기 시작한 1929년경부터 그녀는 사례비에서 매달 얼마를 따로 떼어 저축했다. 3년 동안 15달러가 모였다.

1932년에 추동은 그 돈으로 아담한 집 한 채를 구입하여 교회당으로 개조했다. 오랫동안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교회당은 주일과 수요일 밤을 제외하고는 야학으로도 사용됐다. 추동은 어린이들을 모아 한글과 요리문답을 가르쳤다. 여러 곳에서 전도활동을 수행해야 하는 그녀는 야학에 전적으로 매달릴 수 없었다.

그녀는 자기 대신 아이들을 가르칠 남자 청년을 선생으로 세웠다. 선생이 본격적으로 교육을 담당하자 남자아이들이 참석이 크게 늘어 야학은 크게 번성했다. 실로 오랫동안 흑암 권세 아래 놓여있던 청수동 사람들에게 복음과 함께 새로운 세상이 주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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