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구를 극복하고 복음을 전한 복신원

불구를 극복하고 복음을 전한 복신원

[ 선교여성과 교회 ] 전남 지역 여전도회 42

한국기독공보
2023년 11월 16일(목) 10:18
복신원은 군산 지방에서 활동한 여성 사역자였다. 그녀는 불구의 몸임에도 온갖 어려움을 믿음으로 이겨나갔다. 그녀의 삶의 투혼은 이 땅을 살아간 뭇 여성들의 귀감이 됐다.

그녀는 1911년에 출생했다. 그녀가 다섯 살때인 뜻하지 않은 소아마비가 엄습해왔다. 의료시설이 지극히 불민했던 시절, 그녀는 어떤 치료도 받지 못하고 평생 절름발이 신세가 됐다. 여성이 불구자로 살아간다는 일은 정말 죽기보다 못한 슬픔이었다. 불편한 몸과 남들로부터의 시 선을 의식해야만 했던 소녀시절을 지나오면서 그가 꿋꿋이 견딘 것은 전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간섭과 보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원이 17살 나던 해 이웃집 아낙이 그에게 걸어온 말 한마디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았다. "나하고 같이 교회에 함께 갈래요?"

이웃의 초청에 거리낌 없이 나선 것은 그가 살면서 그 누구로부터 이런 따뜻한 제의를 받아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감히 자신 같은 사람에게 함께하자는 친절한 인사, 그에게 이런 영원으로의 초대는 무엇보다 숨통을 트이게 만든 일대 사건이었다.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과 같은 희열로 가득 찼다.

이웃을 따라 나간 교회당에서의 첫 예배. 그날 조사는 우리 인간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죽기까지 버리신 예수의 위대한 사랑에 대해 가르쳤다. 복음이 선포되자 이제까지 따뜻한 사랑을 접해 본 적이 없던 신원은 마치 굶주렸던 영혼이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즉각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인생의 구세주 되신 주님만을 의지하고 따르겠다고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수요일 저녁이 되자 이웃집 아주머니가 또다시 그녀를 교회로 초대했다. 신원은 마치 불러주기를 기다리기나 했다는 듯이 먼저 교회로 따라나섰다. 신원의 교회 생활이 즐겁게 이어졌다.

그녀가 교회를 나가기 시작한 후 3개월이 흘렀을 무렵 동네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다. 집회는 새벽과 낮, 그리고 저녁 세 차례 열렸다. 신원은 곰곰이 생각했다. 이웃의 눈치를 보고 교회를 다니는 것이 두려워 쉽지 않은 이 기회를 날려 버릴 것인가? 아니면 인생의 단 한 번뿐인 이 기회를 붙잡을 것인가? 그녀는 과감히 후자를 선택했다.

새벽집회는 물론이고 낮에 열리는 성경공부에도 참석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시간이 그녀에게는 꿀송이보다 더 달다는 말씀이 이해됐다. 그녀는 성경공부가 기쁘고 유익했기 때 문에 단 한 순간도 놓치기 싫었다. 부흥회 이후 그녀의 삶은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부모가 신원의 동의 없이 불신자의 가정과 혼사를 정한 것이다. 신원은 가족들의 영혼구원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한편, 가족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계속해 증거했다. 마침내 그녀의 어머니와 두 동생이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세례까지 받았다. 그러자 완강하던 아버지도 이따금씩 교회에 나왔다. 물론 돈 벌러 일본으로 건너간 오빠에게는 편지로 전도했다.

신원은 불신자 가정으로 출가하여 혼례식을 치른 지 얼마 후 시집으로 옮겨 살게 됐다. 그녀는 시부모에게 예배 출석을 허락하지 않으면 결코 시댁으로 갈 수 없다고 말했다. 시부모는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며느리로 맞았다. 시어머니는 사경회에 며느리를 참석시켜 줬다.

막상 시집에서의 결혼 생활은 고달픈 생활의 연속이었다. 절름발이 몸으로 힘든 가사일뿐 아니라 농사일까지 감당하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신원이 며느리 노릇은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시어머니를 비롯한 시댁식구들의 눈총이 그녀에게는 말할 수 없는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1930년 신원은 소박을 맞아 친정으로 눈물을 머금고 돌아와야만 했다. 그래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친정 식구들 모두가 예수를 믿는 신자였기에 그녀의 불행을 탓하지 않고 사랑으로 안아주었다는 것이다. 그들 역시 먹고 사는 일이 어려웠지만 슬픔으로 지낼 신원을 위로하며 그녀를 기쁜 마음으로 영접했다.

결혼에 실패한 신원이 친정에 와 있음을 알게 된 선교사 라두 리(Lillie Lathrop)는 신원을 교회의 전도부인으로 일하도록 주선해줬다. 그녀의 자질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군산 선교병원인 구암병원에서 간호원으로 일했던 라두리는 1931년 2월 신원을 군산 달 성경학교에 보내 교육 받게 주선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이래 신원은 매년 전주의 여성성경학교에 가서 1개월씩 공부했다. 1935년엔 전 과정을 이수하고 졸업할 수 있었다. 성경학교에 다니는 동안 신원은 자신의 교회에서 교육 분야를 맡아 봉사했다.

주일 아침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장년 성경공과를 인도했고, 주일 오후엔 청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성도들의 교육 외에도 그녀는 조력회의 회장과 기독청년면려회의 회장직도 맡았다. 그녀의 헌신과 봉사가 교회를 위해 매우 가치 있고 유익하다는 것을 인식한 교인들은 신원의 생활비를 성심껏 보조해 주었다. 천성을 향한 신원의 섬김은 단지 이로써 끝나지 않았다.

1934년부터는 다른 마을과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머나먼 곳을 아랑곳하지 않고 중간에서 몇 번씩 쉬어 가야 하는 번거로움을 참아가며 자신의 증거로 이웃들에 임할 축복을 감사하며 어떤 어려움조차도 기쁨으로 견뎌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충성스러운 연약한 그릇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셔서 능력으로 역사하게 하시고 신원을 통해 영광 받으신 것이다. 1935년 여름에 이미 딸의 전도로 예수를 영접한 어머니는 부인조력회 내의 원주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남동생은 주일학교의 교장이 되어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복신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가족이 구원을 받고 기쁨을 누리며 사는 복된 가족으로 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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