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손길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손길

[ 땅끝편지 ] 체코 장지연 선교사<5>

장지연 목사
2023년 09월 19일(화) 11:23
집 앞에서 자주 마주치는 노숙인과 함께한 필자(우측).
주일이면 우리 교회에 찾아오는 노숙인이 있다. 찾아오는 이유는 주일예배가 끝나면 다과 혹은 식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잘 씻지 않고 늘 똑같은 옷만 입고 다녀서 가까이하면 냄새가 코를 찌른다. 더구나 그의 다소 무례한 행동 때문에 교인들이 눈살을 찌푸릴 때가 있다. 노숙인들은 음식을 얻는 것 외에 습관적으로 돈을 요구하지만 나는 돈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보내지도 않는다. 가까운 가게에 데리고 가서 필요한 식품, 물품을 구입해 건네주는 방법을 사용한다.

기억에 남는 노숙인이 있다. 예배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나타난 그는 다음 모임을 준비하고 있던 교인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한쪽에 놓여 있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교인들은 그의 무례한 행동에 화가 났지만 잠시 멈추고 노숙자가 피아노를 치도록 허락해주었다.

어색한 상태로 노숙인은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우리의 눈이 휘둥그레지기 시작했다. 체코어였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찬양을 부르고 있었고, 악보를 보지 않고 연주하는 그의 솜씨도 근사했기 때문이다. 연주를 마치자 우리는 아낌없이 박수를 쳐주었다. 그러자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의 얘기를 들려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보육원에서 자랐고 거기서 피아노를 배웠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지자 보육원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거리를 떠도는 노숙인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했다. 그의 이름이 얀 보하뜨까(Jan Bohatka)인데, '부유하다'라는 뜻과는 달리 평생 힘겨운 삶을 살고 있었다.

잠깐의 해프닝은 그렇게 훈훈하게 마무리됐고, 맛있게 점심 식사를 한 후 그는 쓸쓸히 교회를 떠났다. 그날을 계기로 우리 교인들이 노숙인에 대해 갖고 있던 안 좋은 편견을 조금이나마 내려놓는 기회가 됐던 것 같다. 오스트라바에는 많은 노숙인이 있기 때문에 길거리, 공원 등에서 쉽게 만나게 된다. 필자가 살고 있는 집은 차 한 대가 어렵게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골목에 위치해 있는데, 골목 입구에 노숙인들이 앉아 쉬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어떤 노숙인은 자주 마주치다 보니 눈인사를 보내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자주 그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며 말을 건넨다. 그들이 보이지 않더라고 음식물이 담긴 봉지를 걸어두면 희한하게도 10분 이내에 보이지 않게 된다. 노숙인 중 누군가 가져가는 것이다.

노숙인을 보면 안쓰러울 때가 많다. 할 일 없이 멍하니 앉아 있거나 술에 취해 누워있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그렇다고 시에서 노숙인들을 마냥 방치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생활할 시설을 운영하고 있고, 재활해 노숙인의 삶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프로그램도 시행하고 있다. 시뿐 아니라 구세군 등 민간 차원의 기관들도 노숙인에 대한 관심을 갖고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다.

전에 '많은 노숙인들이 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시설에 들어가는 것을 꺼린다'는 얘기를 듣고 놀란 적이 있다. 이유는 노숙인 시설을 이용하려면, 시설이 요구하는 규칙들을 지켜야 하는데 그게 불편함으로 다가오는 사람도 있고, 반려견이나 동물을 시설에 함께 데리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길에서 생활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노숙인을 직접 대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노숙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기관을 통해 돕는 방법을 택한다. 오스트라바에 있는 구세군의 경우, 수요일 마다 특정한 장소에서 노숙인들에게 점심식사를 제공하는데, 필자도 이를 위해 재정 지원을 한 적도 있고 어떻게 그들에게 식사가 제공되고 있는지 궁금해 직접 참여한 적도 있다. 그런데 어느날 구세군 책임자인 프란띠셰크 목사로부터 "구세군조차도 노숙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 늘 조심스럽고 쉽지 않다"며, "점심식사를 제공하는 현재 중단됐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이유는 점심식사를 제공받기 위해 모여든 노숙인들이 인근 주민들과 마찰을 빚었고, 결국 민원이 제기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거리가 아닌 시설 내에서만 식사 제공이 가능해졌다는 것이었다.

노숙인 문제는 그 사회가 안고 있는 아픈 부분이다. 그들도 이전에는 생활 공간을 갖고 있었을 텐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니 저마다 슬픈 사연을 안고 있을 것이다. 오늘도 노숙인들은 정당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많지만, 그래도 노숙인들을 섬기는 손길이 있었기에 더 심각한 상황으로 빠지지 않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주님, 저 약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주님의 은총과 평강으로 함께 하옵소서."

장지연 목사 / 총회 파송 체코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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