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 땅끝편지 ] 독일 허승우 선교사 <1>

허승우 목사
2023년 01월 03일(화) 08:04
1996년 튀빙엔 시절, 카이저스베르크 '슈바이처 생각 박물관' 앞에서 함께 한 가족.
시절이 암울했던 1980년대, 신학생이었던 나는 홀로 서점 순례하는 것을 좋아했다. 종로서적, 교보문고를 지나 명동 성 바오로 서점까지. 성 바오로 서점 3층에서는 토요일 마다 사상 강좌가 있었다. 어는 토요일 오후, 성 바오로 서점을 방문한 나는 깨끗한 분위기에서 책들을 둘러 보고 있었다. 그때 작은 포스트카드에 담긴 성경말씀이 눈에 들어 왔다. 너무 단아한 카드에 쓰인 그 말씀은 마치 망치로 머리를 때리 듯 충격으로 다가 왔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요한의 복음서 10,11 공동번역).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었지만 선한 목자가 아닌 '착한 목자'라는 표현이 너무 다르게 느껴지며 다가 왔다. 착한 목자! 양! 목숨 바침! 이 말씀은 앞으로 내가 가야 할 신학과 목회의 길을 보여 주시는 것 같았다. 나 스스로에게는 전혀 불가능한 말씀이었지만, 나를 부르신 착한 목자이신 나의 주(인)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그 이후 지금까지 이 말씀은 나의 목양신학의 반석말씀이 되었다.

필자는 1960년에 2남 1녀 중 차남으로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우리 집안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신 분은 증조할머니였다. 증조할머니는 신앙을 위해 김해에서 영동으로 이주하셨다. 할아버지는 과수원을 하면서 충청북도 영동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아버지 허인 목사는 서울로 유학을 와서 영문학과를 마치고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었다. 어머니 이정숙 권사도 구세군사관학교를 나오셨고, 나중에 선덕고아원 원장으로 섬기시다 과로로 내가 스무 살 때 돌아가셨다.

내가 태어난 곳은 서울 마장동이었는데 옆집이 교회였다. 교회 마당은 즐거운 놀이터였다. 어머니는 어렸을 적에 삼각산 기도회에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나는 막내였기에 부모와 항상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어려서 부흥회도 많이 다녔다. 신현균 목사는 나의 롤 모델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동네 길 건너편에 신기한 옆 좌석이 있는 2인승 오토바이가 나타났다. 호기심에 길 옆에 주차해 있던 그 오토바이를 구경하고 다시 길을 건너오던 중 반대편에서 오는 승용차와 부딪히는 교통사고가 났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회복된 나는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 주셨다는 어머니의 믿음과 더불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소명까지 받게 되었다.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를 나와 장신대 신대원을 84기로 졸업한 후, 조직신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다시 모교인 ACTS에서 한철하 교수님의 사사를 받으며, '칼빈의 구원론에 대한 삼위일체론적인 이해'라는 석사 논문을 썼다. 그리고 이문동교회(변동일 목사) 소년부 교육전도사와 구로문교회(이호열 목사) 전임전도사로 사역하다가 1994년 10월 27일 함해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제 착한 목자의 길을 갈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목사로 섬기던 중 목회를 시작도 하기 전에 체력이 약해져 쓰러지고 말았다.

사임을 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런 계획도 없이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 쉬면 안 될 것 같아 ACTS에 조직신학 박사과정에 입학을 하였다. 그때 세브란스 병원의 신경외과 교수였던 형님(허승곤 집사)이 미국 교환 교수로 다녀온 후 잠시 우리 집에 머물게 되었고, 나도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공부해 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렇게 사랑하는 아내 최은희와 네 살된 딸 고은, 그리고 태중의 아기 영을 한국에 남겨 두고 독일로 가기로 하였다.

1996년 3월 27일 늦은 밤, 독일 서남부 바덴-뷔르템베르크의 주도 슈투트가르트 공항에 도착하면서 새로운 제2의 목양의 삶이 시작되었다. 나의 땅끝 독일에서.

허승우 목사 / 총회 파송 독일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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