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시한부 성도

잊을 수 없는 시한부 성도

[ 땅끝편지 ] 일본 강장식 선교사 <8>

강장식 목사
2022년 12월 14일(수) 08:13
가정 같은 교회를 바라보며 전교인 소풍(코로나 이전).
청년들을 초대해 주신 교포가정에서.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10여 명이 모였을 때부터 예배시간에 오랫동안 필자가 제안한 인사말이다. 선택을 받고 부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구원의 기쁨으로 예배 드리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초임 선교사인 필자는 정말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복한 웃음을 짓는 것은 필자 뿐, 교회학교가 없어 예배당 맨 앞줄에 앉아 있는 어린 두 아들을 비롯해 교우들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한 번의 예배에 같은 내용의 설교를 일본어로 한 번, 한국어로 한 번, 두 번을 해야 하니 예배는 80~90분이 걸렸다. 재일동포 교회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니 계속 이렇게 가자고 요구했다. 모든 교우가 일본어를 더 잘했고, 한국어가 서툰 성도가 많음에도, 한국어로 설교와 찬양시간을 갖길 원하는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이런 예배에 익숙하지 않은 새 가족이나 필자의 입장에나, 더군다나 일본어를 못하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는 힘든 시간일 수밖에 없었다.

몇 명 안모이는데 교회 내부의 절차와 방식은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문턱이 높다는 일본교회 특징 그대로였다. 교회 건축을 하고 8년이나 되었지만, 건물 유지가 힘들 정도로 약해져 교회매각이 대책이라는 의견이 나오곤 했다. 오랫동안 익숙해진 전통을 고수하다가 미끄러진 교회는 개척교회보다 어렵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파송교회의 목사님 조언이 피부에 와 닿았다.

1년 정도의 적응과 기다림을 거쳐 침체된 교회의 안타까운 상황에 대한 전도와 양육대안을 제시하면서 교회학교 예배의 시작과 일본어 예배의 신설 등 적극적인 설득과 설명을 통해 교회의 변혁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새가족이 늘자 기존교우들과는 멀어지기 시작했다.

필자에 대한 소수의 방관 및 대립적인 태도는 마음을 힘들게 하였다. 게다가 필자의 전도와 양육으로 성장하고 정착하여 잘 협력하던 몇 가정들이 교회의 이런 모습에 실망하고 떠나고, 은혜롭지 못한 교회의 모습에 상담하는 교우들이 늘자 원망과 분노가 기존 신자들에게 향해지고 너무 힘들어, 교회를 포기하고 떠나려는 마음조차 들었다.

그 즈음에 많은 반대 속에서도 간신히 통과된 일본어예배는 찬양 반주기로 드리며 아내와 단 둘이 지키고 있었다. 그런 우리 모습을 보고 교회에 출석하던 초로의 여신도가 일본어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가정형편상 심방은 불가능했지만 많은 교제와 만남을 통해, 박대와 차별을 감내하며 주부로 어머니로 살아온 인생 여정에 대해 수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은 성공한 사업가였고 자녀는 번듯하게 키워냈지만, 가부장적이고 자유분방한 남편으로 인해 가정생활에 아픈 상처가 많았다. 그녀는 자신이 태어나 자라난 재일동포 마을 고향에는 차별과 가난에 대한 기억으로 절대로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쓰라린 아픔을 지닌 가엾은 인생이었다.

그런데 믿음이 깊어지더니 매주 주일 10분 전에 교회에 도착해서 먼저 아내의 손을 잡고는, "사모님 손은 너무 차가워요. 건강 조심하세요" 매주 따뜻하게 감싸주고는 자리에 앉아 깊은 기도에 잠기곤 했다. 서툰 나의 일본어 설교를 열심히 경청하면서 매주 일본어, 한국어 예배 두 번 예배를 빠짐없이 드리더니, 믿음생활이 너무 행복하다고 간증하는 등 필자에게는 든든한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 제 생명이 3개월 남았다고 합니다"라고 알려왔다. 의사로부터 시한부 생명 선언을 갑작스럽게 받은 거였다. 그럼에도 한결 같은 평온함과 열심으로 예배를 두 번씩 드렸다. 이 모습에 온 교우들은 큰 감동을 받게 되었고, 교우들의 믿음은 숙연해 지면서 깊어져 갔다.

교회를 포기하고 떠나고 싶었던 필자도 편안히 생을 마감할 수 있게 해 드리고 싶어서 더 열심으로 예배를 준비하며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3개월이 6개월이 되고 1년 이상을 건강하게 지내며 교회생활을 이어갔다. 이 모습을 보며 서로 경계하고 무관심하던 기존 신자와 새가족들 사이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기도와 사랑으로 서로를 보듬어 주고, 협력하는 따뜻함을 회복해 가고 있었다.

필자도 험난한 세월 속에서도 가족과 교회를 지키며 땀 흘린 연약한 재일동포 신자들의 헌신과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 가지 못했던 미숙한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목회자의 마음과 태도를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불신앙의 땅에서 성령과 사랑의 공동체로 모여진 우리가 서로의 다름을 보듬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1년 이상을 교우들과 믿음의 소망을 밝고 힘차게 나누다가 별세하기 며칠 전 "목사님 덕분에 정말 행복한 신앙생활을 했어요. 힘 내세요. 저는 때가 되어 오라 하시니 하나님 뜻에 순종하여 기쁘게 돌아가는 것이니 하나도 슬프지 않아요. 슬퍼하지 말아 주세요"라는 말을 남겼다.

은혜 가운데 진행된 가족 최초의 기독교 장례를 통해 동생 가족과 자녀들이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주의 은혜로 서서히 주님이 뜻하신 교회의 모습으로 회복해 나가는 행복한 나날을 보내며, 오늘도 하나님 선교를 위한 화목과 협력의 기적을 믿고 간구하며 나아가고 있다.



강장식 목사 / 총회 파송 일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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