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병상련의 정(情) 때문에

동병상련의 정(情) 때문에

[ 땅끝편지 ] 체코 이종실 선교사9

이종실 목사
2021년 03월 18일(목) 10:51
1348년 설립된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본산, 카렐대학교 인문대학의 정문. /사진 카렐대학교 홈페이지
선교사의 삶이란 마치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긷는 두레박처럼, 현장에서 침잠하며 하나님의 도구로서 일상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필자는 그러한 선교적 삶을 아내로부터 발견했다.

해외에서 생존을 위해 언어습득은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아내의 첫 체코어 선생은 특정 국가의 백인을 유독 좋아하는 인종차별주의자였다. 체코어 선생은 교실에서 아내를 그림자 같은 존재로 여겼다. 마음고생을 하면서도 인종차별적 태도에 굴하지 않기 위해 체코어 과정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인종차별이 아내의 체코어 선생이 됐던 셈이다. 한 해 동안 지독한 체코 입국 신고식을 마친 그녀에게 체코 국립대학인 프라하 카렐 대학교에서 인문대학 아시아학 연구소의 한국학과 강사 의뢰가 들어왔다. 카렐 대학교의 한국학과는 1950년에 설립돼 북한과 계속 교류했으나, 1989년 벨벳혁명으로 체코슬로바키아가 남한과 국교를 수립하면서 국립대학의 한국학과는 평양식 한국어가 아닌 서울식 한국어를 채택하게 됐다. 체코어 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하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때까지 광화문통을 벗어나지 않은 서울 사람으로서 16년간 중·고등학교 교사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교육부에서 요구하는 연구 과정까지 이수한 아내의 경력을 카렐 대학교가 필요로 했다. 이렇게 아내는 12년간 카렐 대학교 한국학과 강사로 일하게 됐다.

아내의 역할은 직간접적으로 체코 사회와 접촉을 넓혀가는 중요한 길목이 됐다. 1993년 처음 체코에 도착한 이후 지금까지 서민들의 의식주 가운데 가장 더딘 변화가 음식이다. 혁명 이후 30년이 지난 최근에야 비로소 건강한 먹거리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회주의 시대엔 여성들을 가사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집에서 바로 먹을 수 있는 반조리 식품들을 개발해 보급했다. 특별히 요리된 체코 음식을 먹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상황이 낯선 곳에서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친구로 만드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됐다. 한국 식품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내는 체코의 식자재를 가지고 한국식으로 맛을 낸 정성스러운 식탁을 준비했다. 혹시 다시 초대하게 될 때, 같은 음식을 대접하지 않기 위해 방문자, 방문일시, 메뉴, 그리고 방문자가 선호한 음식에 대한 피드백들을 간단히 정리했다. 10여 년이 넘는 그 기록이 노트로 여러 권이 될 정도였다. 이 자료는 아내가 체코인들의 입맛을 이해하는 중요한 데이터가 됐다.

사람들과 교제를 하면서, 언제나 아내는 체코 목회자 부인들의 처지에 동병상련을 느꼈다. 일반적으로 체코인은 맞벌이를 해야 생계 유지가 가능하다. 시골교회 목회자 부인들은 도시에 비해 일자리를 찾기가 어렵다. 노인들이 많다보니 교회의 힘든 일을 젊은 목사 부인이 도맡기도 하고, 가족처럼 생각했던 교우들이 만들어 내는 부정적 이야기를 감당하는 일도 쉽지 않다. 아이를 키우다 우울증에 걸려 결국 건강을 잃거나, 경제적 문제로 목회직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부부가 별거나 이혼을 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국가 지원과 사회주의 시대 교회 재산 국유화에 대한 보상이 완전히 끝나는 2030년 이후 체코교회의 상황은 더 열악해질 것으로 보인다.

최근 아내는 체코 목회자 부인들의 일자리를 만드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소규모 벤처기업과 상점들이 많고 식당들의 경쟁이 치열한 프라하 '평화의 광장' 지역에서 테이크어웨이 전용 식당을 열었다.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체코 전국 어디에서나 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정의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일이 필요한 체코교회와 목회자 부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그 기대를 가지고 아내는 하루 13시간 이상 노동을 하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일하게 될지 그리고 계획이 실현될지 모르지만, 아내는 자신보다 더 힘든 노동을 견디며 선교비를 보내 준 한국교회 성도들의 사랑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음을 고백하며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감당하고 있다. 아내는 선교의 목적의식이 아닌 동병상련의 정으로 선교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종실 목사 / 총회 파송 체코 선교사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