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당선작 / 혓바닥을 내밀어봐

동화 당선작 / 혓바닥을 내밀어봐

[ 문화 ] 제16회 기독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장세정
2015년 01월 15일(목) 14:56

제16회 기독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혓바닥을 내밀어봐

글 : 장세정


정이는 걱정입니다. 홍이가 오늘도 졸라댈 게 뻔하니까요. 홍이는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를 않습니다. 혓바닥이 시퍼렇게 물드는 그 사탕을 사 주는 대로 다 먹고도 날마다 또 사달라고 하니, 속이 상합니다. 정이 아빠는 작년에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정이는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아빠를 데려간 하나님이 싫어졌습니다. 엄마는 "천국에서 더 필요하셔서 먼저 데려 가신 거야. 아빠는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 거야"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다른 아빠들은 남겨 두고 왜 하필 우리 아빠만 데려 가신 거죠?"
"그건 아무도 모른단다. 확실한 건 아빠가 우리를 천국에서 지켜보신다는 거지."

정이에게 틈만 나면 하늘을 올려다보는 버릇이 생긴 건 그때부터였습니다. 아빠를 데려간 게 하나님이니까 이제는 아빠 대신 하나님이 엄마와 우리를 지켜줘야 한다고 하나님께 부탁도 그때 한 거구요. 그리고 아빠가 보고 싶은 날이면 하늘 어딘가에 있을 아빠를 떠올리며 가만히 손을 모으는 버릇도 생겼답니다.

그 뒤로 엄마는 아빠를 대신해 서울에서 일을 하고, 정이랑 홍이는 시골 외할머니 집에 와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도 시골의 조그만 교회를 다니고 계셔서 정이는 그곳에서 마음속으로 찾아오는 아빠와 하나님을 만나려고 애를 썼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귀를 기울여 봐도 하나님과 아빠는 별로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정이는 엄마 말을 굳게 믿고 싶었습니다.

엄마 대신 홍이를 잘 돌보기로 엄마랑 약속했는데, 홍이는 엄마가 없는 틈을 타서 요즘 더 까불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럴 때마다 정이는 미워서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홍이가 동그란 눈을 굴리며 "누나아!"하면 마음이 스르르 약해집니다. 아빠도 없이 크는 홍이가 가여워서 그런 가 봅니다. 엄마는 그럴수록 더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하지만 정이는 그냥 홍이가 우는 게 싫습니다. 3학년인 정이는 늘 1학년 홍이랑 집에 같이 갑니다. 정이가 조금 늦게 마치는 날은 홍이가 교실에서 정이를 기다리곤 한답니다.

정이가 청소를 마치고 1학년 교실 쪽으로 가고 있는데, 가방을 달랑거리며 홍이가 달려오는 게 보입니다. 홍이는 정이 손을 답삭 잡더니 "누나, 누나, 빨리 가자" 합니다. 이마에 난 땀 때문에 홍이 머리카락이 젖어 있습니다. 정이는 손바닥으로 홍이 이마를 닦아줍니다. "오늘은 뭐 하고 놀았어?" "응, 친구들이 지나갈 때 다리를 착 걸어서 넘어뜨리는 놀이." "야, 장홍, 너 그러다 친구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쩔건데?" "안 다치게 살살 했어. 그리고 오늘 받아쓰기도 두 개 맞혔어, 저번엔 하나 맞혔는데, 나 잘했지?" 반달눈을 만들며 올려다보는 홍이, 정이는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풋 웃고 맙니다. 정이는 1학년 때 받아쓰기를 잘 못 하면 더 잘하려고 열심히 예습을 하곤 했는데 홍이는 천하태평입니다. 혹시나 홍이 친구들이 놀리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너, 집에 가서 숙제부터 해야 된다. 그래야 텔레비전 볼 수 있어. 알았지?"
"응, 알았어."
대답은 잘도 합니다.

교문 앞을 지나면서 홍이가 발에 걸리는 돌멩이 하나를 툭 찹니다. 돌멩이가 또르르 앞으로 굴러갑니다. 홍이는 쫓아가서 또 툭 찹니다. 이번엔 발만 공중에 떠오릅니다. 돌멩이는 얌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에게! 이리 내. 이 누나가 한 번 보여줄게."

정이는 홍이 머리를 장난스럽게 쓰다듬는 척 하며 돌멩이를 힘차게 걷어찹니다. 힘이 너무 들어갔는지 빗맞은 돌멩이가 발 앞에서 데굴 구르다 맙니다.

홍이가 정이 앞으로 잽싸게 파고듭니다.
"누나는 저리 비키셔."
정이도 질세라 어깨로 홍이를 밉니다.
"싫거든, 내가 더 잘 차거든."

   
▲ 일러스트 조안나
정이는 이렇게 놀면서 할머니 집까지 가면 좋겠습니다. 좀 있으면 문방구 앞을 지납니다. 홍이가 푸르뎅뎅 사탕을 잊어버리고 지나치길 바래 봅니다. 그래서 정이는 일부러 돌멩이를 길게 찹니다. 문방구를 훨씬 지나 길가에 돌멩이가 뚝 떨어집니다.

"홍아, 가서 잡아. 이번엔 네가 멀리멀리 차 봐. 빨리!"
정이는 속으로 얼른 하나님께 빌어봅니다.
'제발 제발 홍이가 그냥 지나가게 해주세요. 하나님!'
"응, 누나. 근데……. 잠깐만."
홍이는 잠깐 문방구를 쳐다보는가 싶더니, 정이가 말릴 새도 없이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립니다.
"야, 장홍!"

홍이는 일주일 째 문방구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그동안 엄마가 준 용돈을 푸르뎅뎅 사탕을 사는 데 거의 다 썼습니다. 첫날은 친구가 먹었다고 저도 먹고 싶다고 해서 사 주었습니다. 둘째 날은 딱 한 번만 더 먹고 싶다고 해서 사 줬습니다. 그날은 하나 더 사서 정이도 같이 먹었습니다. 둘이서 누구 혀가 더 시퍼렇나 내기를 하면서 집에 갔습니다. 셋째 날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사 달라 해서 사 주었습니다. 넷째 날은 배가 아프다고 문방구 앞에서 뒹굴어서 할 수 없이 사 줬습니다. 다섯째 날은 엄마 보고 싶다고 떼를 써서 또 사 줬습니다. 매번 이것이 마지막이다 다짐을 했지만 다음 날이면 홍이는 까맣게 잊어버린 듯 굴었습니다.

주말을 지내고 왔는데도 달라진 게 없습니다. 오늘은 또 무슨 소리를 할까요?
홍이는 계산대 옆 큰 통에 꽂혀있는 푸르뎅뎅 사탕을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장홍, 너 약속 했잖아."
"그냥 보기만 하는 거라고."

홍이는 정말로 아무 말도 없이 보기만 합니다. 아예 입구에 쪼그려 앉아서 턱을 괴고는 사탕만 바라봅니다. 정이는 아이들이 문방구를 들락날락해서 신경이 쓰입니다.
"빨리, 일어나. 가야지"
"그냥 보기만 할 거야. 보는 것도 맘대로 못해?"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잠깐만 보고 일어나!"
정이는 밖에 나와서 기다립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용돈 1000원을 주머니에서 만지작거립니다.

엄마는 서울로 일하러 가면서 할머니가 따로 돈을 주지 못하니까 용돈을 아껴 쓰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 푸르뎅뎅 때문에 다 망쳐 버렸습니다. 엄마가 보름 후에 외할머니 집으로 왔을 때, 동생도 잘 돌보고 용돈도 아껴서 썼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정이가 홍이의 조그마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방구 아줌마가 목소리를 높입니다.
"얘야, 거기 좀 비켜줄래? 애들이 지나다녀야지."
홍이는 들은 척도 안 합니다. 저러다 혼쭐이 날지도 모릅니다.

정이는 안으로 들어가 홍이의 팔을 잡아끕니다.
"누나, 조금만……."
홍이가 뻗댑니다.
"빨리 가자!"
"보기만 한 대도!"
"언제까지 볼 건데?"
홍이 얼굴이 씰룩거립니다.
"나 집에 안 갈 거야!"
기어코 바닥에 퍼질러 앉아버립니다.
정이는 짜증과 함께 마음이 울컥합니다. 엄마가 생각납니다.
'엄마, 우리 홍이 좀 봐.'
정이는 낮게 한숨을 쉬며 주머니를 뒤적거립니다.
"아줌마, 푸르뎅뎅 하나 주세요. 장홍 빨리 일어나!"

할머니 집으로 가는 내내 홍이는 펄쩍펄쩍 뛰면서 갑니다. 저만치 앞질러 갔다가 정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서는 혓바닥을 쑤욱 내밉니다.
"누나, 시퍼렇지? 무섭지? 우헤헤헤!"

정이는 남은 돈을 다 쓰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합니다. 이제는 사 주고 싶어도 사 줄 수도 없는데도 말입니다.
"이제 용돈 없어. 진짜야!"
제발 기억해 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정이는 주머니를 뒤집어서 보여줍니다.
"응, 나 이제 사달라고 안 할게, 약속!"

비어버린 주머니가 안타까웠는지 홍이는 조그만 새끼손가락을 정이 손가락에 착 걸고는 저만치 앞서 달려갑니다. 구름 위를 날듯이 달려갑니다. 길가의 들꽃들에게, 나무들에게 홍이는 혀를 날름댑니다. 한 마리 작은 망아지 같습니다. 정이는 엄마 아빠가 저렇게 신 나 있는 귀여운 홍이를 보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예전처럼 다 함께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는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아빠, 우리 홍이 잘 크고 있어. 나도 잘 지내고 있고. 나한테는 할머니도 있고 홍이도 있고 엄마도 있는데, 아빠는 혼자라서 어떡해?'

순간 정이는 눈물이 핑 돕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으니까 괜찮지? 그치 아빠?'
정이는 이번에도 하나님께 부탁해 봅니다.
'우리 아빠 잘 부탁드려요, 하나님.'
"누나, 뭐해? 빨리 가자."
어느새 달려 온 홍이가 빤히 정이를 올려다봅니다.

외할머니 집이 저만치 보입니다. 집 옆 길가 밭에서 낯익은 모습이 앉았다 일어났다 하고 있습니다. 외할머니가 밭에서 오이를 따고 있습니다.
"할머니이!"
정이와 홍이를 본 할머니가 얼굴 사이로 흰 이를 드러내고 웃습니다. 밭두둑 위 키 큰 뽕나무가 까만 열매를 뽐내는, 햇빛이 기세를 더해가는 7월입니다.

다음 날, 선생님은 맨 앞줄에 앉은 정이를 부르십니다.
"장정, 심부름 하나 해줄래? 문방구 가서 편지지 좀 사다 줘. 수업 시작 전에 맞춰 얼른 다녀와야 한다."
"네, 선생님."

안 그래도 졸음이 쏟아졌던 터라, 정이는 얼른 일어나 선생님께 돈을 받아 밖으로 나옵니다. 후텁지근한 날씨지만 푸른 나뭇잎들이 싱그럽게 느껴집니다. 문방구 앞은 한산합니다. 아줌마가 가끔씩 앉아 있는 조그마한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있습니다.

"아줌마, 편지지 어디 있어요?"
대답이 없습니다. 문방구는 비어 있습니다. 아줌마가 잠깐 화장실에 갔나 봅니다. 정이는 편지지를 찾아 두리번거립니다. 편지지를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잘 보이지 않습니다. 계산대 옆으로 다가가던 정이는 꽃처럼 탐스럽게 꽂혀있는 푸르뎅뎅 사탕에 눈길이 머뭅니다.

'홍이가 또 사달라고 할 텐데…….'
오늘은 또 어떻게 달래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아줌마가 오는지 밖으로 고개를 빼서 살펴봅니다.
"아줌마! 아줌마! 편지지 사러 왔어요!"

큰 소리로 불러 보았지만 대답이 없습니다. 근처에 아줌마가 있다면 분명 대답을 할 텐데 멀리 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자꾸만 눈길이 푸르뎅뎅 쪽으로 갑니다. 어찌나 많이 꽂혀 있는 지 한 개 꺼낸다고 표가 날 것 같지도 않습니다. 딱 하나만 꺼내고 싶습니다. 누가 오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안 된다고 머리를 저어봅니다. 그런데도 멍하니 눈길이 사탕에 꽂혀 있습니다.

"띠리리리리리리리링!"
수업 시작종이 울립니다. 수업 시작종이 치기 전에 다녀오라던 선생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맘이 급해진 정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푸르뎅뎅 앞에 멈춰 섭니다.
'딱 하나만! 안 될까요?'

잠시 후 정이는 문방구를 급히 빠져나오다 아줌마랑 부딪칠 뻔합니다. 그제야 정이는 가져온 돈으로 편지지를 사고 서둘러 교실로 들어갑니다.

정이는 1학년 교실 앞에서 홍이를 만나자마자 다짐을 받습니다. 오늘은 절대로 문방구에 들어가 사탕 사달라고 조르지 않기!

"누나, 내가 푸르뎅뎅 사달라고 안 하면, 진짜 다른 거 좋은 거 줄 거지?"
"응, 문방구를 지나 100미터 쯤 가면!"
홍이는 신이 나서 교문을 나섭니다. 정이는 홍이의 손을 잡고, 홍이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문방구 앞을 지나갑니다. 홍이는 슬쩍 곁눈질로 푸르뎅뎅을 한 번 쳐다봅니다. 그러나 그뿐, 누나의 손을 더 꽉 그러쥐고 성큼성큼 문방구 앞을 지나갑니다. 10미터, 20미터 30미터……. 문방구가 점점 멀어집니다. 홍이는 누나를 슬금 쳐다봅니다.

"누나, 이제 다 지났어. 뭐 줄 거야?"
"아직 100미터 안 됐어. 문방구가 완전히 안 보여야 된다구!"
"으응, 100미터? 아까 몇 미터였더라?"

정이는 문방구가 멀어지면 꺼내줄 참입니다. 이제는 문방구가 완전히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정이는 조금만 더 가서 줘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할머니 집에 갈 때까지 참아 줄 홍이가 아닙니다.
"빨리 줘. 누나, 나 뿔난다!"
이제 문방구가 완전히 보이지 않아 정이도 안심입니다.
"알았어."
정이는 주머니에서 바스락거리는 것을 꺼내 홍이에게 내밉니다.

"응? 이거?"
"맛있겠지?"
"사탕이잖아!"
"먹어 봐."
홍이가 봉지를 얼른 까서 사탕을 입안으로 쏙 밀어 넣습니다.
"우웩!"
홍이가 울상을 짓습니다.
"홍삼 맛이잖아!"
"홍삼도 잘 녹여 먹으면 얼마나 맛난데."
"냄새가 구리단 말야. 퉤!"

홍이는 홍삼 사탕을 뱉어냅니다. 갈색 홍삼사탕이 풀숲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선생님이 심부름 했다고 준 홍삼 사탕을 하나만 먹고 남겨 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홍이는 입술을 댓 발이나 내밀고 버티고 서버립니다.
"나, 배고프단 말야. 배고파!"
"집에 가서 밥 먹으면 되지."
"밥 말고 다른 거!"
"다른 거 뭐?"
"……."
"푸르뎅뎅?"
"……."
"누나 돈 없는 거 알잖아."
"나 아무 말도 안 했다 뭐."

가방을 벗어버리고 홍이가 털썩 주저앉아버립니다. 햇빛이 뿔 난 홍이의 머리 위로 답답한 정이의 작은 몸 위로 사정없이 쏟아집니다.

"빨리 일어 나. 가야지."
"……."
"이 고집불통, 여기서 나더러 어쩌라고."

정이는 차라리 문방구에 가득 꽂혀 있던 푸르뎅뎅을 몰래 가져 올걸 그랬나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빠랑 하나님이 보고 있겠다 싶어 그만두었습니다. 엄마 생각이 또 간절합니다. 이럴 때 엄마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정이는 곁에 없는 엄마 대신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불러봅니다.
'어떻게 해요 하나님, 저 좀 도와주세요.'

땀방울이 홍이의 짧은 머리와 이마에 애처롭게 맺혀 있습니다. 정이의 얇은 블라우스 속에서도 주룩 땀방울이 흘러내립니다. 정이는 머리를 들어 주위를 한 번 둘러봅니다. 눈길이 머문 조그만 언덕 위에 뽕나무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푸른 잎들이 제법 큰 그늘을 만들고 있습니다. 순간 정이는 그늘에서 홍이를 좀 달랬다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홍아, 우리 저기 언덕에 가서 앉았다 가자. 누나가 재미나게 해 줄게"
"재미나게? 어떻게? 치, 나 관심 없어!"
홍이는 어림없다는 표정입니다. 그런 홍이 가방을 정이가 잡아끕니다. 정이가 밀어 올리자 홍이는 못 이기는 척 어그적 어그적 언덕을 오릅니다.

가까이에서 본 뽕나무는 생각보다 키가 큽니다. 그늘 밑에 자리를 잡으니 시원한 바람도 한 줄 지나갑니다.
"아, 시원하다, 여기 좋지?"
홍이는 대답 대신 발밑의 흙을 툭툭 차서 언덕 아래로 굴려버립니다.
"보자, 누나가 우리 홍이 재미나게 해 줘야지!"
넓적한 뽕잎을 따서 배를 만들어 주려던 정이 눈에 다닥다닥 달려있는 까만 열매들이 보입니다. 정이는 그것이 오디란 것을 금방 알아챕니다. 아빠가 살아있을 때 여름방학이면 찾아온 외할머니 집에서 먹어 본 적이 있었거든요. 혀 사이로 달콤한 침이 고입니다. 나뭇가지로 손을 뻗으려던 정이는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그리곤 홍이를 내려다보면서 가만히 묻습니다.
"홍아, 너 푸르뎅뎅 사탕 하나가 좋아, 열 개가 좋아?"
"당연히 열 개지!"
"그럼, 딱딱한 푸르뎅뎅이 좋아? 몰랑몰랑 부드러운 푸르뎅뎅이 좋아?"
"누나! 푸르뎅뎅은 다 딱딱해! 몰랑몰랑한 건 마시멜로지!"
"있어! 몰랑몰랑한 푸르뎅뎅!"
"거짓말!"
"어디?"
"여기! 백 개도 넘게 있네!"
정이가 손을 들어 뽕나무를 가리킵니다.
키 작은 홍이는 멀뚱하니 뽕나무를 쳐다봅니다.
"쳇!"
홍이는 콧방귀를 뀝니다.

정이는 잘 익은 오디를 조금 따서 얼른 입안에 털어 넣습니다.
"음, 부드럽고 달콤해."
그리곤 오물오물 씹어 삼킵니다.
"슈퍼 울트라 초강력 푸르뎅뎅 혓바닥 한 번 보시라! 뻬에에!"
의심쩍은 눈동자를 굴리던 홍이가 정이의 검붉은 혓바닥을 보고는 소리를 지릅니다.
"우와! 누나야, 이거 나도 해볼래."
정이는 신이 나서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오디를 땁니다.
홍이는 오디를 받아 들고 낼름낼름 먹어치웁니다.

"우와! 맛 좋다! 이게 뭐야?"
"오디라는 거야. 너도 옛날에 먹어 봤을지도 몰라."
홍이는 오디를 씹는 둥 마는 둥 삼키고는 혓바닥을 쑥 내밉니다.
"나 어때 누나야, 빨개?"
"응, 푸르뎅뎅 보다 훨씬 강력해. 와, 이건 손바닥까지 물이 들어. 이것 좀 봐."
정이가 두 손을 활짝 들어 보입니다. 홍이 손도 검붉게 물이 들어 있습니다.
"누나, 이거 맛있고 재밌네."
"내가 재미나게 해준댔잖아!"
정이는 어깨를 으쓱해 보입니다.
"응, 그랬구나. 진작 말하지. 음냐음냐."
볼이 미어져라 홍이는 먹어댑니다.

정이는 몸속에 있던 긴장이 서서히 풀리는 느낌입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런 홍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정이가 생각난 듯 손뼉을 짝 칩니다.

"홍아, 재밌는 게 또 있어. 사탕에는 없는데 오디에는 있는 게 있다."
입 주위에 검붉은 물이 든 홍이가 눈을 동그랗게 뜹니다.
"뭔데?"
"가르쳐 줄까 말까?"
"칫, 그럼 엄마한테 다 이른다!"
홍이 입이 뾰족 튀어나옵니다.
"가르쳐 줄게. 이리 와 봐. 오디에는 있고 푸르뎅뎅에는 없는 게 뭐냐면……."
정이는 홍이의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진짜? 그럼 내일 아침에 볼 수 있는 거야?"
정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입니다.

홍이는 낮은 곳에 있는 뽕나무 가지를 움켜쥡니다. 오디를 따서 작은 입 속에 마구 집어넣습니다. 정이도 그런 홍이에게 질세라 더 큰 가지를 힘차게 잡아당깁니다. 휘어진 뽕나무 가지 사이로 맑게 갠 하늘이 정이 눈 속으로 쏟아져 내립니다. 아득히 흩뿌려진 하얀 구름들 속에서 꿈인 듯 아빠 얼굴이 스쳐 지나는 것 같습니다. 정이는 코끝이 찡해집니다.
'고마워요, 아빠. 그리고 하나님!'

다음 날 아침, 화장실에 들어갔던 홍이가 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높입니다.
"누나, 할머니! 나왔어!"
"아니, 아침부터 뭐가 나왔다는 게야?"
할머니가 부엌에서 그릇을 달그락거립니다.
"오디똥! 까만 똥이 진짜로 나왔어! 누나, 우와!"

홍이의 외침 소리와 졸아드는 된장국 소리가 음악소리처럼 경쾌한 아침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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