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게와 종교 그리고…

삶의 무게와 종교 그리고…

[ 말씀&MOVIE ] 말씀&MOVIE

최성수 목사 sscc1963@daum.net
2014년 12월 17일(수) 11:05

   
 

거인
(감독: 김태용, 드라마, 12세, 2014)
 
김태용 감독의 첫 장편작 '거인'은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시민평론가상과 올해의 배우상(최우식)을 받은 작품이다. 감독의 청소년 시절을 담은 자전적인 영화라 더욱 공감적으로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미성년 자녀는 부모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이 말은 부모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법적 책임을 환기하기보다는 건강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는 시기임을 강조한다. 그렇다고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성장하는 아이들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건강한 성장을 위해 필요한 조건과 환경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부모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미성년 청소년을 위해 종교와 국가는 부모의 역할을 대신해줄 수 있는 복지시설을 마련해놓는다. 보육원 혹은 그룹 홈이 그런 곳이다. 이곳을 책임지는 사람들이 엄마 혹은 아빠라 불리는 이유도 비록 혈연적인 관계는 아니라 해도 법적으로 혹은 실제로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삶이 어떠할 지는 아마도 일본 영화 '아무도 모른다'(고레에다 히로카즈, 2005)를 통해 가장 잘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시의 한 작은 아파트에 유기된 아이들은 그야말로 도시의 쓰레기와 다르지 않았다.
 
'거인'의 영재(최우식 분)는 쓰레기로 전락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갖은 애를 쓴다. 엄마도 그렇고 아빠도 그렇고 두 형제를 책임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무작정 방치하는 것도 아니다. 어느 정도는 부모로서 책임감을 의식하고 있고 또 온전한 책임을 질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하지만, 그들 스스로 세상을 살아가기에 버거워 아이들에게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국가와 복지시설이 아이들을 맡아주길 바랄 뿐이다.
 
아이들을 짐으로 여기는 혹은 성장에 필요한 보호를 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영재는 스스로 집을 나와 그룹 홈으로 들어갔다. 나름 생존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이런 삶의 환경에서 어떻게든 살아내야만 하는 영재의 모습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서 더 이상 자신을 보호해줄 수 없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타자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려는 영재의 처절한 노력을 보여준다.
 
후원물품을 훔쳐 학교 급우들에게 팔아 돈을 챙기고,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함께 방을 쓰는 친구를 배신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갈 나이가 되었지만 거짓말로 둘러대면서 계속해서 머물 기회만을 찾는다. 그래서 그룹 홈이 성당과 연계되어 있음을 알고 성당의 도움을 받기 위해 신부가 되겠다는 결심을 내비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미성년으로서 영재가 세상을 살아내기 위한 삶의 한 방식이었다. 당연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결과는 아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보호를 받아야 했고,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내야만 했던 삶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그랬다. 특히 동생마저 시설에 맡기려는 아버지에게 분노를 표출한 것도 순전히 자신의 생존방식에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처량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발버둥 쳤지만 계속 막다른 골목으로 이어지는 현실이다. 성당 안에서 흐느끼는 장면은 더 이상 기댈 곳을 발견하지 못한 영재의 가슴 아픈 현실을 표현한다.
 
이것은 필자가 매우 인상 깊게 본 장면인데, 기독교인이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 장면에 착목하여 감상할 경우, 영화는 단지 보호받지 못하는 한 청소년이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에만 집중한다고 볼 수 없다. 다소 색다른 성장통만을 말하려는 것 같지도 않다. 막다른 골목 같은 삶의 현실에서 종교가 갖는 의미에 특별히 주목한다. 그리고 거침없이 질문을 던진다. 곧, 자신이 기대할 것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해서 영재는 성당을 찾았고, 그곳에서 자기 자신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슬픈 현실을 내다보면서 서러움에 복받쳐 흐느끼는데, 과연 영재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막다른 골목에서 종교에 귀의하는 것은 안전한 포구에 안착했다는 느낌을 주어 신앙의 관점에서 지극히 당연하고 또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성당 안에서 흐느끼는 영재의 모습에 의문이 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영재와 비슷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유기하는 현실 때문이다. 관심을 갖고 노력하면 충분히 보호할 수 있는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외면한다. 종교에 귀의하는 것을 인생의 포구로 돌아왔다고 여겨 환영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마땅히 보호 받아야 할 현실의 문제는 철저히 외면한다. 종교에 귀의하기까지 겪어야 했던 처량한 현실을 단순히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묻어버리는 것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교회는 신앙을 결심하기까지의 삶의 현실까지 고려해서 성도들을 돌보아야 할 것이다. 
 
최성수 목사/神博ㆍ영화 및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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