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더라도 바르게 살면 그게 잘사는 것"

"가난하더라도 바르게 살면 그게 잘사는 것"

[ 포토뉴스 ] 함께 잘사는 사회 만들기 꿈꾸는 '잘살기기념관 관장 마대복 장로'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4년 09월 15일(월) 17:43
   
▲ 마 장로에게 어머니의 회초리는 '엄한 사랑'의 다른 말이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사저인 서울 종로구 이화동 이화장(梨花莊) 뒷편에는 태극기와 새마을 운동 깃발이 꽃혀 있는 스레트 지붕의 한 허름한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이름하여 '잘살기기념관'. 계단을 내려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정면에 어머니에게 회초리를 맞는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이 아이가 바로 '아름다운 세상'의 주인공, 잘살기기념관장 마대복 장로(동숭교회)다.
 
때는 1948년 장소는 전북 정읍 옹동면 용호리. 초등학교 5학년인 마대복 어린이는 6.25 사변이 터져 3년째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있었다. 대복은 매일 같이 10리(4km) 거리에 있는 산에 올라가 나무나 숯을 받아다가 20리 길을 걸어 장에 내다파는 일을 3년 동안이나 하고 있었다. 무거운 나뭇짐을 지고 몇 십리를 걸어야 했던 대복의 나이는 고작 11살. 고된 육체의 고통을 잊기 위해 형들이 가르쳐준 담배를 몰래 피워댔다. 삼잎을 말아피웠으니 지금으로 치면 대마초를 피웠던 것이었다.
 
11살 짜리의 '몰래 흡연'은 얼마 가지 않아 어머니에게 들통이 났다. 화가 난 어머니는 아들을 방으로 끌고 들어가 대나무 뿌리로 된 회초리로 아들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어린 것이 벌써 담배를 배우다니. 어린 아들이지만 너에게 희망을 걸었는데…."
 
그러나 어린 대복은 용서를 빌기는 커녕 어머니에게 대들었다. "학교도 못다니는데 무슨 희망이야?"
 
매를 때리던 어머니가 움직이지 않는다. 자세히 보니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래, 내가 굶어 죽어도 너 학교에는 보내줄께."
 
결국 대복은 학교에 복학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리(지금의 익산)에서 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가난의 굴레는 쉽게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수업료를 석달치 내지 못하자 학교에서 쫓겨난 것. 대복은 "서울 가서 공장 직공이라도 하면서 학교를 다니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서울이 어떤 곳인데 혼자 가려느냐"면서 같이 짐을 쌌다. 어머니는 나머지 가족을 두고 대복과 함께 둘만 서울로 올라가 을지로 5가 텐트촌에 짐을 풀고 나물장사를 시작했다. 친아들도 아닌 대복을 위해 어머니는 엄청난 희생을 치른 것이다. 대복은 구두닦이를 시작하면서 한영고등학교 야간과정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국어 수업 시간, 갑자기 전깃불이 나갔다. 선생은 어둠 속에서 덴마크의 발전의 이유를 말해주었다.
 
"달가스가 나무심기 운동을 했고, 그룬트비가 정신개조운동을 부르짖으며 각 대학에 다니며 강의를 한 것은 모두 알고 있지? 책에 안나온 얘기를 해줄께. 덴마크 인재의 산실인 국민고등학교를 세운 사람은 달가스도 그룬트비도 아닌 크리스텐 콜이라는 19살 먹은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않은 청소년이란다. 그는 진실한 크리스찬이었는데 구두방을 하던 아버지의 창고를 헐어 20명의 학생들로 학교를 시작했고, 결국 그 학교는 3000명 학교로 성장했단다."
 
국어선생님의 이야기는 피곤에 지쳐 엎드려 있던 어린 대복의 가슴에 깊이 스며들었다.
 

   
▲ 구두닦이를 하면서도 꿈을 포기 하지 않았던 마대복 장로. 그 시절을 생각하며 포즈를 취했다.

'나는 크리스텐 콜보다 5년이나 더 공부를 했는데 무엇을 하고 있나? 나는 초라한 구두닦이일뿐인데. 나도 어려운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자'
 
대복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경희대학교에 진학했다. 대학 등록금은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와 공장직공, 신문배달, 은단장사 등을 하며 겨우 겨우 메울 수 있었다. 1964년 군대를 제대한 후 그는 이듬해부터 고등학교 시절 크리스텐 콜 같은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실천하기로 했다.
 
대복은 1965년 5월 6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 동창공민학교를 몇번 찾아간 끝에 장소 사용을 허락받아 '잘살기학원'을 개원했다. 가난하더라도 바르게 살면 그게 잘사는 것이라는 그의 확고한 신념에서 나온 이름이다. 20여 명의 아이들과 함께 시작된 잘살기학원은 3개월만에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동창공민학교가 폐교되어 건물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것. 그러나 그런 어려움도 그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창신동 가로등 밑에서 수업은 계속됐다. 동네 주민들이 시끄럽다 항의하자 그는 자신의 집에서 수업을 계속했다. 일찍 온 아이들은 방에 들어가서, 늦게 온 아이들은 문 밖에서 수업을 들어야 했지만 아이들은 밤마다 대복의 집 앞에 모였다.
 
장소도 문제였지만 학교운영자금이 문제였다. 학생들이 워낙 가난해 책과 노트도 사주어야 했다. 이를 위해 대복은 다시 구두닦이를 시작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의 눈물 겨운 노력과 헌신이 계속되면서 그의 뜻에 동참하고, 도움의 손길을 보내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경희대 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학교 본관에서 교복을 입고 구두닦이를 하던 대복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총장 눈에 띄게 되었다. 그의 사연을 알게 된 총장은 자선음악회를 열어 모금을 해주었다.
 
딱한 소식을 접한 동사무소에서는 2층 회의실을 마련해주었다. 구두닦이를 만류하던 학교 친구들도 구두닦이에 동참하고, 야학 선생으로 자원하기 시작했다.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차곡 차곡 쌓이면서 언론에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여러 언론에서 잘살기학원이 보도되자 어느날 청와대에서 민원비서관이 찾아왔다. 며칠 후 박정희 대통령은 그를 청와대를 초청해 자신의 친필로 쓴 현판과 현금 20만원을 전달했다. 또한, 서울대학교에서는 관리부지인 종로구 이화동에 교실을 마련하도록 260평의 땅을 제공했고, 경희대에서는 전 교직원 봉급의 5%를 모아 전달해 주기도 했다.
 
그는 학생, 교사들과 함께 직접 흙벽돌을 찍어 교실을 건축하고 5개 교실을 마련했다. 기독교식 학교로 교육하기 위해 대한청소년성경구락부 본부에 가입했다. 그는 크리스찬이었던 크리스텐 콜을 닮기 위해 스스로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동숭교회에 출석했다. 학생들과 매주 동숭교회에서 예배를 드렸고, 외국 선교사들을 일일강사로 초빙해 강의를 듣기도 했다.
 
   
▲ 기념관을 방문한 홍콩 방문객들에게 기념관 소개를 하고 있는 마 장로.

1972년에는 일원동에도 학교를 세웠다. 잘살기학원은 학생들이 점점 줄어들면서 1987년 문을 닫게 됐다. 잘살기학원에서는 총 3600명이 졸업했다. 가난으로 인해 정식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이들이지만 대학교수, 목사, 소설가 등 많은 인재들이 배출됐다.
 
잘살기학원은 문을 닫은 지 오래됐지만 올해 5월 다시 기념관으로 개조되어 문을 열었다. 당시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함께 잘사는 사회로 만들고 싶은 그 꿈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리라.
 
마 장로는 지금도 기념관을 찾는 이들에게 어머니의 사랑과 바른 이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앞으로는 가족상담 및 청소년상담도 진행할 계획이다.
 
"얼마 전 10여 명 되는 노년들이 갑자기 기념관을 찾아왔어요. 그러더니 자기들이 잘살기학원 졸업생이라는 거예요. 나이 육십이 넘은 사람들인데 대뜸 저에게 단체로 큰 절을 하는거예요. 선생님 덕분에 가난을 딛고 희망을 꿈꿀 수 있었다고 말하면서요. 내가 했던 일이 헛되지 않았구나 생각했죠. 그저 저처럼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 시작한 일인데 이렇게 큰 결과를 가져올 줄은 몰랐어요. 모두 하나님의 은혜지요."
 
웃고 있는 마 장로의 눈에 이슬이 슬쩍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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