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더불어 사는 삶의 필요성

죽음과 더불어 사는 삶의 필요성

[ 말씀&MOVIE ]

최성수 목사 sscc1963@daum.net
2014년 09월 03일(수) 11:24

 
안녕, 헤이즐(감독: 조쉬 분, 드라마/멜로, 12세, 2014)

   
 
<스포일러 있음> '안녕, 헤이즐'은 하이틴 멜로 영화다. 원제는 '잘못은 우리 세상에 있다'인데, 관객들에게 반전을 일으킬 요량으로 바꾸었다고 생각한다. 하이틴 멜로 영화치고는 다소 무거운 소재이지만, 죽음을 앞둔 청소년들의 사랑과 우정을 말한다. 10대들의 감수성을 극도로 자극할 만한 이야기다. 그래도 신파는 결코 아니며 또한 10대들만이 보아야 하는 영화도 아니다. 모두를 위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10대들은 그들 방식의 풋풋한 사랑과 싱그러운 우정을 볼 수 있겠지만, 그 밖의 세대들에겐 삶과 죽음의 문제를 성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루영화임이분명하지만 결코 물리지 않을 정도로 괜찮게 만들어졌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삶의 한 가운데서 죽음을 생각한다. 종말을 늘 염두에 두면서도 가끔은 종말을 앞서 경험한다. 종말을 경험하는 방식은 극심한 고통이며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을 들락거리는 순간들이다. 자신들을 대하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표현되는 슬픔과 안타까움을 통해서도 그들은 죽음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짐작한다. 그들은 그렇게 죽음을 앞서 경험한다. 슬픈 일이지만 때로는 궁금하기도 하다. 특히 죽음 이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그렇다.
 
그러나 정작 죽음에 맞닥뜨리게 되면 어떻게 될까? 직접 경험하게 되는 때가 오면 의식을 잃거나 고통이 심해 경험한다는 의식도 갖지 못할 것이다. 끔찍하다는 말이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그러니 죽음에 대한 경험은 살아있을 때 갖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안녕, 헤이즐'은 삶 속에서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 그것의 의미를 성찰하는 영화다.
 
삶 속에서 죽음을 생각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한편으로는 현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꿈이다. 대체로 고통스럽고 끔찍하지만 때로는 아름답기도 하다. 적어도 직접 맞닥뜨리기 전까지 죽음은 상상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에 가까이 이르게 되면 고통이 커지고 또 존재의 망각을 일으키고 또한 기대하는 것과 다르기도 하니 끔찍스럽고 두렵기도 하다. 상반된 감정은 당사자가 삶과 죽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니 차라리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기보다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과정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특히 죽음 이후에 남겨진 사람들의 삶을 떠올려보는 것도 좋고, 죽음이 다가오기 전에 나의 진면목을 보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혹시 그렇다면 죽음조차도 아름다울 수 있지 않을까.
 
죽음 후에 남겨진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유명작가의 소설을 읽은 헤이즐이 끊임없이 대답을 찾으려 한 질문이었다. 죽음을 끝으로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어버렸으니 그 후가 궁금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러나 헤이즐이 집착이라고 여길 정도로 관심을 기울이는 까닭은 따로 있었다. 무엇보다 먼저는 죽음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저자라고 생각해서 그렇다. 마치 죽음을 경험하고 난 사람처럼 보여 죽음 이후의 삶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이 죽은 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장 현실적으로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의 죽음 이후에 주변의 사람들의 반응을 미리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잊게 될까? 금방 새살이 돋는 상처같이 여기지는 않을까? 아니면 슬픔으로 세월을 보내게 될까? 삶을 포기하지는 않을까?
 
작가로부터 듣고 싶었지만, 까칠하고 무례한 작가를 만나고 난 후에는 포기한다. 그러는 중에 헤이즐은 스스로 그 경험을 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통 가운데 죽음에 근접해가는 남자 친구를 지켜보면서, 그리고 그의 시신 앞에서 읽어줄 추도사를 준비하면서 헤이즐은 죽음 이후에 남겨진 사람들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어렴풋이 깨닫는다.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렇다. 죽음의 의미는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아는 것이며 또한 죽음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는다. 다시 말해서 작가를 상상했을 때와 작가를 만났을 때가 달랐듯이, 헤이즐은 죽음을 생각했을 때와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한 이후가 달랐다. 헤이즐은 죽기 전에 남자친구가 쓴 추도사를 읽음으로써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알게 되고,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는다.
 
죽음 앞에서 얻는 메시지, 곧 나는 누구이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것은 굳이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일이 아닌가? 오늘 우리에게 종말론적인 신앙이 필요한 이유이다.
 
최성수목사 / 神博ㆍ영화 및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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