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구하는 자는 세상을 구하는 자이다

생명을 구하는 자는 세상을 구하는 자이다

[ 말씀&MOVIE ]

최성수 목사 sscc1963@daum.net
2014년 08월 12일(화) 14:30

어둠 속의 빛(감독: 아그네츠카 홀란드, 드라마, 청소년관람불가, 2011) 

   
 
'어둠 속의 빛'은 2011년에 제작되어 개봉되었지만, 국내에는 2013년 국제사랑영화제에 초청되어 소개되었다. 나찌 점령국 폴란드의 리버포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소설로 쓴 로버트 마샬의 작품(르보프의 하수구에서)을 바탕으로 만들었는데, 사실 마샬은 실제 인물인 크리스티나 히게의 회고록 '녹색스웨터를 입은 소녀'를 토대로 소설을 썼다.
 
내용은 하수도 관리인 레오폴드 소하가 420일 동안 11명의 유대인을 숨겨줌으로써 나찌의 학살로부터 그들의 생명을 구출해낸 이야기다. 나찌의 학살을 피해 목숨을 구한 11명의 사람들은 '소하의 사람들'이라고 불렸는데, 영화는 이들이 하수도에 머물면서 겪었던 이야기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기울인 소하의 수고와 노력을 긴장감 있게 전해주고 있다. 특별히 처음에는 돈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보호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유대인을 보호하기 위해 심지어는 자신을 철저하게 신뢰했던 친구를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였다. 
 
유대인들이 은신처로 사용된 하수도는 시체와 쥐 그리고 각종 오물로 악취가 진동하였고, 이곳에서 지내느니 차라리 수용소가 낫다고 생각해 도망갔던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당시 유대인들이 겪어야 했던 것들에 비하면 비극적인 삶의 단면일 뿐이지만, 지옥과 다름없는 곳에서 1년 넘게 지내는 동안 그들이 보여준 삶의 모습은 참으로 놀라웠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사랑을 나누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함께 유대교 절기를 지켰다. 사랑을 배신하여 떠나는 자도 있었고, 갓 태어난 아이를 엄마가 질식시켜 죽이는 비극도 일어났지만, 서로가 서로를 지키고 보호하며 살았다. 그곳은 단지 환경이 다르고 활동이 제약되어 있었을 뿐, 지상의 유대인들이 겪는 현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지상에서의 삶은 죽음으로 끝났지만, 지하에서의 삶은 생명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영화에는 자세히 나타나지 않아 영화를 보는 내내 궁금하게 생각했던 점이 있다. 소하는 마을에서도 매우 가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은신처를 고발함으로써 오히려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었는데, 무엇 때문에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을 감수하였을까? 무엇이 소하의 마음을 바꾼 것일까? 이 부분이 영화는 물론이고 소하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것임에도 영화는 밝히지 않고 있다. 감독은 왜 그의 심경의 변화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던 것일까?
 
물론 영화는 당시 어린 소녀였던 히게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소하의 바뀐 마음을 명확히 알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하 역시 얼마 후 교통사고로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점을 밝힐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쉰들러 리스트'(1993)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제기된다. 스필버그 감독은 기회주의자였던 오스카 쉰들러가 왜 유대인을 구하려고 했는지에 대해 분명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았다. 나찌의 학살을 목격하면서 리스트를 작성하는 데에 박차를 가했지만, 그렇다고 인도주의적인 생명 존중 사상에서 우러나온 것도 아니었고, 공장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이었을 뿐이라는 주장만으로 그의 행동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이유가 분명치 않은 다소 애매한 태도를 끝까지 견지하고 있다가 나중에 가서야 비로소 자신이 더 많은 유대인을 구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는 장면으로 마치고 있다. 왜 이 두 영화에서는 유대인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서 분명한 의도를 밝히지 않은 것이었을까?
 
사실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일은 어떤 사상이나 이유에 근거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행위이어야 한다. 탈무드에 생명을 구하는 일은 세상을 구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해 위험에 처한 생명을 구하는 일은 어떤 생각의 결과이거나 어떤 사상에 근거해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에서 발현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양심에 호소하기 위해 굳이 구체적인 심경의 변화를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맹자는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볼 때, 구하고 싶은 마음을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고 했는데, 설명하며 말하기를 “아이가 물가에 놀다가 물에 빠지려고 할 때, 어떤 사람이 다급히 그 아이를 구하는 것은 아이의 부모에게 잘 보여서 보상을 얻으려 함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생명을 구함에 있어서 어떤 이유 때문에 외면한다든가, 혹은 대가를 요구하는 일은 오히려 인간됨에서 벗어나는 행위이다.
 
생명을 구하는 일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서 핵심이며,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는 행위로서 하나님의 형상됨의 한 요소이다.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종교적인 교리에 사로 잡혀 생명을 구하는 일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현대사회에서 종종 볼 수 있듯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거나 절박한 심정으로 생명을 구하는 사람에게 돈이 없다는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는 일은 천박한 상업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일탈현상이다. 게다가 세월호 침몰 사건은 현대 대한민국 사회가 생명보다 다른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폭로한다. 대한민국이 비정상임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사건이며, 또한 하나님이 한국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경고가 아닐 수 없다. 생명을 구하는 일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최성수목사 / 神博ㆍ영화 및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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