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8월 11~16일

[가정예배]8월 11~16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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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8월 06일(수) 13:36

월-하나님을 향한 창문
본문 : 단 6:10
찬송 : 405장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비결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창문을 여는 데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온전히 열려야 한다. 과연 어떤 창문을 열어야 할까?
 
먼저 믿음의 창문이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10)."
 
다니엘이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하나님을 우선순위로 삼는 믿음이었다. 다니엘은 인생에서 하나님을 가장 크게 보았다. 하나님을 크게 보니 다른 것은 작게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의 창문을 여는 자에게 임하는 은혜이다.
 
무엇을 크게 보고 사는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세상인가?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고, 환경을 보면 두렵고 불안하기 짝이 없다. 부디 하나님을 우선순위로 삼고 하나님을 크게 보는 믿음의 창문을 열기를 바란다.  그리고, 기도의 창문이다. 본문 10절을 다시 보자.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기도는 하나님을 향하여 영적인 창문을 여는 것이다.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가서도 기도를 잊지 않았다. 하나님을 향해 언제나 기도의 창문을 열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오랜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과 깊이 사귀려고 하는 사람과 하나님은 깊이 사귀시며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사람과 만나 주신다. 부디 하나님을 향해 기도의 창문을 열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감사의 창문이다.
 
기도와 감사는 나누어 생각할 수 없는 관계이다. 축복은 언제나 감사와 연결된다. 그러므로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확신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의 창문을 열어야 한다. 신앙인은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이다. 때문에 역경 중에도 열려진 창으로 감사의 반응이 나와야 하며 감사가 생활화되어야 한다.
 
환경에 어려움이 있거나 삶의 고난이 있는가? 자녀 문제로 걱정하고, 경제적인 문제로 어려운가?
 
어려운 때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기회로 알고 하나님을 향하여 창문을 활짝 열기를 바란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었던 다니엘에게 주셨던 은혜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임할 것을 확신하시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 믿음의 창문을 열어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기도의 창문을 열어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며 감사의 창문을 열어 하나님의 승리를 체험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세일 목사
/고산동부교회


화-미래를 아끼지 말라
본문 : 창 22:1~12
찬송 : 484장

아브라함과 사라가 백세에 얻은 이삭에겐 아마 어마어마한 사랑이 쏟아졌을 것이다. 하나님은 어두웠던 아브라함의 미래에 이삭을 통해 빛을 주셨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미래였고, 하나님과의 신뢰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그의 가문과 이스라엘의 미래를 상징하는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다.
 
시험이란 선택이다. 어느 길로 가야 제대로 된 우리의 미래로 갈 수 있을까? 어떤 선택을 해야 보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미래의 길로 갈 수 있을까? 어떤 선택이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일까? 우리 인생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본문 속의 아브라함은 담담하다. 그는 한 때 하나님께서 소돔 땅을 심판하려고 할 때, 끈질기게 매달리며 하나님과 밀당을 했던 사람이 아닌가. 아브라함은 애착이 강하고 끈질겼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한 마리의 양처럼 자기 갈 길을 초연히 걸어간다. 묵묵히 자신의 미래인 이삭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다.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의탁하는 경외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히브리어로 '아끼다'라는 말은 '제한하다', '억누르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아낌이 지나치면 애착이 되고 제한과 억누름이 된다. 지나친 부모애가 이런 모습이 아니던가.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 꿈꿔왔던 미래에 집착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미래가 열리게 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우리는 미래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말씀은 너무 근심하지 말고, 미래를 너무 아끼지 말라고 한다. 미래에 대해 초연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래를 위한다고 하면서 너무 아낀 나머지 하나님의 간섭으로부터도 미래를 격리시켜 놓는 우를 범하곤 한다.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관여가 부담스럽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것과 같이 너무 무리한 것을 내 인생에 요구하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미래를 준비하시는 분이다. 단,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아끼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내려놓을 때 그 길이 열릴 것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 오지 않은 미래 때문에 불안해하지 말게 하시고, 주 앞에서 내가 움켜잡은 미래의 손을 놓을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안치석 목사
/생극교회


수-마음의 문을 열어주세요
본문 : 요 9:1~12
찬송 : 84장

다른 어떤 장애보다 볼 수 없는 장애가 가장 힘들다고 한다. 헬렌 켈러는 "들을 수 없는 고통보다 말할 수 없는 고통보다 더 힘든 것은 볼 수 없는 고통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육적으로 볼 수 있는 것만 볼 수 있다. 헬렌 켈러는 육적인 시력이 어두워지는 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영적인 시력이 어두워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못 보는 것보다 미래를 볼 수 없는 것, 주님을 볼 수 없는 것이 더 불행한 것이다. 영적인 시력은 어떻게 회복되어질 수 있을까?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영적 맹인이었음을 알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장애의 씨앗을 가지고 태어났다. 육적으로는 시간이 지나면서 노화가 일어나고 육신의 장애를 느끼며 살아간다. 아담의 죄로 인하여 우리는 불안해하고 두려워한다. 우리는 보이는대로 느끼는대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시기하고 불신한다. 마음이 죄로 오염되어서 그렇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온 인류는 죄로 물들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를 단절한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마음의 문을 열게 하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께서 길을 갈 때 제자들이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보고 누구의 죄 때문인가 물었을 때 예수님은 어느 누구의 잘못이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맹인의 눈에 침으로 진흙을 이겨 바르시고 실로암에 보내어 씻으라 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했던 맹인은 눈을 뜨게 되었다. 예수님은 오늘도 온 인류의 눈을 열기 위해 실로암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그리고 말씀을 듣게 하시고 순종하여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오늘도 하신다.
 
셋째로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눈이 열려지길 원하신다. 영적 맹인으로 태어난 우리가 교회를 통해 말씀을 듣고 영적인 눈을 열어서 하나님을 보고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기를 원한다. 진흙을 바르는 손이 어떤 손인지 몰랐던 맹인 거지는 치료함을 받고 눈을 떠서 예수라는 이름만 알고 증거했다. 바리새인들이 그를 붙잡아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물었을 때 그는 선지자였다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였다고, 나중에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한다. 믿음이 성장하는 모습이다.
 
오늘도 우리에게 있는 많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맹인을 눈뜨게 하시고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시는 예수님의 그 손을 볼 수 있기를 원하며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주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한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한 평생 사는 동안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성민 목사
/울산호계교회


목-축도의 의미
본문 : 고후 13:13
찬송 : 7장

축도는 예배의 마지막 순서이지만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 예수님의 지상 명령, 바울의 축도를 근거로 하는 목회자의 축도 등은 공통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언급한다. 삼위일체 신앙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삼위일체이며, 삼위일체의 핵심은 기독론이다. 예수님께서 참 인간, 참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는 과정에서 삼위일체 신앙이 확립되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 신학사상은 삼위일체를 경시하거나 심지어 공박하고 도전한다.
 
'삼위일체'가 성경에 어디 있는가 그것은 사람들이 투표로 결정한 것이 아닌가 라고 공격한다. 이는 맞는 듯하지만 전체적으로 맞는 말이 아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지만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적이다. 먼저 예수님께서 친히 신성을 주장하신 증거들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몇 가지 증거는 다음과 같다.
 
"네 죄를 사함을 받았노라(막2:5)", "아브라함보다 먼저 나셨다(요8:58)",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10:30)." 또한 사도들도 이를 증거하다가 순교하였다. 예를 들어, 의심 많은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요 20:28)"이라고 고백했다. 성부는 구원을 계획하시고, 성자는 구원을 성취하시고, 성령은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하신다.
 
삼위일체 교리는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교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정과 교회 공동체의 모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비이다. 서로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고, 유일하신 한 분이시다.
 
어떻게 이러한 하나됨이 가능한가? 그것은 사랑 때문에 가능하다. 성자와 성부와 성령께서는 서로를 영화롭게 하며,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며, 서로를 증거하며, 사랑과 섬김의 친교 공동체를 이루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의 부부생활,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교회생활에 구현하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첫째, 서로 다른 것을 존중하라.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실 때, 각기 그 종류대로 만드시며 보시기에 좋았다며 기뻐하셨다.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감사하고 예찬하자. 둘째, 서로 다르지만 하나 됨을 추구하자. 서로 섬기며 사랑하고, 서로를 높여주고, 오래 참고 겸손하며 무례히 행하지 않도록 하자.
 
다양성을 존중하고 하나됨을 이루어갈 때 우리 가정과 교회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오늘의 기도
 
삼위일체의 하나님, 사랑과 섬김의 사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모습처럼, 저희도 서로의 다름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하고 사랑 안에서 하나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정과 교회에 나타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윤덕영 목사
/삼성교회


금-"키리에 엘레이손!"
본문 : 눅 17:11~19
찬송 : 214장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은 분명 십자가를 향해 가셨다. 그러나 가장 높은 곳에서 모든 민족을 다스리시는 통치권을 행사하러 가시는 길이기도 했다. 이제 그분은 갈릴리를 뒤로하고 나가시다 한 촌에 들어가셨다. 한 마을에 사는 한센병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 그들 역시 예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백성들이다. 백성들은 주님을 알아보기 마련이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이들은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들 중 몇몇만이 예수님께 나아왔다.
 
이들은 레위기의 율법대로라면 누군가가 자기들에게 오지 않도록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경계 신호를 보냈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이 기회는 더욱 간절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만큼 거리를 지켰다. 믿음이 좋은 사람일수록 법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믿음을 더욱 돋보이는 길이다.
 
모든 사람의 왕이신 예수님, 모든 이를 마음에 품고 계신 예수님은 다른 이들을 배려하며 법을 지키는 이들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으신다. "엘레이손"이라고 한 목소리로 부르는 소리에 예수님은 반응하셨다.
 
"키리에 엘레이손" 기독교회가 지난 이천년의 세월을 통해 주님을 부른 말이다. 예배당에서 목소리를 높여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다. 그때마다 주님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들으셨다. 왜 일까? 모든 사람의 주인이시기에 부르면 들으신다.
 
그런데 예수님이 고쳐 주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냥 "가라"고 하신다. 가서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하신다. 치유는 믿음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일어난다. 제사장을 찾으러 몸을 돌리는 순간 변화가 감지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치유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찬미가 끝날 때까지 예배는 끝나지 않는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치유를 자기 눈으로 확인한 순간 찬미가 터져 나왔다. 치유를 확인한 순간 예수님이 내게 직접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 되었다. 그리고 자기가 사마리아인임을 밝힌다. 예수님이 모든 이들의 왕이심을 아직 몰랐기 때문에 사마리아인에게도 은혜를 베푸신 것을 꼭 말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은 나머지 아홉은 어디에 있는가를 물었다. 나머지 아홉을 물으시며 이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하셨으니 나머지는 유대인인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하나님과 더욱 가까운 선민이기에 사마리아 사람들을 무시하고 차별했던 유대인들은 안타깝게도 스스로 하나님의 친밀한 백성임을 거부했다. 이는 감사가 결여된 결과이다.
 
예수님은 만백성의 주이시기에 누구를 빠뜨리시는 법이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따른 인간의 마땅한 믿음의 반응이다.
 
오늘의 기도
 
모든 상황 속에서 믿음의 주를 바라보며 "키리에 엘레이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임선미 목사
/예지교회


토-결코 타협하지 말라
본문 : 출 8:25~31
찬송 : 352장

영적 성장에는 장애물이 있다. 사탄은 우리를 육신의 정욕과 죄의 종으로 살도록 미혹하고 유혹하며 타협한다. 특히 예배를 무너뜨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우리 삶의 기준은 예배요, 예배 생활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본문에 나오는 바로 왕에게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영적 성장의 길에서 우리가 만나는 바로의 제안(마귀의 타협)은 네 가지 단계이다.
 
첫째, 애굽 땅을 벗어나지 말라는 것이다.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8:25)." 마음과 생각은 세상에 남겨두라는 것이다. 교회는 나가되 세상은 떠나지 말라는 것이 사탄의 첫 번째 타협이다. 배가 대양을 항해하려면 부둣가의 줄을 풀어줘야 하는 것처럼 참신앙도 세상의 즐거움을 담대히 떠나야 한다.
 
둘째, 너무 멀리가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8:28)." 너무 야단스럽게 믿지 말라는 것이다. 적당히 믿으라는 것이다. 합리적인 말처럼 들리지만 유혹이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셋째, 남자들만 가라는 것이다.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10:11)." 혼자만 믿으라는 것이다. 우리가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길 때 이렇게 타협한다. "열심히 믿어도 좋다. 그러나 너 혼자만 열심히 믿어라. 남편까지 자식까지 변화시키려고 하지 말고 너 혼자 가라."
 
넷째,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가라는 것이다.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10:24)." 모든 것은 다 허락하되 물질은 두고 믿으라는 것이다. 양과 소(소유)가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는 것을 막아 보자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것 중에 제일 가벼운 것이 물질이다. 물질조차 헌신하지 못하면 어떠한 헌신도 할 수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신앙 성장의 길에서 최종적으로 믿음이 자라지 않고 반복하여 시험에 넘어지는 이유가 물질 때문인 경우가 많다.
 
주님께 붙어있는 밀착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사단은 항상 협상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일부만 순종하게 만든다. 또한 말씀을 지키지 못하게 하고 순종하더라도 억지로 행하게 한다. 타협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결하는 성도가 되시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주님,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미혹과 타협의 틈을 주지 않도록 주님께 붙어 있는 인생, 주님의 뜻과 나의 뜻을 하나로 묶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해성 목사
/거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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