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7월 21~26일

[가정예배]7월 21~26일

[ 가정예배 ] 가정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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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7월 16일(수) 15:14

월-산꼭대기에 서리라
본문 : 출 17:8~16
찬송 : 364장

인생은 곧잘 마라톤, 항해, 전쟁에 비유된다. 오늘 본문은 전쟁에 대한 내용이다. 그 전쟁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를 보여주고 있다. 바로 산 위의 전쟁과 골짜기의 전쟁이다. 사람들은 골짜기의 전쟁에서 이기면 된다고 생각한다. 군인의 숫자, 적군을 무찌를 수 있는 전략과 무기 등이 골짜기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문은 그것만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해야 승리할 수 있다고 말하는가?
 
첫째,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아야 한다.
 
출애굽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모세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주목하셨다. "그래도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계속 말하는 모세를 향하여 하나님은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적을 행하라고 말씀하신다. 9절은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고 밝히고 있다. 이제 이 지팡이는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다.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기적을 행하는 지팡이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보자. 과연 나의 손에는 무엇이 들려 있는가? 이것들이 하나님에 의해 쓰임받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자.
 
둘째, 산꼭대기로 올라가야 한다.
 
아말렉과 전쟁하는 날, 모세는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하지 않고, 오히려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산꼭대기는 어디이고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쟁의 상황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곳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곳이며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모세는 직접 전쟁터 대신 하나님께로 나아가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하는 일은 하나님을 향한 가장 거룩한 행위이다. 또한 기도하는 사람은 멀리 보는 사람이다. 당장 눈앞의 일에 쫓기는 사람은 기도할 수 없다. 우리는 산꼭대기로 올라가야 한다. 멀리 바라보며 오래 기다림의 기도를 드림으로 주님께 나아가자.
 
셋째, 손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고, 맞서 싸우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손을 들었다. 손을 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고 아울러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한다는 의미이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행동의 표현이 바로 손을 드는 것이다. 우리가 소원하는 간절함을 나타내는 표현이 바로 손을 드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능력, 지혜를 하나님 앞에 모두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의 능력의 지팡이를 잡고 온전히 신뢰함으로 산꼭대기로 올라가야 한다. 손을 들기까지 할 수 있는 최고의 믿음의 고백을 드려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맡겨진 사명을 순종함으로 온전히 감당하게 될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손에 들려진 지팡이를 통해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산꼭대기로 올라가 손을 드는 믿음의 삶을 통해 사명을 감당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세동 목사
/경주중앙교회


화-하늘 논쟁
본문 : 욥 1:13~22
찬송 : 336장

하늘에서 하나님과 사탄이 논쟁이 일어났다. 논쟁의 주제는 인간이 하나님의 지으신 땅에 거할 만큼 과연 믿을 수 있는 존재인가였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가 지으신 인간을 믿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이 지으신 땅을 복된 땅으로 가꾸어 가시려고 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믿고 함께 일할 만한 존재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사탄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심지어 하나님이 그렇게 신뢰하고 있는 욥 마저도 믿을 수 없다고 단정한다. 왜 그는 그렇게 말할까? 인간의 소유욕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땅을 이리저리 두루 다니면서 소유라면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신앙도 포기하는 인간들을 너무 많이 보았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악의 도성도 의인 열 명 만 있으면 새로워질 수 있다고 보시는 하나님은 사탄의 말을 수긍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세속적인 소유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격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신다. 곧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희망적인 존재로 보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사랑의 눈을 통해 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욥을 믿으시고 사탄에게 욥을 공격할 기회를 주신다. 하나님이 욥을 무책임하게 방치하시고 사탄에게 욥의 운명을 맡기시는 것이 아니다. 욥을 믿기 때문에 잠시 맡기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기회를 잡은 사탄은 정말 잔인하고 집요하다. 그러나 결국 욥은 하나님의 기대대로 희망적일 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한다. 어떻게 욥은 이 모진 시험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첫째로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소유를 가져가신다고 해도 하나님 안에는 숨겨진 뜻이 있다고 믿으면서 하나님을 신뢰한다. 둘째는 그가 소유한 모든 것에 대한 신앙적인 해석이다. 그는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그가 축복가운데 있을 때는 선한 청지기로 하나님이 맡겨 주신 그의 모든 것들에 대한 책무를 다한다. 그리고 시련을 당할 때도 모든 것을 그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소유했던 것이 다 사라진다고 해도 하나님이 도로 받으셨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셋째로 시련이 깊어질수록 그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 틈이 생기지 않기 위해 오히려 하나님을 더 갈망한다.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정금같이 나오는 신앙인이 되자.
 
오늘의 기도
 
세속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믿어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며 믿음으로 응답하는 신앙인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권석은 목사
/용전교회


수-보고 있어도 보고싶은 산
본문 : 시 121:1~8
찬송 : 73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다. 몇 년 전 교통사고를 당해 석 달을 누워만 지냈다. 서서히 건강을 회복하고 걸을 수 있게 되자 지리산 종주를 했다. 지리산 천왕봉 일몰을 보며 하나님에게 기도했다. '하나님! 하늘이 높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잘난 듯 날뛰어도 하늘만큼 뛰어나지 못함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계신 하늘을 바라보며 살게 하소서.' 산에 가고 싶다. 종일 걷고 싶다. 산을 오르면 그냥 눈물이 난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흐르는 대로 그냥 걸어간다. 잠시 쉬는 길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바벨론 포로로 지내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들, 얼마나 고향이 그립고 설레였을까? 아마도 그리움과 희망을 가지게 한 하나님께 마음의 찬양을 하였으리라. 시편 121편은 그들의 고백이 담긴 그런 시이다.
 
그들은 무슨 내용으로 이 시를 노래하고 있을까?
 
첫째로, 희망인 하나님을 바라보며 노래 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오른손을 붙잡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본다. 그리고 고백한다. 믿음은 고백할 때 커진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이 믿음이 성장하는 이유이다. 하나님께 믿음을 고백하는 성도이길 바란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나를 돕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 되시고, 하나님이 나의 아픔을 아시고, 하나님이 나의 인도자가 되신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 천지를 지으신 분이고, 능력의 분이시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하나님께서 나를 돕고 계신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느낀다. 기도하며 인도함을 받자.
 
셋째로, 하나님께서 내 손을 붙잡고 계신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나는 넘어지려는데 하나님께서는 내 손을 붙잡고 계신다. 실족이라는 말은 발을 헛디뎌서 넘어진다는 뜻이다. 우리는 죄에 실족할 때가 많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도와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평탄한 길로 인도하신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도움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며, 그 도움이 우리를 실족하지 않게 하고,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며 지켜주신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내 손을 잡아주소서. 우리의 손을 놓지 않는 하나님만 신뢰하게 하소서. 실족하지 않게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진수 목사
/개화동교회


목-하나님의 경고를 들어야 한다
본문 : 민 22:21~30
찬송 : 423장

발락은 하나님을 대적한 이방 민족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 위한 묘안을 찾던 중, 유명한 점술가였던 발람을 알게 되었다. 발락은 발람에게 많은 재물을 약속하며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요청했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서 길을 떠났다.
 
발람이 모압의 지도자들과 함께 길을 떠나자, 하나님은 화가 나셨다. 즉시 여호와의 천사를 보내 그의 길을 막았다. 천사는 칼을 들고 발람의 길을 막고 있었다. 이 광경을 신령하다는 발람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나귀가 보았다. 나귀는 자신과 주인인 발람의 생명이 위험했기 때문에 길을 가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다른 길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도 천사가 길을 막고 있었다.
 
"얼마 후에 여호와의 천사가 두 포도밭 사이에 있는 좁은 길을 가로막고 섰습니다. 길 양쪽에는 담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나귀가 여호와의 천사를 보았습니다."
 
이번에도 오직 나귀만이 보았다. 나귀는 주인인 발람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천사의 칼을 피하기 위해서 벽에 바짝 붙어가다 보니, 발람의 발에 상처가 났다. 발람은 나귀를 때렸다. 지금 이 위기의 상황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발람은 화가 나서 계속 때렸으며, 천사의 칼을 본 나귀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열게 하셨다.
 
"내가 무슨 일을 했기에 이렇게 세 번씩이나 때리시는 겁니까? 나는 주인님의 나귀입니다. 주인님은 오랫동안 나를 타셨습니다. 내가 언제 지금처럼 행동한 적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은 발람의 길을 막았다. 그의 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반역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해하려는 그를 향해 하나님은 진노하셨다. 천사를 통해서 그의 길을 막으셨다. 이 위험한 상황을 발람은 보지 못했지만, 나귀는 보았다.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은 나귀의 입을 열어 말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경고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이유는 살리기 위함이다. 나귀를 보게 하시고, 말하게 하시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가능하게 하신 것도 발람과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발람의 탐욕이 자신의 영적 눈을 닫게 한 것처럼, 우리의 죄가 우리 자신의 눈과 귀를 닫아버린다.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경고를 들으시기 바란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매 순간 반복하는 우리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일을 보며, 말씀을 듣도록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 주시고, 하나님의 경고를 들어, 생명의 길을 걷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위홍수 목사
/한우리교회


금-더 좋은 것을 선택하라
본문 : 눅 10:38~42
찬송 : 407장

예수님의 식사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던 언니 마르다가 주님 발치 아래에서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마리아에 대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주님을 원망했다. 마르다는 주님을 위해 일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일까?
 
첫째, 마르다의 문제는 덜 좋은 것을 선택한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좋은 것을 선택했다. 마르다는 주님을 잘 대접하는 것에 가치를 두었고 반면 마리아는 예수님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함께 시간을 갖는 것에 가치를 두고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마리아가 이기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님은 마리아가 더 좋은 것을 선택했다고 말씀하신다. 마르다의 문제는 마리아보다 덜 좋은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면 마리아를 시기할 것이 아니라 주님이 드실 음식을 만드는 일에 만족을 느끼고 음식을 맛있게 드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기쁨과 행복을 얻으면 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못할 것이라면 더 좋은 편을 선택해야 한다. 이제라도 더 좋은 편을 선택하는 지혜와 분별력과 결단이 필요하다.
 
둘째, 마르다의 문제는 너무 많은 일 때문에 너무 분주했다는 것이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부족함도 문제이지만 과한 것도 문제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마리아라면 많은 음식준비 때문에 나와 함께 할 시간을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지혜로운 신앙생활을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느냐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그 외에 일들은 줄여 나가야 한다. '우선순위'를 잘 결정하는 것이다. 그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기준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일에 있다.
 
셋째, 마르다의 문제는 마리아를 시기하고, 질투한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선택을 했고, 마리아는 더 좋은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마르다는 주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마리아를 시기 질투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과 교회를 섬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기뻐해야 한다. 불편한 마음으로 섬기거나, 불평과 원망으로 섬길 것이면 안 하니만 못한 것이다.
 
시기,질투라는 사소한 감정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마르다는 정신건강이 좋은 사람이다. 그 불편한 마음을 밖으로 드러내고 해결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불편한 마음 때문에 불행해지면 안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도 마리아처럼 주님의 뜻을 따라 우선순위를 정하고, 더 좋은 것을 선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창교 목사
/상남교회


토-단 한번의 만남 그리고 긴 역사
본문 : 행 8:26~40
찬송 : 502장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빌립은 왜 갑자기 자기를 광야로 인도하시는지도 모른 채 광야로 간다. 광야는 길이 험하고 위험이 따르는 곳이다. 광야로 나간 빌립은 그 곳에서 특별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디오피아 사람으로 여왕의 국고(돈)를 관리하는 흑인 내시이다. 빌립이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성경을 읽고 있었지만 뜻을 알 수 없어서 끙끙대고 있었다. 이를 본 빌립은 그의 마차에 올라서 성경의 뜻을 알게 하고, 물이 있는 곳에 이르러 길에서 그에게 세례를 주고 떠나 보낸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너무나도 당연히 '이방인이고, 흑인이며, 한 번 본 적도 없고 그 후에 다시는 본 일도 없는 사람에게 광야의 위험이 있는 곳에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이런 일을 해야 할까?'라고 생각한다.
 
만일 이디오피아 내시가 포악하고 무서운 인물이었다면 빌립은 어찌되었을까? '아무리 전도가 중요해도 너무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오늘과 내일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행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빌립이 한 번 밖에 만난 적이 없는 이디오피아 내시를 통하여 한 나라의 내일을 여시고 계신 것이다.
 
빌립이 그 날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이사야 53장 내용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임을 알게 하고, 믿게 하고, 세례를 받게 함으로 그를 통하여 이디오피아라는 나라의 내일을 여셨다. 단 한 사람 이디오피아 내시가 빌립을 통하여 복음을 받았는데 지금 이디오피아는 전체 인구의 18%가 예수님을 믿는 긴 역사를 이루게 되었다.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이 따로 있거나 복음을 전할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내 생각을 앞세워 복음 전할 때와 장소, 사람을 구별하려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 내 생각을 앞세우는 동안 어떤 사람은 영원히 기회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주님이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갈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을 우리 주변에 준비하고 계신다. 가서 성경을, 예수님을, 교회를 말하면 된다. 오늘 내가 만난 그가 세계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내가 세계를 바꾸는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성령에 힘입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주님의 뜻을 이뤄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상례 목사
/한우리횃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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