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관계의 치유와 회복을 위한 출발점

공감, 관계의 치유와 회복을 위한 출발점

[ 말씀&MOVIE ] 말씀&MOVIE

최성수 목사 sscc1963@hanmail.net
2014년 06월 24일(화) 11:36

 

   
 

그녀(감독: 스파이크 존즈,  드라마, 청소년관람불가, 2014) 

사람이 아닌 기계를 소통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까? 멀지 않은 미래에 기계가 인공지능을 가지게 되면 가능하게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소통 방식에서도 문제는 있을 것인데, 그 문제는 어떤 것일까? 굳이 사람을 놔두고 기계와 소통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스마트 폰이 우리와 어떻게 공생하고 또 인간 사회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조금이라도 깊이 생각하며 그 심각성을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를 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존즈 감독은 관객으로 하여금 주인공 테오도르와 '그녀'와 함께 보내는 다소 긴 밀어의 시간을 지켜보도록 하면서, 영화 말미에 가서야 비로소 대답의 실마리를 보여준다.
 
배경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 생활의 일부가 되는 가까운 미래다. 자판기를 두드리지 않고 음성만으로 컴퓨터와 소통할 수 있다.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 분)는 이런 시대에 이런 소통 방식을 십분 활용하며 삶을 영위해간다. 주로 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의 편지를 감성을 담아 대필해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적인 소통을 도와주면서도 정작 자신의 감정 소통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다. 아내와는 별거중이고, 유일한 여자 친구로 게임 프로그래머가 있지만 그저 겉도는 친구일 뿐이다. 그의 유일한 소통 대상은 목소리만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만다(목소리 역으로 요한슨 스칼렛)이다. 비록 인공지능을 가진 컴퓨터 운영체제에 불과한 존재라도 거의 인격적이라고 할 만큼 누구보다도 테오도르를 잘 이해하고 또 그의 기분과 삶의 리듬을 맞춰줄 수 있다.
 
영화는 상당 부분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소통 장면에 할애한다. 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테오도르가 '그녀'와 감정적인 교류는 물론이고, 심지어 육체 없이도 성적인 쾌락을 공유할 수 있으며, 함께 여행을 가면서도 전혀 심심하거나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실제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기계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말한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영화를 SF 장르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기계와 인간의 소통에 초점을 맞춰 영화를 해석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존즈 감독은 이미 '존 말코비치 되기'(1999)와 '어댑테이션'(2002)에서 기발한 과학적인 상상력을 발휘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세계적인 인공지능 전문가 커즈와일이 쓴 영화 평은 이 영화를 그렇게 독해하는 데에 일조를 했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 가까운 미래의 가능성을 두고 기계와 인간의 소통에 대한 철학적인 해석도 가능하다고 본다. '매트릭스'에 대한 다양한 독해방식을 염두에 두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감독의 의도를 비껴가는 해석이다. 감독은 남녀의 소통을 말하면서, 다만 이야기를 담는 형식으로 IT 기술을 도입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관점을 SF에 두는 것은 무리다. 주객이 전도된 독해다. 영화의 주제는 단연코 사람과 사람의 소통에 있다. 새로운 소통 방식을 통해 상처 입은 소통을 치유하고 회복하려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다. 남녀의 사랑을 말하는 새로운 방식일 뿐이다.
 
테오도르와 '그녀'의 관계를 지켜보면서 한편으로는 둘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정리될 것인지가 궁금했다. 인간과 기계(안드로이드, 사이보그 등)의 관계 문제는 이미 여러 영화의 소재로 다뤄져 왔지만 모두가 기대만큼 그렇게 만족하게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드는 질문이 있었다. 테오도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또 그 사람의 마음을 공감적으로 전해주는 역할을 하면서도 왜 그 자신은 스스로 감정적인 소통을 못하는 것일까? 아니 왜 기계를 소통의 대상으로 삼은 것일까? 다른 사람들에게 해주는 감정적인 소통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감독의 메시지에 접근할 수 있으며, 영화가 단지 인공지능 시대의 소통방식을 상상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서 사만다와의 관계에서 테오도르는 사람과 사람의 소통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의 변화를 인정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녀'의 기술적인 진화를 따르지 못하고 또 이해하지 못한 테오도르는 무엇보다 자신의 존재가 '그녀'와 관계하는 수천 명 가운데 하나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고통스러워한다. 결국 '그녀'와의 관계에서 파경을 앞두고 테오도르는 불현 듯 아내와 자신의 관계를 돌아보게 되고, 아내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의 틀에 맞추려고 했던 과거를 반성하게 된다.
나를 고정시켜 놓고 상대를 볼 때는 언제나 상대를 구속하게 만들 뿐이다. 모든 관계에서 사람은 자신의 틀을 가지고 있는데, 틀을 바꾸든가 아니면 상대를 바꾸어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녀'는 인간의 소통 방식을 문제 삼으면서, 서로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상대를 자신의 틀에만 맞추려고 할 때, 소통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의 관계에서 흔히 일어나는 오해는 하나님을 인간의 틀에 맞추려고 할 때 발생한다. 무한자는 유한자에 담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하나님의 행위를 사람의 생각에 담아두려고 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필요한 일은 늘 새롭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관계를 정상적으로 갖는 것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최성수목사 / 神博ㆍ영화 및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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