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와의 가상적 대화 4

칼 바르트와의 가상적 대화 4

[ 목회·신학 ] 현대신학산책

박만 교수
2014년 03월 17일(월) 16:27

필자 : 지난 시간에 바르멘 선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저 역시 학창 시절 바르멘 선언을 공부하면서 참 감격스러워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바르멘 선언을 보면서 저는 신학의 중요성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실상 평온할 때의 교회는 신학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신학은 어둠 속의 횃불처럼 교회가 나아갈 길을 밝혀주는 것이지요. 철학자 칸트는 헝겊을 뚫을 때는 나무 송곳으로 충분하지만 가죽을 뚫을 때는 쇠 송곳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점에서 선생님이나 니묄러 목사같은 분들이 있었던 독일교회는 히틀러라는 얼룩진 역사 속에서도 자랑할 것이 있는 교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찬가지로 주기철, 손양원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 뿐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한 생명을 바친 이름 없는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 덕분에 오늘의 한국교회 역시 이렇게 서 있을 수 있는 것이고요. 어쨌든 선생님은 그 이후 대학 강단에서 쫓겨나 스위스로 가시게 됩니다.

바르트 : 그렇습니다. 고백교회 운동을 한 것 뿐 아니라 당시 대학 교수들은 수업을 시작할 때 '히틀러 만세'라고 외치도록 돼 있었는데, 저는 이를 거부했고 총통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 서약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교수직에서 쫓겨났고 또한 독일 밖으로 영구 추방 명령을 받았지요. 그 때 스위스 바젤대학이 저를 불렀고 그 때부터 196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곳에서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스위스에 있는 동안 저는 체코와 영국 노르웨이 등의 개신교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나치에 저항할 것을 요청했고 계속해서 고백교회 운동을 지원했습니다. 나치 독일이 패망한 다음에는 몇 차례 독일을 방문하여 여러 교회에서 강연했고 1946년과 1947년에는 본대학에서 전후 세대의 신학도들을 가르쳤습니다. 1948년 헝가리를 방문하여 공산주의 치하에 있는 그곳의 개혁교회 지도자들과 대화하였고, 1948년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의 결성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필자 : 스위스 바젤에 있는 동안 선생님은 말씀하신 활동 외에도 정기적으로 교도소나 병원 등에서 설교를 하시는 등 바쁘게 지내셨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선생님의 주저인 '교회교의학'을 쓰면서 보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르트 :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교의학을 1931년부터 제가 세상을 떠나던 1968년까지 계속 집필했습니다. 전체 약 9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많은 분량이지만 아쉽게도 윤리학과 종말론 부분은 쓰지 못한 채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지요.

필자 : 교회교의학의 집필이 너무 길어지다보니, 하나님도 도대체 이후에 어떤 내용이 나올지 궁금해서 선생님을 불러가시지 않는다는 농담까지 있었습니다(웃음). 어쨌든 선생님은 82세 되던 1968년 12월 10일 이른 아침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 전날 밤 평생의 친구였던 투르나이젠과 월남전을 비롯한 세계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하더군요. "그래.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고통으로 차있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네." 그리고 이 말이 일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온 한 그리스도인의 최후의 증언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고통으로 차 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다." 

박만 교수 / 부산장신대ㆍ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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