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들의 정교 관계

선진국들의 정교 관계

[ 교계 ]

이범성 교수
2014년 02월 05일(수) 16:16

이상은 '일치' 현실은 '분리'

전통적으로 정교일치 통한 신앙국가 건설 꿈꿔
분리 목적은 순수성 확보, 무간섭 주장은 잘못


신을 받들고 제사드리는 것을 정치의 중심으로 삼는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는 지금도 존재한다.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의 부족들 중 추장이 제사장을 겸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제정일치는 아니지만 정교가 상당히 밀착된 형태의 사회도 존재한다. 민족국가가 하나의 신앙을 통치이념으로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경우를 비롯해 근본주의자들이 득세한 이슬람권의 국가들이나 기독교 패권주의 국가가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그러나 현재 더 많은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정교의 관계는 '정교분리'의 형태를 띤다. 어느 특정 종교에 의해서 전통적으로 각인된 민족사회에서 조차도 정치와 종교는 각각의 역할이 있어서 이 두 영역이 혼합되거나 간섭 당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것이 정교분리에 대한 일반적 생각이다.

#정교가 일치된 콘스탄티누스대제 시대

구약시대의 전통은 제정이 일치됐거나 사사시대 이후에는 적어도 정교가 분리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신약시대 예수 운동가들의 전통은 정교가 분리된 형태를 취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리라"는 예수의 대답은 그대로 제자들의 입장이 되었다. 정부의 권세에 복종하라는 바울의 말도 정교유착이 아니라 정교분리를 의미했다. 그러나 기독교가 확산되던 4세기 초에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손자 테오도시우스는 기독교를 국교화 했다. 더 이상 제정일치의 원시형태가 존재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교유착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로마 정부의 안녕과 지속적 발전을 위한 사상적 기재로서 채용된 기독교는 교회의 신념을 받들어 점차 국가의 이념으로 채택한 정부를 위해 기도하며 납세를 장려하고 공개적으로 정부를 보좌하는 정교유착의 동반자적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정교일치에 대항한 소종파 운동

그러나 국가와 밀착한 교회는 교회가 출발하던 때의 이상이었던 하나님 나라의 고유한 가치관을 저버리고, 마치 이 세상에서 완성되는 것처럼 보였던 현실적 기독교 왕국에 몰입하게 됐다. 정교가 일치하면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 결과 교회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는 기독교 왕국으로 대체되기에 이르렀고, 기독교 왕국에서 교권과 속권은 야합과 힘겨루기를 반복했다. 기득권 유지를 위해 국가와 교회는 서로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기독교 왕국으로부터 끊임없이 구분하고 정교분리의 관계를 실현해 내려고 했던 그리스도인들은 교권 내에서는 수도원 운동으로, 교권 밖에서는 종종 이단으로 내몰렸던 소종파 운동의 전통을 이어나갔다. 정교일치의 사회적 환경에서나 가능한 유아세례를 부정하는 재세례파의 주장은 정교유착 반대의 대표적인 한 표현이다.

#종교개혁은 정교분리가 아닌 정교일치의 새로운 모형

기독교왕국의 이상이 실현되던 중세 기독교 황금기가 종교개혁을 맞아 로마 가톨릭교회의 위기를 경험했을지언정 그것이 기독교 왕국의 위기로 경험된 것은 아니었다. 로마의 교권에 대한 민족국가들의 반대는 정교분리가 아니라 정교일치의 새로운 형태를 발전시켰을 뿐이다. 그것은 교황과 황제의 제국적 정교일치를 개신교 주교들과 왕, 혹은 성주들의 정교일치로 전환한 모양에 불과하다. 여전히 아니 더욱 밀접하게 교회는 국가의 보호를 필요로 했고 국가는 교회의 인정을 필요로 하였다. 루터는 독일에서 정부의 권력에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하며 정부와 교회의 선한 역할분담론을 선전했으며, 칼빈은 스위스에서 교회의 적극적인 정부활동을 장려했다. 한편 헨리 8세의 수장령을 통한 영국 국교회의 탄생은 영국 기독교인들에게 로마 교황청 대신에 정부와 더욱 밀착된 정교일치를 가져왔고, 이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것이 청교도 운동이다. 종교개혁은 정교분리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 새로운 형태의 정교유착에 불과하다.

#현대의 정교분리

독일에서 최초로 정교가 분리된 것은 바이마르공화국이 들어선 1918년부터의 일이다. 그동안 신성로마제국의 지리적 중심에서 제국교회(Reichskirche)의 형태로서, 종교개혁 이후에는 국가교회(Staatskirche)로서, 바이마르공화국 이후에는 민족교회(Volkskirche)로서, 그리고 아직은 그 형태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지향되고 있는 지역공동체교회(Gemeindekirche)로서 독일교회는 그 형태가 변모하였다. 정교분리의 '홀로서기'를 처음 경험하게 된 당시 독일교회는 정교유착의 옛 시대를 그리워하여 독일사회주의민족노동당(NSDAP)의 정교유착 제안에 미혹되어서 독일 기독교인(Deutsche Christen) 운동이라는 민족 이데올로기에 빠져들었다. 영국은 헨리 8세 이후에 로마 가톨릭교회로의 회귀와 다시 국왕의 국가교회로의 회귀를 반복 경험하던 중에, 이 미비하고 불완전한 종교개혁에 반발한 초기 의회민주주의자들인 청교도들이 칼빈주의적 기치를 내걸고 영국 정부로부터의 간섭을 피해 새로운 주거지인 북아메리카로 이주하였는데, 정착한 청교도들은 영국 정부와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정교분리를 표방했지만, 실제로 그들의 건국이념에는 신앙 국가를 건설하려는 정교일치의 정신이 여실히 드러난다.

#정교분리와 교회의 정치참여 사이의 관계

1901년 당시 한국교회를 대표한 서구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정교 관계에 대해 정교분리를 뜻하는 '비정치화선언'을 공식 입장으로 발표했다. 그 내용은 일제의 탄압을 하늘의 권위로 인정하고 수용하라는 것이었다. 교회는 정치와 무관하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정치에 대한 일체의 대화나 회합을 금지한다는 명령이었다. 한국교회는 정교분리를 그렇게 이해했다. 당시 교회의 관심은 교세에 있었다. 부흥회를 통해 성장하고 있는 교회가 민족문제라는 찬물 세례를 받게 될 두려움, 그래서 그동안 "씨를 뿌리러 왔는데 이미 추수를 하고 있다"는 선교사들의 즐거운 비명이 그치게 될 것을 걱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그러한 염려와는 달리 한국교회는 민족의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 구현에 대한 노력으로 인해 더 이상 외래종교가 아닌 한국인의 신앙이 됐다. 1901년의 비정치화 선언은 1789년에 개정된 웨스터민스터신조 제23항이 응용된 것인데, 이 신조는 '비정치화'를 교회의 신앙을 정부로부터 간섭받지 않으려는 목적에서 사용한 것이지 세상의 문제를 교회에서 상관하지 않겠다는 세상의 포기각서로 작성한 것이 아니었다. 정부의 행정에 대해 비판을 유보하거나 무관심하는 태도를 정교의 분리라고 여기고, 정부를 비판하는 일을 정교분리의 원칙을 위배하는 것으로 여기는 정교관계 이해는 서구 기독교 국가들의 경험으로서는 낯선 것이다. 기독교 왕국은 하나님 나라를 오해시키고 교회의 비판기능을 마비시켜왔다. 하나님 나라를 알고 있는 교회는 세상에서 '거룩한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진정한 정교분리는 교회가 정부를 비판할 수 있는 정당성이 확보된 곳에서만이 그 온전한 기능을 기대할 수 있다. 

이범성 교수 /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ㆍ현대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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