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이해했으면 "소통한 것이다"

서로 이해했으면 "소통한 것이다"

[ 교계 ]

노치준 목사
2014년 01월 20일(월) 13:20

1월 특집 - 2014년 키워드 ②소통(通)

상대방 이해하는 것 만으로도 소통
커뮤니케이션 매체 홍수 속 '불통 시대'

소통 수단의 과잉과 소통의 부재 현상 : 요즈음 우리가 가장 자주 듣는 말 가운데 하나인 '소통'이 2014년 새해의 키워드로 정해졌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소통은 '의사소통'의 준말이며 영어로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다. 우리는 지금 넘쳐 나는 커뮤니케이션 매체에 둘러 싸여 있다. 전통적인 신문, 잡지, 방송 매체들이 넘쳐나고 있다. 전문 분야의 신문, 방송, 잡지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늘어났다. 여기에 덧부쳐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등 개인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우리 나라에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더욱이 전화기, 카메라, 녹음기, 컴퓨터, 인터넷, TV, 게임기 등의 기능을 고루 갖춘 스마트 폰이 전국민 개개인의 손에 들려져 있다. 언제 어디서나 원하기만 하면 그 누군가와 소통할 수 있는 매체를 다들 가까이 손 안에 가지고 있다. 이처럼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많은데 소통이 안된다고 탄식들 하고 있다. '불통의 시대'라고 분노한다. 그래서 1980년대에 대학가를 휩쓸었던 대자보가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타나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예전에는 소통이 안되는 것이 소통의 도구가 미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소통의 도구는 넘쳐나는데 소통이 안되는 것은 소통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소통의 방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소통의 목적을 정확하게 알자 : 소통의 목적은 나를 상대방에게 이해시키고 내가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소통의 목적을 상대방을 설득하고 상대방에게 나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처럼 소통의 목적을 잘 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소통의 방법도 잘못되고 또한 소통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만다. 그러므로 건강하고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소통의 목적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소통의 목적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나를 상대방에게 이해시키는 일이다.

상대방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할 때 내가 그의 요구를 채워줄 수 있는 경우보다 채워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일을 요청했을 때 그가 나의 요청을 들어 주는 것보다는 들어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소통이 다른 사람이 나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내가 다른 사람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우리 인생길에서 소통할 수 있는 범위는 지극히 좁아지게 된다. 그러나 소통이란 상대방이나 나의 요구를 채워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요구를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우리는 인생길에서 다른 사람의 요구를 채워주지는 못해도 그 요구를 이해할 수는 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취직을 부탁할 때 그 부탁을 채워줄 수 있는 경우는 매우 적다. 그러나 그가 왜 나에게 취직을 부탁하는지, 그의 형편이 어떤지를 이해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통이 안된다고 말하기 전에 내가 생각하는 소통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먼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소통의 목적을 잘못알고 있으면 그 소통은 언제나 불통으로 끝날 수 밖에 없다.

이해하고 이해시키는 소통만으로도 소중하다 : 내가 비록 상대방의 요청을 들어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있는 일이다. 또한 상대방이 나의 요청을 들어주지 못한다 해도 상대방에게 나의 마음과 처지를 이해시킨 것만 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 인생길은 이해관계가 다르고 또한 사람마다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 이웃들이 나와 똑같을 수는 없다. 때로 내가 가는 길이나 나의 삶을 부정하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이런 인생길이기에 소통이 필요하다. 우리가 아무리 소통을 한다 해도 이해관계를 맞추거나 가는 길을 일치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소통을 통해서 서로의 입장과 형편을 이해할 수는 있다. 서로를 이해하면 이해관계가 충돌한다 할지라도 미움, 원망,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줄일 수 있다. 우승을 다투는 두 팀이 아무리 서로 소통한다 할지라도 우승을 양보할 수는 없다. 누군가가 이기고 누군가는 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서로 소통하면 상대방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분노하는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소통이 이해관계의 충돌도 완화시킨다 : 소통이 이루어지면 이해관계의 충돌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 있다. 소통을 통해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면 상대방의 가치와 권리를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상대방은 나의 가치와 권리를 인정하게 된다. 이러한 상호 인정은 이해관계의 충돌을 완화시키고 타협의 길을 모색하도록 한다. 소통의 일차적인 목적은 상호 이해이지만 그 결과는 이해관계로 인한 갈등을 완화시키는 데까지 이를 수 있다. 참된 소통이 이루어지면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식의 제로 섬(zero sum)법칙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을 위한 타협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소통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자신에 대한 겸손을 전제로 한다 : 소통이 이루어지려면 상대방을 존중해야 한다. 상대방도 생존하고 행복하고 존경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상대방이 나보다 옳고 더 지혜로울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소통이 가능하다. 또한 내가 틀릴 수 있으며, 나에게만 권리가 독점적으로 주어졌다는 마음을 버릴 때 소통이 가능하다. 이 세상의 모든 교조주의와 극단주의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교조주의와 극단주의는 소통을 할 수 없다. 종교적 원리주의자나 정치적 극우파나 극좌파 등이 위험한 이유는 상대방의 가치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음으로 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진실과 단순함이 소통의 길이다 : 소통이 되려면 진실해야 한다. 거짓과 과장으로 자신의 위치와 상황을 부풀리면 상대방이 나의 말을 믿어주지 않으며, 믿음을 잃게 되면 소통은 단절된다. 또한 소통을 이루려면 단순해야 한다. 너무 복잡한 말, 너무 많은 말, 본질과 상관 없는 말들을 많이 하게 되면 상대방은 나의 참된 모습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불통은 소통의 매체가 너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많은 매체를 통해서 거짓되고 과장되고 복잡한 주장을 펼칠 때 상대방은 나의 참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며 결국 소통은 불가능해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소통이 있다 :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시지만 우리와 소통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인간과 소통할 수 있는 육신을 입고 오셨다. 요한 사도의 말씀에 따르면 그 분의 말씀을 우리가 들을 수 있었고 그 분의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있었으며 그 분의 몸을 우리의 손으로 만질 수 있었다(요일 1장 1절). 한마디로 말해서 그 분과 우리는 소통할 수 있었다. 그 분은 우리와 소통하기 위하여 진리의 말씀과 쉬운 비유의 말씀을 사용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전하여 주셨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소통을 방해하는 가장 큰 벽, 죄악의 벽을 십자가의 보혈로 무너뜨리셨다. 그리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소통이 가능한 길을 여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라. 그리하면 소통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노치준 목사(광주양림교회)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