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상자 안에 누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겨울 상자 안에 누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 성탄특집 ] 한밤 급식봉사 현장에서 만난 '거리의 천사들'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20년 12월 21일(월) 08:00
서울의 밤 기온이 영하 4.6도까지 떨어진 지난 12월 4일. 밤 10시가 되자 서울시 종로구 이화장길에 위치한 '거리의 천사들(대표:안기성)' 섬김의 집에 자원봉사자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두세 명씩 무리 지어 오는 자원봉사자들은 오자 마자 안기성 목사와 인사하고 언제나처럼 자리에 앉아 노숙인들에게 전달할 손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대부분 SNS로 메시지를 교환하는 요즘 일반인들은 손편지를 받아 볼 일이 많지 않지만 가족과 친구로부터 떨어져 나온 노숙인들은 역설적이게도 자원봉사자들이 정성껏 적은 손편지를 일주일에 다섯 차례나 받는다.

'거리의 천사들' 야간사역은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10시부터 새벽 1시까지 진행된다. 이날 서울시는 코로나19 신규감염자가 위험수위를 넘어서자 다음날인 5일부터는 9시 이후 서울을 '셧다운(shutdown)' 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을 정도로 감염병에 대한 우려가 깊은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8명이나 되는 자원봉사자들이 이날 섬김의 집을 찾았다. 올해로 17년째 '거리의 천사' 야간사역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정희진 집사(동교동교회)는 이날도 고등학생 아들과 중학생 조카를 데리고 왔다. 동교동교회의 담임인 홍수근 목사가 부교역자 시절이었던 17여 년 전 이곳을 따라왔다가 이후 계속해서 봉사하고 있다는 정 집사는 "큰 딸이 7살 때 이곳에 처음 왔는데 이제 사회에 나가 일을 하는 성인이 됐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안기성 목사는 "큰 딸이 첫 월급을 타서 절반은 교회에, 절반은 이곳 거리의 천사들을 위해 헌금했다"고 귀띔한다.

연희교회의 여성 청년 2명과 시온성교회(최윤철 목사 시무) 청년 3명도 코로나19의 재확산과 추위가 겹친 12월의 겨울밤 이곳을 찾았다. 이들은 모두 직장인 혹은 자영업자거나 대학원생들이었다. 이중 김진우 씨(39세)와 박선혜 씨(31)는 오는 12일 결혼식을 앞두고 있는 예비 부부였다. 결혼식 8일을 앞두고도 1년 넘게 봉사하고 있는 이곳을 찾은 것이다.

김진우 씨는 "우리야 한달에 한번 나오는데 봉사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라며 "이러한 사역을 통해 노숙인들과 연대하는 삶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매번 봉사에 임하고 있다"고 생각을 밝혔다.

손편지 쓰기가 끝나면 자원봉사자들은 빵 건빵, 두유와 초코파이, 마스크, 그리고 자신이 정성스럽게 적은 손편지를 넣은 선물꾸러미를 포장한다. 코로나19 이전에는 매일 저녁 밥과 라면, 김치를 나눴지만 이제는 비닐 속에 식사 대용품들을 넣고 잠든 노숙인들 옆에 천사처럼 조용히 다가가 전달한다.

안 목사와 자원봉사자들은 밤 11시가 되자 서울역과 숭례문 인근에서 노숙하고 있는 이들을 찾아 출발했다. 68세의 안기성 목사는 연골 수술을 두번이나 받아 걸음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민첩하다. 아내 유태영 실장은 여성 노숙인들을 찾아 이들의 필요를 살핀다. 여성노숙인들은 남편이나 아버지로부터 폭력과 학대의 경험해 노숙을 선택한 이들이 많기 때문에 남성들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해 여성 사역자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다.

안 목사의 안내로 지하통로에 들어서자 수십 명의 노숙인들이 추위를 피하기 위해 골판지로 만든 잠자리에서 쪽잠을 자고 있었다. 안 목사의 눈짓에 거리의 천사들이 출동! 이들은 천사가 임하듯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고이 잠들어 있는 노숙인들에게 자신들이 준비해간 먹거리 꾸러미를 살포시 내려놓고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노숙인의 건강과 재활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

이들의 손편지를 읽고 난 노숙인들이 재활의 의지가 생겼을 때는 손편지에 적힌 거리의 천사들 전화번호를 건다. 이들에게서 연락이 오면 데이케어 상담원에게 연결해 주거 자립지원을 안내한다. 올해만 70여 명의 노숙인들이 거리의 천사들을 통해 주거자립지원을 받았다.

이들은 발걸음을 옮겨 순화어린이공원으로 향했다. 추운 영하의 날씨 속에서도 이들은 야외에서 골판지로 누울 공간을 만들고 비닐을 씌어 추위를 피하고 있었다.

안 목사는 아직 잠들지 않은 노숙인에게 말을 건넨다.

"이번달 생일이시잖아. 그러면 만 65세가 넘어서 노인연금, 주택 지원을 다 받을 수 있으니 빨리 상담 좀 받아. 계속 이렇게 지내지 말고. 꼭 연락해요. 형님 말 잘 들어야지."

자신의 생일까지 꿰고 있는 안 목사의 잔소리에 그 노숙인은 "목사님! 할렐루야, 아멘!!"하며 눙친다.

안 목사와 자원봉사자들은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고 또 다른 노숙인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새벽 1시가 다 되어서야 서울역과 공원 인근의 노숙인들에게 가지고 간 먹거리 전달이 끝난다. 그제서야 자원봉사자들은 각자의 집으로 향한다. 안기성 목사와 부인 유태영 봉사실장은 밝은 얼굴로 자원봉사자들에게 수고했다며 인사를 건네고 배웅한다. 자원봉사자들을 보낸 부부는 이제 또 다른 사역을 시작한다. 서울의 후미진 구석 곳곳에서 노숙인 2~3명이 모여 잠을 청하는 곳곳을 일일이 찾아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없는지 확인하고 먹거리를 나눈 후 새벽 3~4시가 되서야 그날의 야간 사역을 마친다고 한다. 안 목사는 자신의 노숙인이 누운 곳을 예수님이 태어나신 마굿간에 비유한다.

"노숙인 사역은 꼭 예수님이 태어나신 마굿간을 방문하는 것과 같아요. 춥고 더럽고 냄새 나는 그곳에 예수님이 오셨잖아요. 거리의 천사들을 설립하고 24년째 사역중인데 놀라운 것은 봉사자들이 끊임없이 천사처럼 방문해주신다는 거예요. 저희는 오시라고 전화 한통화 드리지 않거든요. 이런 천사들이 있기에 아직 살만한 세상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지금 이 시대에도 천사가 일하고 있다고 믿어요. 매일 제 눈앞에서 보거든요. 오늘처럼!"


표현모 기자



#'거리의 천사들'은?

안기성 목사가 설립한 '거리의 천사들'은 1997년 11월 IMF 경제위기가 닥친 이후 갑자기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린 실직 노숙인들을 위해 그 해 12월 1일부터 사역을 시작했다. '거리의 천사들'이란 실직노숙인과 자원봉사자를 함께 일컫는 말로, 누구나 노숙인이 될 수 있으며 서로 도와야 할 가족이며 이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대부분의 노숙인들은 여러 질병과 정신질환을 앓고 있어 체계적인 의료지원과 보살핌이 필요한 상태이고, 대부분 가정이 해체되어 개인적 지지망이나 사회적 관계망이 모두 깨진 상태다.

'거리의 천사들'은 이러한 노숙인들을 직접 찾아가서 자살과 동사를 예방하고 희망을 나누며 다시 일으켜 세우는 사역을 한다. '거리의 천사들'은 노숙인들이 거리에서 나와 러브피플하우스와 쪽방, 고시원에서 당분간 생활하며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임대주택에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은 무료병원이나 알코올치료시설로 안내한다.

특히 월요일에서 금요일, 매일 밤 지하도로 찾아내려가 희망쪽지와 먹거리와 생필품을 나누는 야간사역은 '거리의 천사들'의 대표 사역 중 하나이다.


표현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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