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에 대한 인간중심 관점 바꿔야

동물에 대한 인간중심 관점 바꿔야

[ 특집 ] 동물을 대하는 신앙인의 자세(2월특집) 2. 동물에 대한 인간중심의 관점을 바꿔야 한다

장윤재 교수
2019년 02월 11일(월) 15:19
최근 동물에 대한 학대와 폭력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동물에 대한 인간중심의 관점에 대한 반성이 일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의 수는 1200만 명이나 된다. 하지만 한 해 평균 약 10만 마리의 반려견들이 버려진다. 대개 늙고 병든 강아지들이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고아 수출 1위일 뿐만 아니라 유기견 수출도 1위다.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한 국가의 위대함과 도덕적 진보는 그 나라의 동물이 받는 대우로 가늠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도덕적으로 얼마나 진보했는가? 고양이가 사람을 보고 도망가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는 보도가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

동물에 대한 학대와 폭력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해마다 500억 마리의 동물이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물고기를 빼면 매년 250억 마리의 동물이 인간의 음식이 되기 위해 죽고, 매년 4천 만 마리의 동물이 모피가 되기 위해 죽는다. 먹고 입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수많은 상품들은 대부분 동물을 이용한 독성 실험을 거친 것들이다. 세계적인 동물윤리학자 피터 싱어는 "동물에 관한한 모든 인간은 나치다"라고 말했다.

'학대(虐待, cruelty)'란 '지각이 있는 생명체에 의도적으로 가한 고통'이다. 모든 학대는 죄다. 게다가 그것은 신성모독이다. 모든 생명을 사랑으로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고 복을 내리신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에 대한 침해이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나름의 본유적 가치를 가진다. 따라서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권리는 하나님의 가치 부여하심에 근거한 권리, 곧 '신적 권리(theos-rights)'를 가진다. 동물권(animal rights)은 인간이 준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신성한 권리다. 동물에 대한 학대는 바로 이 '신적 권리'에 대한 침해다.

동물학대의 뿌리는 서구의 인간중심적이고 이분법적인 세계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가진 이성적 사고의 능력 때문에 인간이 동물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가르쳤다. 아우구스티누스도, 그리고 아퀴나스도 인간의 선(善)을 위해서 동물을 사용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주장했고, 심지어 이성을 가진 인간이 이성을 갖지 못한 동물에게 자애로울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근대 휴머니즘 역시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놓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선언한 데카르트는 동물이 한낱 '사고하지 않는 기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고 가르친 칸트 역시 동물은 '자의식'을 갖지 못하며 따라서 인간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중심주의적이고 이분법적인 사상은 성서의 가르침과 무관하다. 성서에서 동물이 가진 신학적 지위는 높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선포는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들에게도 주어졌다.(창세기 1:20~23) 그리고 동물은 인간을 위한 먹거리로 창조되지 않았다. 인간에게 '다스리고 정복하라'(창세기 1:28)는 명령을 내리신 하나님은 바로 이어서 채식명령을 내리신다.(창세기 1:29~30) 처음으로 육식이 허용된 것은 노아의 홍수 이후이지만 그것도 '조건부' 허용이고 '임시' 허용이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고기를 먹을 때에, 피가 있는 채로 먹지 말아라. 피에는 생명이 있다"(창세기 9:4)로 말씀하신다. '피채 먹지 말라'는 것은 동물의 생명을 학대하지 말고 먹으라는 조건절이다. 더구나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을 것"(이사야 65:17)이다. 육식을 하던 맹수가 최초의 창조의 질서대로(창세기 1:30) 여물(풀)을 먹는 채식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동물은 먹거리가 아니라 아담의 '에제르'(히브리어), 즉 '돕는 배필'로 창조되었다.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신 하나님은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셨다.(창세기 2:18~19) 더욱이 노아의 홍수 이후 동물은 더 이상 인간의 지배권(dominion) 아래 있지 않다. 하나님은 무지개 앞에서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면서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겠다(창세기 8:21)고 말씀하신다. 무지개 언약은 다시는 물로 '사람을'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다시는 '사람 때문에' 동물을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새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노아) 사이의 2자 계약이 아니라 하나님-인간-동물(자연, 땅) 사이의 3자 계약이었다. 창세기 9장을 보라. 하나님은 무려 6번이나 이 새 계약을 누구와 맺으시는지 반복해서 강조하신다. 이제 동물은 더 이상 인간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서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 옆에 동등하게 하나님 앞에서 신과 계약을 맺는 주체다. 합법적이고 독립적인 인격체다. 신학적으로 노아의 홍수 이후 인간은 더 이상 동물에 대한 지배권이 없는 것이다.

이외에도 성서에는 동물이 가진 영에 대한 언급도 있고(전도서 3:18~21), 인간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을 동물이 영안을 가지고 보기도 하며(민수기 22장 발람의 이야기), 동물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쳐주기도 하고(욥기 12:7~9), 나아가 인간의 바른 삶을 위한 규범을 제공하기도 하며(잠언 6:6). 동물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안에 있음을 강력히 증언한다.(로마서 8:18~22)

결자해지(結者解之)라 했다. 기독교 스스로가 만든 인간중심주의 신학에서 환골탈태해야 한다.

스위스 연방헌법은 동식물을 대상으로 한 유전공학적 규정을 공포하면서 '피조물의 존엄성'을 명문화했다. 동물을 더 이상 물권법으로 다루지 않고 대신 인간이 그의 복지를 책임져야 할 '동표 피조물'이라 선언했다. 교회가 성서의 말씀을 올바로 선포했을 때 세상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징표다.

지금 우리에게는 생명에 대한 깊은 영적 감수성이 필요하다. 일찍이 앨버트 슈바이처는 '경외심을 가지고 생명에 대해 경탄할 수 있는 능력'을 말했다.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 그 생명에 대해 '경탄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을 오늘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회복할 수 있을까? "인간들이여, 당신들이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뽐내지 마십시오. 동물들은 죄를 짓지 않지만, 인간들은 자신의 위대함을 가지고 땅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죄와 벌'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이다.



장윤재 교수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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