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부터 고치겠습니다'

'나 부터 고치겠습니다'

[ 기고 ]

박상기 목사
2017년 09월 05일(화) 14:10

얼마 전 동대문 패션가에서 꽤 이름난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조카와 만나 식사를 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가장 힘든 게 무엇인지를 물었더니 "불량이 나는 것"이라고 했다.

디자인한 대로 완벽한 제품이 나오지 않았거나 제품에서 흠이 발견되었을 때 이를 바로 잡는 과정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금전적인 손해로 인해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실감하고 있단다. 그런데 사실 불량의 원인이 되는 '흠'이라는 것이 일반인의 눈에는 잘 띄지 않을 정도로 극히 미미한 것이 대부분이어서 자신이 입고 다니는 데도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라는 것에 더욱 속이 상한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조카와의 만남 이후 한동안 '흠'이라는 말이 마음에 가라앉아 좀처럼 떠나질 않았다. 

생각해보면 세상에 흠결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민감하게 신경 쓰지 않고 살기 때문에 발견하지 못하고, 전문적인 식견이 부족하여 그냥 지나칠 뿐이지 어쩌면 흠결 투성이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라고 예외는 아니지 싶다. 겉모양을 내고 고상한 표정관리로 가려져서 그렇지 조금만 다가서서 살펴보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세상에 무결점 인생은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남을 판단하는 일은 매우 신중하고 조심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믿는다는 것만으로, 세상으로 하여금 거의 완전무결한 도덕적 책임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준에 미달 되었다 싶으면 인정사정없이 짓밟고 뭇매질로 매장시킨다. 참 기막힌 일이다. 뭐 묻은 개 뭐 묻은 개 나무란다고 적반하장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그리스도인에 대한 그 같은 기대는 그만큼 높은 도덕률과 자신들과는 다른 차원의 삶을 스스로 인정하는 격이라 싶어 일면 수긍이 가는 면도 없진 않다. 나아가 어그러진 세상을 바로 잡고 구원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그리스도인에게는 자극이 되고 자신을 살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인 면이 없지는 않다고 본다. 

최근 군대의 한 대장의 갑질이 매스컴의 주요기사에 오른 일이 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알려졌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부정적인 뉴스가 한 번 터지면 교회는 적지 않은 상처를 입고 교인들은 그만큼 위축이 되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또한, 교회와 교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전도에 적지 않은 장애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나 사회 지도층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부정적인 뉴스메이커가 되는 날에는 진의 여부를 떠나 교회의 생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조차도 저마다 한 마디씩 비판적인 소리를 내뱉는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더욱이 사회적 지위나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만큼 더 높은 차원의 책임적인 삶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산다는 것은 공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속해있는 교회와 섬기고 있는 하나님, 그리고 자신을 통해 구원받아야 할 불신자들 앞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이 철저한 자기 관리와 책임 있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셨을 것이다. 즉 세상에서 기준으로 살아가라는 명령이다. 기준이 틀어지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 무거운 마음으로 글을 쓰는 내 책상 위엔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캠페인 일환으로 총회에서 보내온 구호인 '나부터 고치겠습니다' 차량 스티커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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