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리아, 사랑의 사도로 전남의 꽃이 되다

도마리아, 사랑의 사도로 전남의 꽃이 되다

[ 선교여성과 교회 ] 전남 지역 여전도회 38

한국기독공보
2023년 10월 19일(목) 12:10
여전도회전국연합회 제3~4대 회장을 역임한 도마리아.
"우리는 아름다운 시골 풍경을 지나 경이로운 풍경의 산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부터 차에서 내려 교회까지 걸어갔습니다. 그 길엔 사찰이 아름다운 배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멋스러운 복숭아나무, 아몬드나무, 자두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진달래꽃, 붓꽃, 꽃들의 왕이라 할 수 있는 모란꽃이 풍성히 피어 있었습니다. 평양에서 새로 온 전도부인은 '여기는 너무 아름다워 마치 에덴동산 같다'고 말했습니다. 깨끗한 계곡물이 세 줄기에서 합류해 이곳을 지나 흐르고 있습니다."

도마리아 선교사의 일기에 나오는 글이다. 조용히 그 분의 글을 읽다 보면 자연 삼매경에 빠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만큼 도마리아에게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있다.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설득력이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면 자신을 드러내어 응석이라도 부리고 싶을 만큼 다정다감한 모습에서 그분의 고운 심성을 읽을 수 있다.

도마리아는 그런 모습으로 지난 38년의 세월을 광주에서 살았다. 우리와 속살을 비비며 살다 간 세월도 중요하지만 아침저녁이면 해지는 동네 어귀에서 언제라도 맞닥뜨릴 것만 같은 예감이 드는 것은 그만의 풍성함이요, 이끌림이다. 사람에게 마음을 내어주고 함께 살아가는 법, 이것이 선교의 모습이요 본질이다. 예수께서 살다 간 2000년 전의 모습이 그러했다.

다음은 도마리아와 더불어 근 40년을 광주에서 사역한 타마자 부인의 말이다.

"내가 40년 동안이나 도마리아와 함께 그리스도를 위해 동역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특권이기도 하다. 그녀는 전도자들이 대형 부흥집회에서 그러는 것처럼 군중을 한꺼번에 싸잡아 회심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회심시켜왔다. 이 때문에, 내가 알기로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생명록의 이름이 불릴 때(하나님의 나팔소리 천지진동할 때)' 수많은 조선 성도들이 주님을 위한 그녀의 끈덕진 중인 된 삶을 칭송하며 그녀를 반가이 맞이할 것이다. 그녀는 회중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불러서 그들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까지 그들의 새로운 믿음을 가르쳐 왔다."

도마리아 선교사는 1912년 9월에 광주로 부임했다. 그보다 6개월 전인 3월 19일에 동생 도대선(Samuel Dodson) 목사가 서서평 선교사와 함께 부산에 도착했다. 오누이 간의 아름다 운 동행은 도대선이 한국을 떠나던 1926까지 광주와 화순, 나주와 고창에서 이어졌다. 그리고 미국에서 목회를 새롭게 시작한 도 목사는 누이의 한국 사역에 있어 가장 든든한 후원자 였고 누이는 동생이 개척하고 떠난 전라남도 여러 교회를 돌아보며 도목사의 희생과 헌신에 빛을 더했다.

도마리아는 여성 선교사라는 한계와 광주 선교부가 본인에게 맡겨준 임무 밖으로 드러난 일을 하지 않았다.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록에 올라온 기록에서 본인이 1930~1931년, 2년에 걸쳐 여전도회 연합회 전국회장을 맡았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본인이 한국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1952년, 텍사스 주에서 은퇴한 이후 조선에서의 사역을 모아 발간한 '조선에서의 반평생 (Half a life time in Korea)'에도 시골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이로 인해 즐거웠던 이야기만을 담백하게 기록할 뿐이다. 진솔하고 겸손한 그의 면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에서 보낸 반평생 동안 그가 시골 교회를 다니며 전도하고 복음으로 변화하는 사람들의 영적 성장을 지켜보는 일이 그에게는 최선의, 최상의 기쁨이요 상급이 됐다. 그는 위대한 설교가도 아니고 웅변가도 아니었다. 그저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처럼 언제나 흘러 있어야 할 곳을 적시는 모든 이들의 영적 기간을 시원케 해주는 충성된 종의 직분을 다한 분이다. 그는 1938-1941년에 걸쳐 이일학교의 교장을 지냈다. 그리고 수피아와 이일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며 한 사람 한 삶에 대한 그의 관심과 정성을 쏟아냈다.

그가 은퇴한 이후 텍사스까지 그를 찾아온 조아라의 방문기에는 그가 얼마나 검소한 삶을 사는지, 그리고 한국과 광주를 사랑하는 그 마음을 여실히 읽을 수 있다.

"1961년 나는 국무성 초청을 받아 김포를 떠나 난생 처음으로 외국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호놀룰루와 워싱턴, 뉴욕을 거쳐 텍사스의 칼버스톤이라는 작은 해안도시를 찾았다. 그곳에는 한국 선교사의 부인이며 내 영어회화 선생이었던 미 세스 낙스(노라복-Knox)가 살고 계셨다. 목사님은 돌아가시고 부자인 자기 여동생과 여유 있는 노후를 보내고 있는데 그 때까지도 교회에서 성경반을 인도하고 계셨다.

그 선생님으로부터 3일간 친정어머니와 같은 따뜻한 사랑을 받은 후 휴스턴에 살고 계신 내 수피아 여학교 시절 성경 선생님 도마리아 씨를 뵙기 위해 길을 떠났다. 태평양 전쟁 직전 강제 추방된 세 분의 여선교사 가운데 한 분이셨다. 재회의 기쁨이 서린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호텔로 함께 간 통역을 다른 방에 들게 하고 나는 선생님과 고요히 기 도드린다. 늙으신 선생님께서는 웃음 띤 얼굴로 낡은 핸드백을 열더니 닳아서 변색된 수첩을 꺼내시는 것이다. 내용은 인명록이었다.

서투른 글씨였지만 거기에서 내 이름을 찾을 수 있었고 내 시어머니 성함도 적혀 있었다. 날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다고 하셨다. 나는 선생님을 위해 기도한 적이 없기에 말문이 막혔다. 그분은 독신으로 늙은 언니, 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하셨는데 다음 날 밤은 선생님 댁에 묵기로 하였다. 그 밤에 나는 선생님에게 내 형편을 다 말씀드렸다. 나의 괴로움을 본인의 것으로 받아들여 죄송할 뿐이었다.

다음날 선생님 댁에 가게 되었는데 내가 미국에서 본 가장 작 은 집이었다. 작은 침실, 식탁, 그러나 하나님 모시는 소박한 삶과 따뜻한 사랑이 넘쳐 있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호텔로 돌아왔는데 나는 다시 선생님의 과분한 사랑을 맛봤다. 떠나오려는데 나를 찾아오신 선생님은 선생님의 100불. 그 동생의 50불, 언니 20불을 합한 것을 나에게 주시는 것이었다. 나는 또 다시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흐른다. 그 후 3-4년 지나 선생님은 돌아가셨으나 내 마음에 새겨진 선생님의 사랑을 나도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 싶다."

당시 광주YWCA회관 건립을 위해 모금 차 미국을 방문했던 조아라 회장의 자전적 기록이다. 그 댁을 방문했던 조아라 회장이나 은퇴 후의 삶을 살던 도마리아. 그리고 이 글에 나오는 노라복 부인은 모두 전남 여전도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삶을 주신 분들이었다. 모두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분들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이런 분들의 고귀한 헌신이 있었기에 우리가 그리고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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