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임 후에도 계속 사역한 김순호 선교사

사임 후에도 계속 사역한 김순호 선교사

[ 선교여성과 교회 ] 전남 지역 여전도회 37

한국기독공보
2023년 10월 05일(목) 15:47
전주에서 남장로교 최고 고참 선교사가 된 매티 테이트(최마태)와 함께한 김순호, 1937년도이니 매티는 선교현장에서 45년, 김순호는 6년차 선교사 때이다. / 여전도회 하나님의 나팔수 p.241
김순호 선교사는 정신여학교와 일본 교리츠여자신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정신 함북의 보신학교에서 교원사역을 했고, 재령의 동부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했다.

총회 여전도회 전국총회가 설립되며 중국선교를 결의하고 1931년 9월 김순호를 산둥지역의 선교사로 파송했다. 1931년 그를 중국에 파송할 당시 도마리아 선교사가 전국 여전도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선교사였다. 중국 여성을 상대로 사역해 부녀 신앙운동에 큰 공헌을 했다. 전국 여전도회는 그를 위해 봉급과 어학학습비 600원, 교통비 30원을 주었다. 김 선교사는 북경에서 중국어를 체계적으로 배워 발음도 정확하고 영성이 깊어 중국인 부녀자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방지일, 이대영, 박상순 목사와 동역하면서 화북 지역의 여전도회를 조직하고 지도했다. 방지일 선교사는 "그는 두 지역의 여성을 위해 사역하도록 파송됐으며 그의 선교지 부임은 선교 사역의 활력을 더해 주었다"고 말했다.

중국에서는 처녀를 구량이라고 부르는 탓에 사람들은 순호 선교사를 '김구량'이라고 불렀다. 파송된 선교사들과 협력해 여성을 중심으로 말씀을 가르치고, 상담하는 등의 여성사역을 시작했다. 여성들은 복음을 듣고 신앙이 성장했으며 교회 활동 영역도 조금씩 넓어졌다.

김순호 선교사는 현지 조선선교회를 통해 현지에서의 안전을 위한 보호 및 관리를 받았다. 또 조선선교회 임원으로 참여해 남성 선교사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1934년과 1935년 산둥 조선선교사회에서 서기의 직무를 맡아 선교사역과 관련한 의사결정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다. 이뿐 아니라 중국 노회인 라이양 노회에서 회계로 선임되기도 했다.

만 5년간 산둥에서 어학 학습과 선교활동을 하던 김순호 선교사는 1936년 8월 안식년으로 귀국한다. 총회에서는 1년의 안식년 동안 6개월은 안식하고 6개월은 교회를 순회하면서 지모(즉묵)에 성경학교를 건축할 건축비를 모금토록 하였다. 이 기간 동안 김 선교사는 전남부인조력회와 전북조력회의 초청으로 광주와 전주를 방문해 집회를 가졌다. 전남부인조력회는 여전도회 총회와 협력해 성경학교 건축비를 보탰고 그의 선교비도 보냈다.

그러나 안식년 1년이 지난 후에도 김 선교사는 선교지로 돌아가지 못했다. 1937년 전면적으로 중일전쟁이 전개되면서 산둥성 선교지가 일본의 점령지가 되어 위험한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칭다오(청도)시에 거주하면서 지모를 왕래하며 이전처럼 성경공부 모임을 개최해 중국 여성들을 지도했다. 칭다오시 태평촌교회와 중가와교회 설립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던 중 여전도연합대회는 시국관계를 이유로 김 선교사를 당분간 소환하기로 결정한다. 1939년 9월 귀국함으로 김순호 선교사의 산둥성 선교는 막을 내린다.

당시 일제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은 대소련 전략기지, 철강, 석탄, 농산 자원 공급지, 불황에 허덕이던 일본 농촌 과잉인구의 배출구로서, 수도인 신경(현 장춘)특별시 외에 19개의 성을 두었으며 4312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봉천노회의 헌의에 의해 만주에 선교하기로 결의하고, 1937년 최혁주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해 만주선교를 시작한 상황이었다.

김순호 선교사는 1942년 만주로 파송돼 신경에서 남쪽으로 120리 떨어진 지린성 슈양양 현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최혁주 목사와 동역했다. 이미 산둥에서 여성들을 상대로 선교한 경험이 있고 유창하게 중국어를 하는 김 선교사를 통해 쌍양현의 선교는 더욱 적극적으로 진행됐다.

김 선교사는 산둥에서처럼 만주국에서도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했다. 슈양양현교회, 슈앙허진교회 등 각 교회에서 1개월 과정의 부녀 도리반을 설립해 만주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글자를 모르는 여성들에겐 주음자모를 가르쳐 하나님의 말씀을 읽도록 도와줬다. 이러한 사역은 만주 지역사회, 특히 부녀자들 사이에서 큰 호평을 받았으며, 김순호 선교사는 어디를 가든지 천사 같은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김 선교사와 최혁주 목사는 부근 농촌을 순회하며 '장막전도'를 했다. 찾아간 마을에 장막을 치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나팔을 불고 찬송을 불러 사람들을 소집해 복음을 선포하고 전도지를 나눠주는 방식의 전도였다. 당시 만주선교 기록을 보면 이러한 사역에 대해 김 선교사는 매우 만족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순호 씨도 산둥선교보다는 물론 힘은 드나 재미는 무한하다고 하며, 이제야 선교의 취미를 본다고 한다. 산둥은 타인이 건설하여 놓은 것을 심방이나 하고 도리반이나 할 것뿐이었으나 만주선교는 그야말로 제일선 개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김창덕, '만주광야 부르짖는 소리')

선교사들은 가는 곳마다 열심히 전도하고 신도들 스스로 예배당을 세우는 가운데 교회들은 크게 부흥했다. 김순호 선교사는 이곳에서도 부녀자를 위한 도리반을 만들었고 많은 여성들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왔다.

김순호 선교사와 최혁주 목사는 만주인 선교사업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회만 있으면 재만 각 노회를 찾아가 사역을 보고했다. 그 결과 남만노회에서는 어떤 형제가 전도인 1인을 돕기로 했고, 김순호 선교사를 통해 동만노회에서도 전도인 1인과 자금을 지원하는 후원자가 나타났다. 또한 신경 등지의 여성계에서 김순호 선교사를 통해 선교후원을 감당하기도 했다.

김순호 선교사는 1940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제29회 총회에 참석해 슈양양현의 전도 상황을 보고했다. 그러나 194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37년부터 시작된 만주선교를 1942년 2월에 종료하기로 하고 이 사실을 만주기독교총회에 통지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김순호 선교사는 만주국 선교사직을 사면하게 되는데, 1942년 9월 22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제21회 여전도연합대회에서 사면이 접수돼 허락하기로 결의했다.

만주 선교사직을 사임한 후에도 김순호 선교사는 1년간 사역을 계속했다. 예산 1200원 중 1000원은 김순호 선교사가 만주에서 활동하면서 저축한 돈으로, 200원은 여전도연합대회가 부담하기로 했다. 즉 선교사를 사임한 이후 1년간 더 사역하면서 필요한 비용은 대부분 김 선교사 자신이 감당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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