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 제주로 파송된 선교사

광주에서 제주로 파송된 선교사

[ 선교여성과 교회 ] 전남 지역 여전도회 36

한국기독공보
2023년 09월 28일(목) 13:29
현재까지 파악된 서평 선교사의 제주 방문은 모두 일곱 차례이다. 1917년 이기풍 목사와 함께한 제주 성내교회 집회가 시작이었다. 성평이 삶을 마감하기 전 1933년의 모슬포 집회까지 조선에서 가장 천대받던 땅 제주와 제주 사람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기울였다.

서평은 제주 본섬뿐 아니라 추자도에 이르기까지 직접 조랑말을 타고 다녔다. 교회를 방문해 사람들과 살을 비비며 가슴을 열고 이들의 삶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사랑을 나누었다. 아마 어머니로부터 외면당하고 사랑받지 못한 서러움이 제주 사람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제주 해녀들의 삶에 대한 강인한 정신력이 그의 성격과 비슷하여 못내 기뻤을 것이다. 제주는 그런 점에서 서서평의 또 다른 얼굴이요 본질이다.

그러하기에 제주를 방문하는 선교사들은 서평 선교사에 대해 찬탄을 금치 못했다. 수많은 선교사들이 제주를 방문했건만 어디까지나 그들은 이방인이요 그들 가슴에 사랑으로 머물지 못했다. 모슬포에서 양녀로 데려온 순이라는 여자 아이와 제주 여전도회 역사의 큰 획을 그었던 강계생(강형신), 모슬포 처녀 강인숙이 강태민(후에 목사가 된 후 강태국으로 개명)과 연애하며 결혼까지 이르게 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의 배경에는 서서평이라는 든든한 우군이 있었다.

무엇보다 원요혁 장로가 제주에 파송됐다. 그를 위해 광주 봉서닐교회 문둥이들이 매일 양식값을 저축해 매달 25원을 보냈다. 제주 전도를 위해 전도인을 지원한 것이다. 원요혁 장로는 모슬포교회를 중심으로 제주노회의 정착을 도왔고 산남지방의 중심역할을 했던 모슬포교회에서 장로 장립까지 받았다.

광주부인조력회가 제주에 파송한 김경신 전도사는 초기에 추자도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부인조력회의 제주 사역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는 아직까지 파악된 것이 없다. 다만 김필례의 보고 가운데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전해질 뿐이다.

"1921년 우리는 일 년 내내 광주에서 사역하는 전도부인을 두는 이외의 한 명의 선교사를 제주도로 파송하는 또 다른 행복한 날을 맞았다. 우리는 전도부인이 보낸 놀랄만한 사역보고서를 들었을 때, 또한 제주 선교사가 보낸 가장 흥미로운 편지의 내용을 들었을 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그 열성적인 그리스도인 여성들이 회계에게 올라가서 선교 사역에 사용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책상에 보석을 놓는 것을 볼 때가 가장 감동적이었다."

복음을 위해 보내진 자나 보내 이들 모두가 감사와 찬양으로 제주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으로 인해 감동을 맛본 기쁨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부인조력회 모임에서 드리는 헌금의 중요성과 이를 인식하는 회원들의 자세가 보고서 속에 나와 있다. 보석 같은 헌금이야말로 전남 여전도회의 값진 면류관임에 분명하다.

"1925년 8월에 쉐핑 양은 조력자와 함께 제주도에 가서 부흥회를 여는 동시에 여러 조력회들을 창설했다. 연합회가 1934년 5월 광주에서 모였을 때, 제주노회의 총대는 제주도의 노회가 230명의 회원을 가진 15개의 조력회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보고하였다. 27년 전 조선 초기, 장로교는 제주를 선교지로 여겼다."

이러한 제주 사역의 값진 보고는 이후 이일학교 출신 강계생을 교통이 불편한 낙도 제주에 보내 예수의 사랑을 그대로 실천한 결과로 이어졌다. 특히 강계생은 1931년 이일학교 보통과를 졸업한 후 성경과를 공부했다. 제주로 내려가 1933년에 제주 전체를 망라한 연합회를 구성했다.

강계생은 1985년에 운명할 때까지 가장 오랫동안 이어진 조력회의 제주 사역으로 제주 여전도회의 역사적 증인으로 기록됐다. 그는 1903년 제주 표선면 성읍리에서 태어나 1985년 83세의 나이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가 이 땅에서 이룬 수고는 하늘의 면류관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는 가난했던 유년시절의 악몽 같은 삶과 믿지 않는 부모들 속에서 평생을 가정구원을 놓고 씨름했다. 흙바닥에 보리 짚을 깔고 드리던 조악한 형편의 예배당이었건만 하나님 앞에 어려운 형편이 어찌 강계생뿐이던가? 그는 이일학교에서 그를 거두어 가르치던 서서평과 구애라(Anna McQueen), 도마리아 같은 선교사들이 어려운 환경 가운데에서 그를 한없이 격려해주었던 사랑을 기억했다.

그리고 서서평 선교사의 영전에 목 놓아 울면서 삶이 다하는 날까지 그리스도의 진리를 가르쳐 지키고 행하게 하리라던 약속을 못내 배반할 수 없었다. 뭍에서 김필례가 서서평이 못다 한 여전도회의 꿈을 이루기 위해 수고했다면 제주에서는 강계생이 그 아름다운 꿈을 이었다. 그것도 선생이 돌아가신 후 50년을 더 장수하며 땀 흘려 여전도회의 과업을 이룬 셈이다.

강계생은 해방 후 이름을 강현신으로 고쳐 불렀다. 강형신의 이름 석 자가 제주 기독교 역사뿐 아니라 서서평의 이름이 불리는 곳곳마다 더불어 기념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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