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사회가 협력해 상생 위한 변화 시도할 때

교회와 사회가 협력해 상생 위한 변화 시도할 때

[ 신학 ] 사회생태윤리로 풀어가는 교회와 사회 이야기(8)

박용범 교수
2023년 08월 23일(수) 08:20
세상에서 인간만큼이나 거주 공간에 관심이 많은 존재는 없다. 농경사회 이후 특정한 장소에 정착하는 생활 패턴에 적응하면서 집은 삶의 터전으로 안정과 행복을 도모하는 중심이 되었다. 유목 생활에서 벗어나면서 인간은 지구 전체를 모든 생명과 더불어 거주하는 곳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점차 멀어졌고, 독립된 거주 공간으로서의 집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그런데 "뉴욕 매거진"의 칼럼리스트인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David Wallace-Wells)는 급격한 기후재난과 생태계 붕괴로 인해 지구가 거주 불능의 행성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지구가 모든 생명체의 공동의 거주 공간이 아닌, 소수의 인간과 일부 지역 주민의 탐욕과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소모품과 대상이 되고 있는 암울한 현실이 묵시적인 종말의 메시지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과학자들은 지구의 지층을 연구하면서 신생대의 마지막 시기로 여기는 홀로세(Holocene)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로 대체되었다고 인정할 수 있을 만큼의 큰 변화가 발생한 현재를 뜻하는 인류세(Anthropocene)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그들에 의하면 대륙 빙하가 마지막으로 물러나기 시작한 1만 1700년 전에 시작된 홀로세는 온화한 기후 덕분에 생물종의 수가 많았던 시기였지만, 지금은 인간의 과도한 활동으로 인해 대멸종이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먼 미래에 인류가 우리 시대의 지층을 탐사한다면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될까? 인류세로 명명된 시대의 과잉 채굴과 한계를 모르는 상품화와 과도한 생산과 낭비, 그리고 이기적인 인류의 탐욕적 본성이 결합되어 만들어낸 참혹한 상황을 보고하며 어리석고 불행한 인류의 한 시대로 평가하지는 않을까?

지나친 경쟁 구도의 소비중심사회에서 벗어나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기 위해, 사회생태윤리는 큰 것보다는 작은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대량 생산과 소비보다는 나눔과 절제, 검약과 불편함을 미덕으로 삼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생태적 덕목들이 현대인들에게 일종의 시대정신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우선은 인류세에 대한 관심과 그로 인한 지구 시스템에 대한 경각심이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류세라는 용어 자체가 갖는 의미에는 지구에 대한 인간의 만행을 자성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측면이 있다. 더불어 지금까지 지구에 저지른 인류의 잘못된 행위를 개선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도 결국 인류 이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다소 오만한 입장도 공존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인류세 담론이 지구 시스템의 안정화에 현실적으로 기여하는 패러다임으로 작용하기 위해 어떠한 조정이나 절충, 또는 현실적인 변형이 필요할까?

지구 시스템 개념은 기존의 연구 대상들을 포괄하는 역동적이고 통합적인 접근이다. 이를 통한 인류세에 대한 관심은 생태계 파괴의 문제에 대해 우려를 제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 사회와 지구를 아우르는 공동의 담론이므로, 약자우선권의 사회윤리와 상호관계성의 생태윤리를 통섭하는 사회생태윤리가 유효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일부 교회는 마치 성서가 인간 사회만을 위하여 기록되었고, 인간의 구원, 그것도 영혼의 영존 가능성에 대한 내용에 집중된 것처럼 편협하게 가르쳐 왔다. 하지만 성서의 핵심 내용은 창조세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그 주제도 인간만이 아닌 창조세계 전체의 해방과 완성(로마서 8:21, 요한계시록 21:5)에 관한 것이다. 모든 것을 손수 만드시고 그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이 결국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세계의 파노라마에는 인간의 역사와 우주의 역사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깨달음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지금은 어느 때보다 교회와 사회가 합력하여 지구와 인간의 공멸이 아닌 상생을 위해 획기적인 변화를 시도할 때다.

박용범 교수 / 호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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