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조직된 부인조력회

제주에서 조직된 부인조력회

[ 선교여성과 교회 ] 전남 지역 여전도회 32

한국기독공보
2023년 08월 24일(목) 17:11
서평은 제주도와 추자도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당시 제주도는 전라도와 마찬가지로 남장로교 관할 지역이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여름 한 달 동안 지리산으로 피서를 가는데 서평만은 제주도와 추자도 전도에 힘을 쏟았다.

그녀는 선교사들의 손이 미치지 못했던 곳을 방문하곤 했다. 그에게는 일이 휴식이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주님의 가르침에 항상 충실하고자 했다. 특히 제주도에서는 모슬포를 중심으로 부인조력회와 확장주일학교에 전력했다.

제주도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인물은 1899년 프랑스 가톨릭 신부 구마슬이다. 복음이 잘 전파되다가 그곳 도민끼리 일어난 신축교란, 곧 이재수란에 의해 위축되고 말았다. 그러던 중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인(서경조 한석진 양전백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송인서)이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모인 창설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 노회에서 길선주 목사가 '제주에 전도자를 보내어 전도를 시작할 일'이란 안건을 제안하고, 1907년 1월에 일어난 성령의 불길을 남단에 위치한 제주도까지 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중 제일 나이 어린 이기풍(당시 43세) 목사가 최초의 제주도 전도자로 파송됐다.

이기풍 목사는 1908년 봄 제주도에 상륙했다. 그는 날마다 말을 타고 제주도를 순회하면서 1908년부터 1916년까지 복음의 씨를 뿌렸다. 그 결과로 성내교회를 비롯해서 금성교회 삼양교회 성읍교회 조천교회 모슬포교회 한림교회 용수교회 세화교회 등 많은 교회를 세웠다. 이기풍이 제주도에 온지 6년 후 1914년에 전라노회가 모슬포에 윤식명 목사를 파송했다.

1917년 전라노회가 전북과 전남 두 노회로 분립되면서 제주 북부 지방은 전북노회가, 남부 지방은 전남노회가 구역을 담당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제주 본도에는 복음이 전파됐지만 추자도에는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탓에 미전도 개척지로 방치돼 있었다.

서서평의 제주 사역은 1917년부터 시작된다. 그 당시 그는 군산선교부 소속으로 일하고 있을 때로 서울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가기 전이었다. 당시 이들의 방문 기록이 신문에 게재된 것을 보면 3월 20일, 서서평 제주 첫 번째 방문하고, 제주 성내교회 부인을 상대로 한 대부흥사경회를 인도했음을 알 수 있다.

"전남 제주군 서문안교회에서 이기풍 목사 부부와 군산 서부인(쉐핑)과 광주 서장로 부인(Mrs Swinehart)과 순천 기(greer-기안라) 부인 제씨를 선생으로 모시고 오전에는 부인사경회로 모여 진리를 공부하고, 오후에는 집집마다 다니며 주의 복음을 열심 전파하였고, 밤마다 이기풍 목사의 인도로 부흥회를 열고 10일 동안 여러 가지로 강연할 새, 남녀 400여 명씩 모여 신력한 전도를 많이 배워 새 술에 취한 듯하며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던 동포들이 성신의 감동을 입어 믿기로 작정한 자도 수십 명에 달하였고, 더욱 감사한 것은 본 교회 영수로 있던 홍순흥, 김재원 양씨를 장로 장립 예식을 했는데, 교우 다 기쁨으로 영광을 하나님께 드렸다 하더라."

1908년, 장로교 총회에 의해 제주 사역자로 파송 받았던 이기풍 목사가 제주에서 사역한지 8년 만에 성대가 막혀서 말을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는가 하면 관절염, 귓병 등으로 심한 고생을 하게 되었다.

전라노회는 그를 광주로 불러 올려 쉬게 했다. 그가 1917년에 서서평 선교사와 다시 제주를 찾았을 무렵에는 어느 정도 회복단계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제주교회를 개척하느라 혼신의 힘을 더했던 김재원의 장로 장립을 자신이 축복하고 싶었던 마음이 깊었을 것이다.

그 이후 1925년 모슬포교회와 제주 성내교회 부인조력회 창립을 거쳐 1933년 8월 1일 제주 전체를 망라하는 부인조력회 창립총회를 갖게 된다. 이미 1928년부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산하에 여전도회로 개칭이 됐으면서 호남과 충청남도, 그리고 제주는 여전히 부인조력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것을 볼 수 있다.

서로득 부인은 1920년 서평과 타마자 목사와 함께 모슬포를 방문했던 일을 '더 코리아 미션 필드'지에 기고했다. 서평은 세 번째 제주 방문 시기였다. 목포에서 냄새나는 작은 일본배를 타고 54시간에 걸친 항해 끝에 뱃벌미와 온갖 악취로 고생했던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았다.

일등칸은 일본 관리들이 탔고, 이등칸은 16명의 일본인들이 이미 자리를 차지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갑판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배가 항구에 닿자 모슬포 교인들이 마중 나왔고, 목사 댁에 머물렀던 서평은 타고난 조직력을 발휘해 곧장 전 교인을 5개 반으로 나눠 성경공부를 하도록 했다.

서평이 전라남도와 제주도 중간에 위치한 작은 섬 추자도에도 확장주일학교 선생을 파송한 해가 1922년이었다. 이때 선생으로 파송된 사람은 원용옥이다. 그는 추자도 출신으로 모슬포에 살다가 예수를 믿게 됐다. 예수 믿는 이들이 처음에는 김기남의 집에서 모였다. 이로 인해 하도 신양리에 교회가 서고 원용옥의 삼촌 원상건을 초대 전도사로 파송했다. 서평도 자주 왕래했다.

서평이 세운 광주 봉선리교회의 나병환자들은 원용혁, 광주부인조력회 김경신 전도사, 6·25 때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순교한 방계성, 이일학교 출신 강계성 등을 파송한 후 매일 점심을 굶어가며 양식 값을 저축해 매달 25원을 보내 제주 전도에 애정을 보였다. 제주 본도에 비해 복음이 늦게 들어가기는 했지만 추자도 주민 절반 이상이 교회를 다닐 만큼 교세가 늘었다. 교통이 불편한 낙도에 예수의 사랑을 그대로 실천한 결과다. 1925년 8월 모슬포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여러 곳에 부인조력회를 조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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