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내 여성 길드 형성.. 여성 역할 확대

교회 내 여성 길드 형성.. 여성 역할 확대

[ 존녹스로드순례기 ] 7. 세인트존스교회

김승호 교수
2023년 07월 26일(수) 10:00
개신교 진영은 종교개혁을 스코틀랜드 전역에 확산시키기 위해 여러 도시를 확보했는데, 가장 중요한 도시가 바로 세인트앤드류스이다. 영국의 다른 도시들처럼, 이 도시는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건물이 도시의 여러 곳에 흩어져 있어서, 도시가 대학이고 대학이 도시인 그런 곳이다. 존 녹스 이전의 종교개혁자 패트릭 해밀턴이 인문학부 교수 및 살바토르 채플의 음악 감독으로 활동했고, 존 녹스의 스승 존 메이어는 세인트 메리 칼리지의 학장으로 재직했다. 존 녹스 역시 이 대학의 신학부 학생이었으며, 녹스의 뒤를 이은 개신교 신학자 앤드류 멜빌은 이 대학의 교수 및 목사였다. 이처럼 세인트앤드류스 대학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16세기 초반부터 유럽대륙에서 밀려오는 루터와 칼뱅의 개신교 사상이 세인트앤드류스의 가톨릭 당국을 불안하게 했다. 드디어 1528년 가톨릭 당국은 가톨릭을 비판한 개신교 신학자 해밀턴을 화형에 처했다. 그러자, 해밀턴을 지지하는 이들이 해밀턴을 화형시킨 비튼 추기경을 살해하고, 그가 거주하던 세인트앤드류스 성을 점거했다. 그 후 가톨릭 당국이 프랑스 군대의 도움으로 다시금 성을 차지했고, 세인트 메리 칼리지를 건립하여 가톨릭 내부의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톨릭 내부의 개혁은 충분치 않은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영적 무게중심은 점점 더 개신교로 이동되었다.

세인트앤드류스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필자는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홀리 트리니티 교회를 방문했다. 설교단 대리석의 빈틈 사이로 강렬한 조명이 뿜어나오고 있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햇빛은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성화의 정교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예배당 내부의 웅장한 기둥들은 회중에게 안정감을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인상적인 것은 한쪽에 비치된 '회개 의자'와 '회개 스툴'이었다. 이는 당시 장로회의의 명령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자에게 이곳에 앉아있으라고 명령했던, 공적인 처벌 방법이었다. 교회의 권징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예배당 뒤쪽 벽에는 특이한 게시물이 있었다. 그것은 그동안 홀리 트리니티 교회를 담임했던 목회자 명단으로, A4 용지 한 장에 빼곡히 적혀있었다. 교회에서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의 목록이 기록된 A4 용지 두 장도 함께 게시되어 있었다. 몇몇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1559년 존 녹스가 홀리 트리니티에서 설교함" "1874년 후원이 폐지되고 목사는 회중이 선택함" 및 "1929년 여성 길드가 형성됨."

1547년 이 교회에서 최초로 공적인 설교를 전한 이후에, 1559년에 다시 존 녹스는 '성전 청결'이라는 제목의 유명한 설교를 전했다. 이 설교는 세인트앤드류스의 세속 당국을 설득해서 가톨릭을 단념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1874년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서 회중이 목회자를 선택하기 시작한 것은 목회자 청빙에 있어서 지역교회 회중의 권한이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1929년 교회 내에 여성 길드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여성들의 역할이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필자는 여행 후 자료를 정리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 여성 길드가 형성된 때가 본교단(예장통합) 산하 '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연합회'의 전신인 '조선예수교장로회 부인전도회'가 창립된 시기(1928년)와 거의 같다는 점이었다. 이런 유사점은 본교단 여전도회연합회가 홀리 트리니티 교회의 여성 길드와의 교류를 통하여, 교회 내 여성 리더십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를 알아보며 향후 여성 리더십의 발전을 위한 상호협력의 가능성 또한 있을 것으로 보인다. A4 용지 두 페이지에 적힌 역사적인 사건 목록을 하나씩 묵상하면서, 잠시 추억의 영화 장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김승호 교수/영남신대·목회윤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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